2024년 8월호

최태원의 두 마리 토끼 사냥 시작되다

[Focus] SK 역사와 미래가 걸린 리밸런싱

  • 김형민 아시아경제 기자 khm193@asiae.co.kr

    입력2024-08-0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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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장 18일간의 미국 출장 강행한 최태원 회장

    • 2012년 하이닉스 인수, HBM 시장 선점 성과는 인정

    • 최태원 리더십?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워”

    • 진짜 리더십은 위기 때 발휘… 지금이 그 시기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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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6~8월은 기업이 한 해의 전반기를 마무리하고 후반기 도약을 도모하는 시기다. AI 반도체 열풍에 힘입어 올해 가장 주목받은 SK그룹과 최태원 회장은 현재 ‘리밸런싱’으로 분주하다. 리밸런싱은 기업의 포트폴리오 안에 있는 자산의 비중을 조절하는 과정을 말한다. 비상장 기업까지 계열사 219개를 거느린 SK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재계 전체는 물론 관련 업계의 이목이 모두 SK로 향해 있다. 이들이 어떤 행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업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SK그룹은 비대해진 몸집을 줄여야 살 수 있다는 ‘위기의식’ 아래 리밸런싱에 나섰다. 사람으로 치면 수명 연장을 위한 ‘다이어트’가 시작된 것과 다름없다. 계열사를 줄이고 자본 지출 영역을 좁혀 선택과 집중을 이루겠단 뜻이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경기 불황의 여파를 최소화하고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에 따른 하반기 경제의 불확실성 등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 아니다. SK는 올해 초부터 주가 부양을 위해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작업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증권가에서부터 흘러나오면서 군불을 지폈다.

    5월 30일에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2심 선고가 나오면서 증권가 관측에 기름이 들이부어졌다. 재판부가 최 회장으로 하여금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 원, 위자료로 2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면서 최 회장으로선 이 거액을 마련하기 위해 그룹과 관련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을 처분할지 여부를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 최 회장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6공의 후광’으로 그룹이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됐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했다. 이후 흔들림 없는 경영 행보를 이어가겠단 뜻을 밝히고 대법원에 상고, 시간을 확보한 뒤 경영진과 향후 대응 방향을 논의했고, 이 과정에서 리밸런싱 작업을 화두로 올렸다.

    일련의 과정으로 볼 때, 최 회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리밸런싱 작업을 통해 그룹의 과거와 현재, 두 마리 토끼 사냥에 나섰다. 리밸런싱은 SK가 앞으로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정하고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우선은 목적이 있다. 한편으론 SK의 역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의 의미도 담고 있다. 리밸런싱의 성공은 회사가 장인이었던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일어선 것이 아닌, 최 회장 자신과 임직원들이 일궈낸 성공이었다는 점을 몸소 증명할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개 넘는 계열사… 방목 경영·이상 경영 비판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24년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결과’에 따르면, SK그룹의 계열사는 총 219개로 파악됐다. 같은 세 자릿수를 기록한 한화(108개)의 두 배보다도 많고, 삼성(63)·현대자동차(70개) 등 다른 주요 대기업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재계에선 울타리 없이 들판에 풀어놓고 관리하지 않는 ‘방목 경영’ 혹은 이상향만 좇고 실리는 챙기지 않는 ‘이상 경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내부에서도 자성과 성찰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지난 6월 중 열린 것으로 알려진 경영진 회의에서 “이름도 다 알지 못하고 관리도 안 되는 회사가 이렇게 많은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하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계열사가 왜 이렇게 많아졌는지, 그 배경과 원인을 따져보면 그룹의 수장인 최태원 회장의 경영 지식 습득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재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최 회장은 꽤 이상적인 사람이다. 현실보다는 상대적으로 꿈과 목표를 좇는 편이라고 전해진다. 최 회장은 책을 많이 읽는 ‘독서광’과는 거리가 멀고, 평소 전문가들을 패널로 초빙한 토론 수업을 통해서 경영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스타일로 전해진다. 토론은 독서에 비해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펼칠 수 있는 적극성이 발휘되는, 일종의 무대다. 책 속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독서는 그에 비해 소극적이다. 이런 적극성은 분명 토론의 장점이지만, 상대방의 적극성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최 회장이 토론을 통해 형성된 머릿속 세상만을 좇으려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도 계열사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데 한몫한 것으로도 보인다. 대한상의 회장직은 의외로 무거운 자리다. 소속 회원사들을 앞에서 이끌며 모든 현안에서 솔선수범해야 한다. 대한상의는 최근 ‘지속가능한 경영(ESG 경영)’과 그 일환으로 강조되는 탄소 배출량 감축 등과 관련해 많은 행사, 사업을 진행했다. 최 회장은 대한상의에서 이 행사들에 참석하고 대내외적으로 메시지를 띄우면서 SK그룹도 같은 방향으로 운영해 나가는 과정에서 계열사가 늘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리밸런싱 구상 = 최태원 리더십 직결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7월 2일(현지 시간)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SK바이오팜의 미국 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 본사를 찾아 바이오 사업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SK]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7월 2일(현지 시간)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SK바이오팜의 미국 법인 SK라이프사이언스 본사를 찾아 바이오 사업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SK]

    최 회장은 6월 21일 미국으로 출국한 이후 장장 18일 동안 현지 회사들을 둘러봤다. 오픈AI, 아마존, 인텔 등 글로벌 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과도 만났다. 당초 열흘 내외 짧을 것으로 예상됐던 출장은 2주를 거뜬히 넘겼다.

    최 회장은 그룹이 위기를 극복할 해답이 미국에 있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그 나름대로 경영전략을 몸소 실행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 회장은 그룹의 리밸런싱 필요성이 제기되던 때 다른 일을 제쳐두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6월 28·29일에 직접 참석해 그룹에 메시지를 던질 것으로 보였던 경영전략회의를 화상 참여로 바꾸면서까지 내린 결단이었다.

    그 결단 덕분이었을까. SK는 비교적 빠르게 방향을 잡았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분야에 초점을 맞춰 계열사들과 사업을 정리하고 그룹을 ‘슬림’하게 만들기로 하고 움직이고 있다. 최 회장은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경영전략회의에서 “지금 미국에서 AI 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할 정도로 AI 관련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고 말했다. 이런 최 회장의 결단에 맞춰 CEO들은 밸류체인을 재정비하고 근본적인 체질 변화에 나서기로 합심했다. 투입 자본으로 2026년까지 80조 원을 확보하기로 목표를 잡았는데,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점하면서 그룹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한 SK하이닉스가 선봉에 설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그룹 차원에서 2028년까지 총 103조 원의 투자도 받아 반도체 사업 경쟁력을 더욱 끌어올리기로 했다. 세부적으론 HBM 등 AI 관련 사업 분야에서만 약 82조 원(80%)을 투자한다. SK하이닉스 등 AI·반도체 밸류체인에 관련된 계열사 간 시너지 강화를 위해 지난 7월 1일부로 수펙스추구협의회에 ‘반도체위원회’를 신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을 위원장으로 보임키로 결정하기도 했다. 연일 호실적으로 고공 행진 중인 SK하이닉스가 앞에서 그룹 전체를 이끌도록 하는 가운데서, 뒤에선 계열사를 신속히 정리, 급격한 지배구조 변화에 따라 그룹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단 구상으로 읽힌다. 그룹의 투자회사인 SK스퀘어도 한명진 투자지원센터장을 신임 대표 내정자(사장)로 선임하고 반도체 투자전문회사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새출발했다. 그룹의 투자 방향을 반도체 중심으로 전환하고 반도체 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구상이 성공하느냐 여부는 최 회장의 리더십 문제로 직결될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선 그간 타 기업 총수들에 비해 최 회장의 리더십이 뚜렷하지 않다는 평가는 간간이 있었다. 대한상의 회장직을 맡는 등 재계의 리더로, 그룹의 리더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음에도 그의 리더십은 한 단어로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적지 않았다. 2012년 3월 하이닉스를 인수하고 HBM 시장에 뛰어든, 과감한 도전과 시도로 최 회장이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진짜 리더십은 위기에서 발휘되기 마련이다. 지금이 그런 시점이다.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에 쏠린 눈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은 현재 회장직 승계 구도에 영향을 미칠 유력 인사로 거론된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6일 부산 동구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부산시민의 꿈과 도전’ 격려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최 부회장. [뉴시스]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은 현재 회장직 승계 구도에 영향을 미칠 유력 인사로 거론된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6일 부산 동구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부산시민의 꿈과 도전’ 격려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최 부회장. [뉴시스]

    SK는 하이닉스, 텔레콤 등 AI와 데이터 관련 사업에 관해서는 거물급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어, 이 분야에서 정리 작업은 비교적 쉬운 상황이다. 오히려 주목도는 에너지솔루션 사업, 특히 배터리가 더 높다. SK의 리밸런싱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업계에서는 다양한 합병설이 나오는데 이 역시도 모두 에너지 관련 기업들이 거론되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 SK온과 SK엔무브의 합병 가능성이 제기됐고, 그룹 내부에선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여지를 남겨뒀다.

    다만 SK온의 경우엔 여러 변수가 많다. 배터리 사업을 주요 먹거리로 삼아온 SK그룹이 이 기업을 다른 곳에 매각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리밸런싱 작업을 통해서 어떻게든 SK온을 살릴 방법을 찾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SK온은 ‘만년 적자’ 기업의 이미지가 최근 구축됐을 만큼 상황이 어렵다. 2021년 출범 이후 올 1분기까지 10개 분기 연속 적자였다. 누적 적자는 2조5876억 원에 달하고 다가오는 2분기 실적 발표에서도 3000억 원대 적자가 예상된다.

    회사 내부에선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하는 등 쇄신에 나섰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해 보인다. 확실한 전환점이 없다면 현재의 거대한 적자를 해결하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7월 4일 SK그룹이 캐나다수출개발공사(EDC)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중장기적 협력관계를 구축, 청정 기술과 배터리 등 첨단산업 분야의 협력으로 탄소중립을 함께 앞당기기로 한 것은 호재다. 이 MOU를 통해 SK온이 수천억 원대 금융지원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석희 SK온 사장이 지난 4월 SK와 EDC 간 회동에 참석한 만큼, 그 가능성은 더욱 높게 점쳐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도 결국은 SK온의 부활을 위한 선택이 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SK온은 SK이노베이션에 종속된 자회사로, SK이노베이션이 SK E&S와 합병하면 SK온도 살아날 탈출구가 열릴 수 있다. 동시에 SK이노베이션과 SK E&S가 합쳐진 초대형 에너지 기업이 탄생, 새바람을 일으키며 에너지업계의 판도를 좌우할 가능성도 있다. 계열사 합병을 통해 업계에서 큰 영향력을 확보하면 SK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다. 다만 각 기업의 투자자들과 주주들이 강하게 반대할 가능성이 있어 이를 넘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의 회장직 승계 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최 회장의 동생인 최 수석부회장은 그룹의 배터리 사업을 전면에서 이끌고 있다. 그는 최근 최 회장의 이혼소송과 함께 유력한 차기 회장 후보로 주목받았다. 이혼소송 과정에서 최 회장의 세 자녀가 모두 SK그룹의 지분이 없는 것이 확인되면서 3세 경영이 현실화하긴 어렵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런 가운데, 최 수석부회장이 성공적인 배터리 사업 변화와 안정을 가져온다면 그룹의 리밸런싱 작업에서 가장 부각되면서 그룹 수장 자리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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