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고·이자 장사 비판에 5대 은행 中 4곳 교체
안정 대신 ‘고강도 인적 쇄신’으로 조직에 긴장감
고환율·경기침체 속 내부통제·수익성 확보가 과제
“조직문화·지배구조 혁신 없인 변화 어려워”
강태영 NH농협은행장, 이호성 하나은행장, 이환주 KB국민은행장, 정상혁 신한은행장, 정진완 우리은행장(왼쪽부터). [각 사]
은행-비은행 시너지 키운다… 계열사 은행장 ‘대세’
가장 큰 특징은 비은행 계열사 대표(CEO)가 은행장에 발탁됐다는 점이다. KB국민은행장에는 이환주 KB라이프생명 대표가, 하나은행장엔 이호성 하나카드 사장이 임명됐다. NH농협은행장 역시 강태영 NH농협캐피탈 부사장이 새 수장으로 낙점됐다.
특히 KB금융그룹은 비은행 계열사 대표가 국민은행장에 오른 첫 사례를 만들며 주목받았다. 이환주 행장은 KB라이프생명 대표로 재임하면서 KB생명보험과 푸르덴셜생명보험의 성공적 통합을 이뤄낸 인물이다. 취임 첫해 2562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이전엔 KB국민은행 강남교보사거리지점장, 스타타워지점장, 영업기획부장, 외환사업본부장, 개인고객그룹 전무, 경영기획그룹 부행장, KB금융지주 재무총괄(CFO) 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그룹 내 주요 핵심 직무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KB금융그룹 계열사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대추위)는 “조직의 안정 및 내실화를 지향함과 동시에 지주·은행·비은행 등 그룹 전 분야를 두루 거치며 탁월한 성과를 입증한 경영진이 최대 계열사인 은행을 맡아 은행과 비은행 간 시너지 극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KB금융의 인사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호성 행장은 트래블로그 카드와 법인 영업을 기반으로 수익성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된다. 트래블로그 흥행에 힘입어 하나카드의 지난해 3분기 누적 순이익은 2023년 같은 기간보다 44.8% 증가한 1884억 원을 기록했다.
그는 대구중앙상업고를 졸업하고 하나은행에 입행해 중앙영업그룹장, 영남영업그룹장 등을 두루 거치며 풍부한 현장 경험 및 영업 노하우를 쌓았다. 그룹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는 추천 사유로 “대내외적으로 불확실한 금융 환경 속에서 고객 기반을 탄탄히 하고 풍부한 현장 경험과 영업 노하우를 갖춘 적임자로 평가했다”고 밝혔다.
강태영 NH농협은행장은 다년간 여신 관련 업무를 수행했고, 인사부와 종합기획부 등의 근무 경력과 일선 현장에서 쌓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기획·영업력을 두루 겸비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디지털전환(DT)부문 부행장 재임 시 농협금융지주 디지털금융부문 부사장을 겸임하며 뱅킹 앱을 그룹 슈퍼플랫폼으로 전환하는 데 앞장섰던 디지털 전문가로 여겨진다.
1966년생으로 대아고, 건국대를 졸업한 이후 1991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했다. NH농협은행 서울강북사업부장과 디지털전환(DT)부문 부행장 등을 거쳤다. 임추위는 “디지털 혁신 주도와 고객 맞춤형 서비스 제공 등을 주요 경영전략으로 내세우고 있어서, 신기술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갖춘 강 내정자가 데이터에 기반을 둔 초개인화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비은행 포트폴리오 확대’가 중요해진 시점인 것도 이들이 선임된 이유로 꼽힌다. 올해 금리 인하기에 접어들면서 은행 중심의 이자 수익 의존도를 낮추고, 비은행 계열사와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금융사 실적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중심의 ‘이자 장사’라는 비판이 거센 만큼 비은행 계열사와의 시너지가 중요해진 것이 은행장 인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익 위해 ‘영업통’ 전면 배치
은행들은 ‘영업통’을 전면에 내세운 인사로 수익성 확보에 사활을 건 양상이다. 기준금리 하락 및 가계대출 규제 강화로 인해 주 수익원인 이자 이익이 둔화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5대 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연임에 성공한 정상혁 신한은행장은 우수한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임기 2년으로 재선임됐다. 그는 자산 성장, 비이자 이익 증가, 글로벌 성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내며 혁신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1년간 영업 현장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과 실적을 기반으로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신뢰를 얻고 있다.
정 행장은 압구정중앙지점 부지점장, 분당지점 부지점장, 둔촌동지점장, 삼성동지점장, 역삼역금융센터장, 성수동기업금융센터 커뮤니티장 등으로 영업 현장을 누볐다. 영업 실적으로 수상한 횟수만 28회에 달한다.
정진완 우리은행장도 영업통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국내외 영업 현장을 두루 경험하며 중소기업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왔다. 1995년 입행해 종로3가지점장, 기관영업전략부장, 중소기업전략부장, 삼성동금융센터장, 테헤란로금융센터 본부장, 본점영업부 본부장을 거쳐 중소기업그룹 부행장을 역임했다. 전략적 사고와 추진력을 겸비해 어려운 영업 환경에서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올해는 기준금리 하락과 가계대출 규제 지속으로 이익 구조가 흔들릴 가능성이 커지며 수익 다변화가 절실해졌다. 또 다른 은행권 관계자는 “지난해 금융당국의 고강도 가계대출 관리 압박으로 대출을 원하는 대로 확대할 수 없었다”면서 “올해는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하면서 어떻게 영업할지가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은행권은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운 한 해를 보냈다.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사태와 잇따른 대규모 금융사고로 신뢰 추락을 겪었다. 이에 올해엔 ‘신뢰 회복’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안게 됐다.
“조직문화·지배구조 혁신 없인 신뢰 회복 어려울 것”
은행의 신뢰도가 도마 위에 오른 건 대규모 손실을 일으킨 홍콩 H지수 ELS 사태다. 홍콩 증시에 상장된 50대 중국 기업을 추려 산출하는 H지수는 손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품으로 여겨졌다. 소비자들은 ‘1금융권’인 은행에서 판매한 상품인 만큼 예금 수준의 안전성을 기대했다. 그러나 H지수는 지난해 초에 고점 대비 반토막이 났고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봤다.
금융감독원의 조사 결과 일부 은행에서 고령의 치매 환자에게 상품을 권유하는 등 불완전판매로 의심되는 사례가 드러났다. 금감원에 따르면 홍콩H지수 ELS 총 판매 잔액(지난해 말 기준)은 19조3000억 원으로, 이 중 80%인 15조9000억 원(24만8000계좌)이 은행을 통해 판매됐다.
금감원은 부당 권유 금지 및 설명 의무 위반 등을 들어 은행의 책임을 인정하고 30~65% 수준의 배상 비율을 산정하며 제재 수위를 높였다. 이에 은행들은 자율 배상과 더불어 ELS 상품을 판매 중단했다.
특히 우리은행에선 손태승 전 우리금융그룹 회장의 친인척이 부당 대출을 받은 사실이 발각돼 금융권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총 616억 원 규모의 대출이 실행됐으며, 이 가운데 350억 원은 통상의 기준·절차를 따지지 않은 부적정 대출로 파악됐다.
이에 우리금융그룹은 우리은행장 교체에 이어 임기가 만료된 자회사 대표이사 6명 전원을 교체하는 대대적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그룹 윤리경영 및 경영진 감찰 전담 조직인 윤리경영실도 올해 3월부터 운영할 방침이다.
임종룡 회장은 “임원 감찰 전담기구를 이사회 내 윤리·내부통제위원회 직속으로 설치하고 실장도 외부 법률 전문가로 선임한 것은 경영진의 일탈행위 원천 봉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며 “그룹 경영진이 앞장서서 무신불립(無信不立)의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금융그룹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에 나설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내부통제 강화가 은행권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면서 금융당국은 선제적·효과적 내부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6일 ‘은행권 내부통제 워크숍’에서 박충현 금감원 은행 담당 부원장보는 “은행 업무의 디지털화 등에 맞춰 내부통제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담당 인력의 전문성 제고, 준법의식과 책임 중심의 조직문화 정착 등을 추진해야 한다”며 “감독 당국과 은행권이 중대 금융사고 예방을 위해 마련했던 내부통제 개선 대책이 안착해 올해가 은행권 신뢰 회복의 원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업계에선 은행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조직문화 혁신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책무구조도를 통한 지배구조 변화뿐 아니라 보수적·수직적 조직 문화를 바꿔야만 근본적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금융사들이 당국에 책무구조도를 제출하며 내부통제 시스템 구축을 약속했지만, 보수적·수직적 조직문화와 지배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