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 예측, 인물만 보지 말고 본질 살펴야
사전 조율 없이 정상 결단에만 기대니 실패할 수밖에
철저한 비핵화 검증 필요한 美, 받아들일 리 없는 北
한국, 트럼프 돈 뜯는 ‘양아치’로 보면 4년 날린다
2019년 2월 27일(현지 시간)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 회담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만나 대화하고 있다. [AP/뉴시스]
이러한 전망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그에게 매우 유리한 협상 환경을 만들었다. 협상을 앞두고 ‘예측 어려운’ ‘터프한’ 협상가라는 명성이 퍼져 있으면 이보다 더 유리한 협상 환경은 없다. 이런 환경을 선점하면 상대방은 협상 전부터 그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주면 될까를 계산하게 된다. 예컨대 그가 주한미군 철수를 감행할지도 모른다거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갖고 협상에 임하면 승부는 어느 정도 결정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예측 불가 트럼프? 너무 예측 가능해서 문제
이는 국제정치가 여러 강대국으로 다극화하고 있다는 많은 국제정치 학자의 진단과는 반대로 미국의 힘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미국이 아직도 강한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 인프라가 대부분 미국 중심으로 만들어진 데 있다. 국제제도, 동맹체제, 화폐금융 시스템, 통신망과 표준 등이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됐다. 경제 면에서도 원천기술, 투자, 소비시장 등 미국의 비중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아무리 경제력이 기울었다 하더라도 미국이 기존의 국제질서에서 발을 빼거나, 있는 걸 빼앗는 등 다른 나라를 압도할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은 국제정치에 많은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우방국들은 트럼프가 예측 불허의 협상의 달인이니, 큰일 났다느니 호들갑을 떨면서 사실상 그에게 유리한 협상 구도를 처음부터 만들어주고 있다. 이른바 현자라는 사람들은 세계가 다극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모든 관심을 미국 대통령 한 명에게 보내는 것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창해 온 사람들도 트럼프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걱정을 토로한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미국 지도자 한 명이 4년 안에 망가뜨릴 수 있는, 허약한 질서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가당착적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이 나타나는 이유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않고, 싫어하는 인간형을 중심으로 문제를 해석하려는 데 있다. 트럼프라는 인간형이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 요소를 과도하게 부각하다 보면 비판 강도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사실 그는 예측 불허의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예측이 가능해서’ 문제인 인물이다. 우리는 그가 무얼 원하는지, 그걸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근래 출간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수많은 보고서를 보면 대부분 거의 같은 목소리로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이슈에서 무엇을 요구해 올 것인지를 예측하고 있다. △동맹국과의 방위비 분담 조정, △관세 무기화, △대중(對中) 압박,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휴전), △새 전쟁 회피, △불법이민 강력 규제, △기후변화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서 오는 전통 에너지 산업 부활, △에너지 자립 등의 내용이다. 즉 트럼프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인물이며, 다만 그의 요구에 어디쯤 선을 그어야 선방하는 것인지 하는 의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근래 모순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을 보이는 주제가 바로 북·미 관계다. 많은 전문가가 트럼프가 터프한 협상가라고 분석하면서도 김정은과의 협상은 안이하게, ‘이벤트’처럼 할 것이라는 모순된 전망을 하곤 한다. 과연 전망대로 될까.
뼈저린 실패 경험… 북·미 ‘톱다운’ 협상의 그림자
전문가 상당수가 최악의 경우 트럼프가 한국을 우회해서 김정은과 ‘톱다운(Top-Down)’ 방식의 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의 끝에서부터 협상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톱다운 방식의 비핵화 협상이든, 군축 협상이든 트럼프가 협상을 통해 임기 내에 가시적 성과를 얻어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트럼프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톱다운 방식 협상의 리스크를 뼈저리게 학습했다. 외교가에선 흔히 “실패하는 정상회담은 없다”고 말한다. 정상회담은 대부분 양국 정상이 실제 만나기 전 양국의 실무진이 서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합의해 놓기 때문이다. 즉 정상회담 당일 양국 정상은 합의문에 ‘사인’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실무진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회담에서 정상을 당황하게 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이며, 정상도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모습을 대내외에 보이는 것에 주력한다.
트럼프는 실무진의 사전작업이 깔끔하지 못했음에도 2018년 싱가포르 정상회담과 모호한 합의문을 받아들였다. 합의문에는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 로드맵, 타임테이블, 종착지가 명기돼 있지도 않았고, 초기 이행 조치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지 않았다. 트럼프가 구체적이지 않은 합의문을 받아들인 것은 톱다운 방식으로 김정은을 설득해서 비핵화를 이루는 협상을 원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러한 톱다운 방식의 협상에 한국 정부와 많은 전문가가 기대를 걸었지만, 이 방식의 취약함은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실무진의 사전 협상과 검증 작업을 유명무실하게 한 채 ‘정상 간 담판’에만 기대 정상회담을 한 결과, 실무진이 해야 할 일을 정상이 협상장에서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김정은의 시각에서 ‘통 큰 결단’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전에 미국 실무진이 확인하지 못했기에, 현장에서 트럼프가 직접 확인해야 했다. 확인·검증·문안 협의라는 실무적 절차를 건너뛴 합의문이 어떤 문제를 내포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구체성이 떨어지는 영변의 핵시설 폐기라는 카드와 유엔(UN) 경제제재 5건 해제를 트럼프가 즉석에서 교환해 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유엔의 경제제재 5건은 김정은이 2016년과 2017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추진한 세 번의 핵실험과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대응해 부과된 경제제재다. 검증 가능하고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확실한 증거 없이 미국이 이를 해제해 주는 것은 상당한 비등가 교환이다.
이를 들어줬다면 터프한 협상가라는 트럼프의 명성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호구’ 이미지만 남았을 것이다. 결국 김정은은 톱다운 정상회담이라는 형식에 취해서 단 한 장의 ‘통 큰 협상 카드’만 가져왔고, 이것이 죽은 카드가 되는 순간 굴욕적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다. 2019년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3월 리용호 당시 외무상이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들의 협상안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런 설명은 정상회담 전 실무진 간에 정리했어야 했다.
검증해야 하는 美, 받아들일 수 없는 北
설령 다시 시작되는 북·미 정상회담의 목표가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이라 하더라도 톱다운 방식으로 4년 안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매우 어렵다. 과거 비핵화 협상이 진행될 때 미국이 주문과 같이 외웠던 2가지 원칙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와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다.
FFVD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새로 등장한 용어지만 사실상 CVID와 같은 의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두 가지 원칙에 공히 등장하는 ‘검증(verify)’이라는 단어다. 즉 확실한 검증이 되지 않으면 협상의 최종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정상 간의 톱다운이라는 방식에 기대를 너무나 많이 걸었던 탓에 검증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를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정의용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김정은을 만나 그의 비핵화 발언을 듣고 이를 미국에 전달했을 때, 그 발언의 진정성에 대한 철저한 검증 작업이 선행됐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북·미 정상회담의 빠른 성사에 매달려 그 부분을 건너뛰었다. 이른바 ‘최고 존엄’의 발언이기에 그대로 믿었던 것이겠지만 2016년과 2017년 사이 모든 리스크와 경제제재를 감수하고 개발한 핵무기를 북한이 개발하자마자 2018년에 바로 포기하겠다고 한 발언은 쉽게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은 검증의 나라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신뢰하지만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라고 말한 바 있듯, 미국은 북한과 같은 나라에 철저한 검증 없이 합의를 해주는 나라가 아니다. 실제로 필자가 워싱턴의 북핵 관련 실무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일관되게 들은 말이 ‘검증’이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아무리 만나도 로드맵의 단계마다 검증을 요구할 것이고, 북한은 자신의 ‘절대 보검’인 핵무기와 관련해선 미국에 완벽한 검증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제재를 우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러시아라는 혈맹도 생겼으니 북한은 1기 트럼프 행정부 때와 달리 조급할 필요도 없다.
설사 트럼프가 비핵화를 목표로 하지 않고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장거리 핵미사일만을 협상 대상으로 한다 하더라도, 북한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이 카드를 웬만한 보상 없인 검증 가능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안보 지형상 북한으로선 단순히 핵보유국이라는 지위가 아니라 미국의 확장억제까지도 무력화할 수 있는, 이른바 ‘핵 강국’ 지위가 더 중요해졌다. 이제 북한은 한반도만을 대상으로 하는 국지적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 중국, 이란과 함께 세계를 상대로 힘겨루기를 하는 저항의 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트럼프와 함께 미래 그릴 외교적 기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김정은과 조우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조우하기 전 과거와 같이, 이른바 ‘러브레터’가 상호 간에 오고 갈 수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트럼프는 자신이 위험한 국가의 독재자들과도 친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해결사’ 이미지를 굳히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 러브레터가 오고 가면 미국을 트집 잡아 도발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직통 라인을 개설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셀럽으로서 관심을 끌려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벤트는 그것이 설사 평양에서 성사된다 하더라도, 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을 억지하는 효과는 있을지언정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포기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에겐 주어진 4년이라는 한시적 기간 동안 지리한 검증의 기싸움이 필요한 북핵문제보다 성과를 더 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 까닭이다.
안보·외교정책을 수립할 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둬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최악의 경우를 잘못 진단해 그것을 ‘일상적 시나리오(business as usual)’로 상정할 경우 다른 건설적인 곳에 활용돼야 할 예산·자원이 낭비될 수 있다. 그래서 정확한 진단이 중요하다. 트럼프는 최악의 경우라는 블러핑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협상가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주고받기 계산만 하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다. 그의 세계관을 그가 젊었을 때부터 추적해 보면 매우 일관된, 그만이 그리는 세계가 발견된다. 그것이 ‘트럼프 버전 공정과 상식’이다.
따라서 한국은 트럼프가 실현하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선행 학습하고, 그것에 맞춰서 같이 그림을 그려주는 방식으로 그의 시대를 맞이해야 한다. 트럼프를 단순히 우방국으로부터 돈만 뜯어내는 ‘양아치 대통령’으로 착각하면 4년 내내 돈 계산만 하다가 우리가 그와 함께 그릴 수 있는 미래의 그림을 놓치게 된다. 트럼프는 바꾸고 싶은 세상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 세상은 결코 한국엔 불리한 세상만은 아니며, 오히려 외교적 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신동아 2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