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이란 본래 생겨나자마자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그렇듯, 한번 피어난 음은 돌이킬 수 없다.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음악을 듣기 위해선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에 있어야 했다.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자마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악보를 만들어 기록했지만 뛰어난 연주의 감동은 쉽사리 재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연주자들의 음악을 여럿이 함께 듣기 위해 커다란 콘서트홀이 지어지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때까지는 무엇이 진짜 음악인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영국 BBC는 1930년 BBC 교향악단을 만들었다. [BBC Archive 페이스북]](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9c/1f/f4/679c1ff40d37d2738276.jpg)
영국 BBC는 1930년 BBC 교향악단을 만들었다. [BBC Archive 페이스북]
이렇게 완성된 디스크를 금속판으로 만들어 마스터 디스크를 제작했고, 나무 진액과 곤충 분비물로 만든 천연수지인 셸락(shellac) 디스크에 찍어내는 방식으로 음악을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었다. 드디어 소리가 물리적 방식으로 디스크에 기록돼 복제할 수 있었으나 아직 무엇이 진짜 음악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복제돼 재생되는 음악의 음질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가짜 음악의 등장
![1831년 제작된 패러데이 디스크는 최초의 발전기였다. 말굽 모양의 자석(A)은 디스크(D)를 통해 자기장을 생성했다. [위키피디아]](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9c/20/89/679c20890d0cd2738276.jpg)
1831년 제작된 패러데이 디스크는 최초의 발전기였다. 말굽 모양의 자석(A)은 디스크(D)를 통해 자기장을 생성했다. [위키피디아]
1831년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견한 후 전화기가 발명되면서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방법이 발전했고, 기록되거나 재생되는 소리의 음질이 비약적으로 개선됐다. 1920년대엔 진동판이 기압의 변화에 반응해 생성되는 진동으로 두 도체 사이의 정전용량에 변화가 생기는 원리를 이용해 음성을 전기신호로 변환하는 콘덴서 마이크와 진동판이 자기장 내의 코일을 움직여 전류를 생성하게 하는 다이내믹 마이크가 개발됐다. 1930년대가 되자 벨연구소(Bell Labs)와 슈어(Schure) 같은 회사에서 이 기술을 사용한 상업용 마이크를 생산했다.
1935년엔 독일에서 마그네틱테이프를 이용한 최초의 상업 녹음기가 개발됐다. 전기신호로 바뀐 공기의 파동을 자성 물질로 코팅된 테이프 위에 자기장으로 기록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소리의 크기와 음의 높이는 전압으로 변환돼 마그네틱테이프에 기록되고, 이 테이프를 잘라내 이어 붙이는 단순한 편집을 통해 소리를 자르고 이어 붙일 수 있게 됐다.
이 기술은 방송국에서 음악을 녹음하거나 재생하기 위해 주로 사용됐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사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대표적 예로 나치는 마그네틱테이프에 기록된 히틀러의 연설을 라디오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방송했고, 마치 히틀러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연설하는 것처럼 꾸며서 대중을 선전 선동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무엇이 진짜인지 질문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음악의 공간 확장
서양음악은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을 지배하는 자들에 의해 좌우돼 왔다. 녹음된 음악이 주파수에 실려 개인이 각자 소유한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시대가 오자 음악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바뀌었다. 음악을 녹음하는 시설과 기술을 보유하고, 녹음된 음악을 방송 네트워크를 통해 라디오 수신기에 전달하는 방송국이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소리를 다루고 공간을 울리는 방식이 바뀐 결과였다.
전기신호로 바뀐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쉽게 증폭할 수 있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하기 위해 소리가 잘 울리도록 디자인된 크고 비싼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게 됐다. 또한 여럿이 모이는 공간보다는 오히려 연주하거나 듣는 음악이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음이 잘 차단되는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1923년 독일의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이 세계 최초로 교향악단을 설립했고, 1930년에는 영국의 BBC가 BBC 교향악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1937년엔 미국의 NBC가 유럽의 방송 교향악단을 모델로 미국 최초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설립하면서 당시 유럽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를 초빙했다.
NBC 심포니는 NBC가 보유하고 있는 라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매주 토요일 미국 전역에 클래식 음악 공연 실황을 전달했다. 동부의 뉴욕·보스턴·필라델피아와 워싱턴 DC, 중서부의 시카고·디트로이트·세인트루이스·클리블랜드, 남부의 애틀랜타·뉴올리언스·댈러스·마이애미, 서부의 LA·샌프란시스코·시애틀 같은 주요 대도시를 망라했다. 라디오 주파수에 실린 전기신호는 뉴욕 NBC 스튜디오의 음악 공간을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를 듣는 개인들의 음악 감상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인류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이때부터 음악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경험하는 예술에서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예술로 발전했다. 그리고 작사가와 작곡가, 연주자들은 방송사와 수익을 나누는 저작권자가 됐다. 인류가 소리를 듣기만 하는 수준을 넘어 소리를 잘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생긴 변화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마그네틱 녹음 기술을 얻게 된 미국은 1948년 상업용 테이프 녹음기를 개발했다. 같은 음악을 여러 번 녹음하고, 녹음된 결과물을 잘라 붙이는 편집이 가능해진 것. 이 기술은 디스크 녹음을 빠르게 대체해 1950년대 이후엔 아날로그 녹음 기술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1955년 뉴욕에 나타난 캐나다 출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마그네틱테이프를 이용한 아날로그 녹음 기술을 사용해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고, 이 녹음으로 그는 전설적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올랐다.
녹음·편집으로 새 지평 연 글렌 굴드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Gettyimage]](https://dimg.donga.com/a/700/0/90/5/ugc/CDB/SHINDONGA/Article/67/9c/20/ff/679c20ff1c24d2738276.jpg)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Gettyimage]
첫 곡 아리아부터 마지막 변주까지 마치 쉬지 않고 한 번에 연주된 것처럼 들리는 이 연주가 수없이 반복된 녹음과 편집을 통해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은 ‘진짜 음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게 한다. 음악을 연주하는 공간과 듣는 공간이 분리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고, 라디오나 음반 같은 미디어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것이 보편화한 1950년대 중반에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해야만 했던 예술가와 감상자는 이때부터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과 미디어를 통해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의 관계로 바뀌었다. 미디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글렌 굴드는 자신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81년, 디지털 녹음이 가능해지자 이 곡을 다시 녹음했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디지털 녹음 기술은 전압으로 변환된 소리 신호를 다시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로 바꾸는 기술이다.
데이터가 된 음악
샘플레이트(Sample Rate)와 비트레이트(Bit Rate)의 개념을 이해하면 디지털 음악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헤르츠(Hz)를 단위로 하는 샘플레이트는 1초당 전압의 변화를 얼마나 세분해 측정했느냐를 나타내는 개념인데, 영화에서 프레임 속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초당 프레임이 많을수록 움직임이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샘플레이트가 높으면 소리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bps(비트/초)를 단위로 하는 비트레이트는 전압의 크기를 얼마나 정밀하게 표현하느냐와 관계가 있다. 보통 콤팩트디스크(CD) 음질에 쓰이는 16비트 녹음에선 전압의 크기는 2의 16제곱인 6만5536 단계로 표현된다. 그래서 샘플레이트는 음의 높낮이를 재현하는 정밀도를 결정하고, 비트레이트는 음의 크기 변화의 범위를 결정하게 된다.
전기신호의 변화가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로 표현되자 소리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했다. 여러 녹음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고, 소리의 순서 정도를 편집하는 것이 아날로그 기술이었다면,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면서 연주의 빠르기와 음색, 공간감 같은 요소마저 편집자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음악이 데이터가 됐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데이터가 된 음악은 네트워크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선 데이터의 크기를 줄여야 했다. 그래서 사람의 귀가 구별하지 못하는 음역대의 데이터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압축하는 기술이 발달했고, 방송국이 갖고 있던 음악에 대한 지배력은 데이터로 된 음악을 네트워크를 통해 개개인에게 쉽고 빠르게 전달해 주는 통신사나 애플 같은 기업으로 이동했다. 음악 감상자들은 이제 음반을 구입하는 대신 월 구독료를 내고 이런 기업들이 제공하는 음악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는 권한을 얻는다.
이런 데이터베이스들은 같은 하나의 음악마다 mp3, wave, aac, flac 같은 다양한 압축 방식으로 변환된 음악 파일을 제공하는데, 보통 사람의 귀로는 파일 간의 차이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재생 기기의 차이와 네트워크의 상황에 따라 편리한 것이 선택되는 여러 종류의 진짜 음악이 존재할 뿐, 이제 진짜 음악과 가짜 음악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해졌다.
20세기 초부터 녹음되기 시작한 클래식 음악은 축적을 거듭했고, 전설적인 녹음도 함께 늘어났다. 마치 좋은 빈티지 와인이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으면서 창고에 계속 쌓이는 것과 같다. 이 시대의 최고 음악가들은 과거의 명인들과 경쟁해야 하고, 신예 피아니스트들은 아무리 좋은 녹음을 남겨도 늘 리히터(Sviatoslav Richter·러시아의 전설적 피아니스트)와 비교당한다. 그리고 유럽 연주 여행 중 도시마다 남겨놓은 리히터의 베토벤 소나타 녹음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좋은 진짜 베토벤 연주인가.
지금 품어야 할 기준
데이터는 네트워크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복제되고 지워진다. 네트워크를 통해 복제되는, 데이터가 된 음악을 듣는 세상에서 음악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 오히려 음악을 선택하는 주체인 내가 중요하다. 아이리버 같은 우리나라 회사가 세계 최고의 mp3 플레이어를 만들고도 애플 같은 회사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음악이 데이터가 됐고, 데이터는 수없이 복제돼 네트워크 위를 떠다닐 운명이라 것을 알아채지 못한 데 있다. 스티브 잡스는 데이터가 돼 인터넷을 떠도는 음악에 아이튠즈라는 근사한 집을 지어줬다. 그리고 고향을 잃은 음악 파일에 원래 속해 있던 음반 이미지를 연결해 주고, 음악 감상의 주체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했다.
소리가 기압이던 시대에는 기압을 잘 다루기 위해 음향이 좋은 공간을 소유한 자들이 음악을 지배했다. 소리가 전압으로 표현돼 전파를 타고 이동할 때는 전기신호와 주파수를 잘 다루는 방송국이 음악을 지배했다. 그리고 소리가 데이터가 되자 이제는 데이터의 속성을 잘 다루는 자가 음악을 지배한다.
무엇이든 다스리려는 자는 이 시대에 다스리고자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인공지능의 시대고 지식과 예술이 모두 데이터가 돼버린 시대다. 진위와 선악을 구분하는 도덕적인 옛 잣대로는 이 시대를 잘 다룰 수 없다. 편리함이라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 세련됨 같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것들이 다스리는 자가 품어야 할 기준이 돼야 한다.

● 1970년생
● 서울대 심리학과 졸업
● 2023년 제1회 대한민국언론인대상 수상
● ‘당신의 밤과 음악’ ‘노래의 날개위에’ ‘명연주 명음반’ 등 KBS클래식 FM에서 다수의 프로그램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