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호

잊었던 꿈 이어가는 ‘시니어 배우’들의 열정

[20대 리포트] “내일을 어떤 날로 만들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

  • 임다솜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dlaektha25@naver.com

    입력2025-02-0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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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대 이후 배우로 활동하는 ‘시니어 배우’

    • 화물차 기사, 간호사, 임대업자 등 출신 다양

    • 연기 위해 4시간 거리, 새벽 촬영도 가리지 않아

    • “꿈 있다면 주저하지 말길”

    [Gettyimage]

    [Gettyimage]

    혼잡한 학원 외부와 달리 사뭇 긴장감이 맴도는 좁은 강의실. 희끗희끗한 머리, 혹은 새치 염색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를 한 40~60대 수강생들이 둘러앉았다. 투박한 손 아래로 보이는 큼지막한 글씨의 대본 속에 형형색색의 형광펜 밑줄과 메모가 가득했다.

    수업을 시작하자 수강생들은 익숙한 듯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준비한 독백 연기를 선보였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지만 막상 선생님 앞에 서니 입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어색한 두 손을 어찌할 줄 몰라 배에 뒀다가, 팔짱도 끼다가 하다 보면 대사는 이미 시원하게 꼬이고 만다. 아쉬움에 멋쩍은 웃음과 함께 시선을 떨구지만 선생님의 평가를 듣는 눈동자엔 총기가 서려 있다.

    40대 이후에 배우로 활동하는 이들을 ‘시니어 배우’라고 한다. 시니어 배우에 도전하는 이들 가운데엔 젊은 시절 연예계에 종사했던 사람도 있지만, 평생 연기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 중역으로 지내다 은퇴 후 화물차 기사를 하는 수강생 신완식(58) 씨는 7개월째 연기학원에 다니고 있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학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진지하게 연기를 연습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수강생 김경옥(59) 씨는 간호사였다. “다른 인생을 살고 싶어서 지난날의 꿈이던 연기를 시작했다”고 수줍게 말하는 그의 미소가 싱그럽다.

    시간, 장소 가리지 않는 ‘열정’

    서울 구로구 구로동 MIT엔터테인먼트 연기학원의 시니어 배우반에서 한 수강생이 독백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임다솜]

    서울 구로구 구로동 MIT엔터테인먼트 연기학원의 시니어 배우반에서 한 수강생이 독백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임다솜]

    시니어 배우들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다. 2024년 8월 대학생 이승진(22) 씨는 공모전에 낼 영상 촬영차 단역으로 최영호(69) 씨를 섭외했다. 최 씨의 대사는 단 두 줄뿐이었다. 촬영 당일 이 씨는 분위기를 풀 겸 최 씨에게 “어디서 오셨냐”는 질문을 건넸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최 씨가 충남 서산에서 촬영지인 서울 성동구 뚝섬까지 무려 4시간을 운전해 올라온 것.

    연기 생활 1년 차인 최 씨는 충남 서산에서 건물 임대업을 하며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 연기 수업을 받는다. 경력은 짧지만 다른 배우들보다 더 빨리 성장해 여기저기서 캐스팅 연락을 받는다. 학생들이 만드는 단편영화라면 부산·강원 원주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에 응했다. 함께 돕고 성장한다는 마음으로 출연료는 사양했다. 그는 최근 소속사와 계약도 맺은 어엿한 배우다. 그의 매니지먼트 업무를 맡은 채희경 팔컴홀딩스 이사는 “최 씨는 항상 배움의 자세를 지닌 배우”라고 말했다.

    은퇴 후 연기를 시작한 지 10여 년이나 된 김지한(70) 씨는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의 단역 촬영을 마쳤다. 최종 편집본에 얼마나 나올진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촬영에 임했다. 드라마 특성상 뛰거나 도망가는 장면이 많아서 사전에 주변 배우들과 세밀히 합을 맞추며 매우 조심스럽게 연기했다.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다음 촬영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씨는 “연기자는 연기도 중요하지만 첫째로 체력이 돼야 한다”며 “나이가 나이인지라 건강에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최근 헬스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소속사 없이 개인으로 활동하는 김 씨는 직접 배우 공고를 찾아내 지원한다. 종종 새벽, 고요한 거실에 홀로 앉아서 눈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로 공고를 뒤진다. 그가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화면을 내리는 와중에 영화인들의 커뮤니티 ‘필름메이커스’에 올라온 배우 공고가 눈에 띄었다. 김 씨는 능숙한 솜씨로 휴대폰에 미리 준비해 둔 자신의 배우 프로필을 첨부해 지원 e메일을 보냈다.

    김 씨의 나이는 70대지만 50대나 60대를 찾는다는 공고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공고에 지원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 2시가 넘는다. 김 씨는 이토록 부지런하게 지원해서 10년간 300편 이상의 단편영화에 출연했다.

    주저함 없는 ‘추진력’

    2024년 9월 단편영화 ‘수레’ 촬영장에서 모니터 속 시니어 배우 이휘 씨가 김태경 감독에게 연기 지도를 받고 있다. [김태경]

    2024년 9월 단편영화 ‘수레’ 촬영장에서 모니터 속 시니어 배우 이휘 씨가 김태경 감독에게 연기 지도를 받고 있다. [김태경]

    이휘(예명·65) 씨는 연기를 시작한 후 단편영화 ‘수레’에서 ‘노인’ 역으로 첫 주연을 맡았다. 열대야가 이어지던 2024년 9월 새벽, 경기 고양시 덕양구 한 주택 위 밤하늘에는 환한 달 대신 둥근 촬영 조명이 우뚝 솟았다. 화장기 없이 메마른 얼굴을 한 이 씨와 그녀의 연기에 숨을 죽인 스태프들이 비좁은 반지하 방을 가득 채웠다. 방은 습하고 퀴퀴했으며 여름밤 불청객을 피하기 위한 모기향 냄새가 여기저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곳곳에 널린 장비와 스태프들로 정신없는 공간이었지만, “액션!” 소리가 울리자 이 씨의 연기가 방 안을 조용히 압도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스태프들은 이 씨가 답답한 공기에 힘들어할까 봐 그의 옆에 조르르 앉아서 부채질을 해줬다.

    2024년 9월 단편영화 ‘수레’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시니어 배우 이휘 씨가 촬영장 한편에 앉아 쉬고 있다. [김태경]

    2024년 9월 단편영화 ‘수레’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시니어 배우 이휘 씨가 촬영장 한편에 앉아 쉬고 있다. [김태경]

    ‌영화 촬영은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6시 반까지 이어졌다. 스태프들은 길어지는 촬영에 연로한 이 씨의 컨디션을 걱정했지만, 이 씨는 “앞으로는 주연만 하고 싶을 것 싶다”는 말로 촬영장 분위기를 환하게 바꿨다. 주로 단역을 맡아온 이 씨에게 주인공 역할이 주는 책임감은 오히려 소중한 선물과도 같았다.

    이 씨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나이에 무슨 연기를 하느냐’ 생각하며 시작했던 배우 생활이 어느덧 1년이나 됐다. 건강이 안 좋아 누워 있어야만 했던 과거와 달리 배우가 된 지금, 이 씨는 봄볕같이 화사한 미소가 깃든 연기로 카메라 너머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한다.

    꿈을 이어가는 시니어 배우들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잊었던 꿈이 은연중에 떠오른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어요. 당장 내일 어떤 하루를 보낼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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