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혜
대통령의 체포와 구속으로 국가적 주요 과제는 공중에 붕 떴다.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저출생 문제를 관장하는 인구전략기획부(인구부) 신설은 유야무야됐고, 트럼프 2.0 시대에 대비한 국가적 그랜드 플랜은 보이지 않는다. 각종 개혁 작업은 좌초됐다.
권력의 무게 추는 거대 야당으로 쏠리지만 야당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답답한 마음은 마찬가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야당이 나서 경제와 외교,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보듬어야 하는데 그들은 ‘대권으로 가는 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하다.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 재판(2024년 11월 1심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선고)으로 초조했는지 야당은 헌법재판관 3인의 여야 합의 추천을 촉구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탄핵시키더니 ‘대행의 대행’도 압박한다. 말 안 들으면 ‘대행’마다 따박따박 탄핵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나마 ‘대행’이라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어주길 바라는 국민은 허탈하다. 탄핵안에서 ‘내란죄’를 철회하는 모습도 마뜩찮다. 윤 대통령의 ‘탄핵 시계’를 빨리 돌려야 이 대표가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결국 요즘 나오는 여론조사는 이러한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대표와 야당을 ‘처단’하려다가 오히려 미래 권력으로 키워준 윤 대통령이나 민생과 국가적 과제보다는 미래 권력을 좇는 이 대표와 거야(巨野)나…. 2025년 설날을 앞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다.
1932년
모순의 경성 거리
-신동아 1932년 9월호-
이 만평은 네발 달린 말이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수레에 얼음을 실어 옮기는 게 더 안정적으로 이동할 듯하지만 오히려 두 발의 인간이 두 바퀴가 달린 인력거를 끄는 게 더 안전하고 안락하다는 모순을 꼬집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주요 운송수단은 사람이 들고 지는 가마나 지게였다. 산과 계곡이 많은 지리적 특성도 있지만 수레가 달릴 도로도 부족했고, 기병 육성을 방해하려는 중국의 과다한 공납 요구로 수레를 끄는 말이 부족한 이유도 컸다.
19세기 말부터 도로가 정비되고 포장되면서 조선에도 사람이 끄는 수레인 인력거가 등장했다. 이 인력거는 19세기 중엽 일본에 파견된 미국 선교사가 고안한 이래 빠르게 보급되면서 한·중·일 3국의 대표 수송 수단이 됐다. 큰 밑천이 없어도 그날그날 일한 만큼 벌 수 있기에 도시 빈민들은 앞다퉈 인력거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도도 빠르고 운임도 저렴한 전차가 운행 구간을 점차 넓혀나가면서 이직하는 인력거꾼도 늘어갔다. 동시에 교통사고도 함께 늘었다.
‘동아일보’ 1928년 2월 2일자 석간 5면에 따르면, 전년(1927) 경기도내 교통사고는 모두 709건으로 이는 전년 대비 110건 증가한 수치다. 구체적으로는 △자동차 사고가 229건으로 가장 많았다. △전차(219건) △자전거(173건) △우마차(43건) △인력거(4건) △기타(32건) 순이었다. 신문은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월은 꽃피는 4월로 86건이고, 가장 적을 때는 정월(음력으로 한 해 첫째 달)”이라고 보도했다.
결국 인력거는 상대적으로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으로 인식됐다. 게다가 당시 경성의 고관대작들은 여전히 원하는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프라이빗’ 맞춤형 고급 교통수단으로 인력거를 애용했다. 1932년부터는 인력거 1대에 부과된 인력거세는 1원80전이었다. 1대에 10원 내는 승용마차세가 폐지되자 다시 인력거와 승용마차가 시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동아일보’ 1932년 2월 7일자 3면 문화). 마차가 늘어나자 폭이 좁은 다리가 많은 서울 청계천 주변에서는 전복·낙상 사고가 늘었다.
네발과 두 발 동물 세계의 알레고리로 인간의 탐욕과 선동, 무지의 모순을 콕 짚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1945년 출간) 보다 10여 년 앞선 만평이니 그 혜안이 놀랍다.
교통사고 통계를 보도한 ‘동아일보’ 1928년 2월 2일자 5면(왼쪽)과 인력거세 폐지를 다룬 1932년 2월 7일자 3면 보도.
‘동아일보’ 1932년 2월 20일자에 실린 ‘만주피난동포 위문품 4차 발송’ 장면. 당시 신문은 “의복 등 동아일보로 의탁된 위문품 2만여 점이 만주의 14곳의 조선인 피난민 수용소로 발송됐다”고 보도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사분오열된 중국 패잔병들은 재만주 조선인을 대상으로 약탈과 방화, 강간, 학살을 일삼았다. 조선인들은 마적단을 피해 길림성 장춘과 봉천 등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당시 국민들은 피난 동포를 위한 위문품을 ‘동아일보’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