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력산업, ‘아메리칸드림’ 찾아 대미 투자 대폭 확대
대미 반도체 투자 이유는 美 시장 확대 + 미국 내 생태계 구축
친환경차 세액공제 폐지 따른 전기차 판매 감소에 대비해야
첨단제조생산 세액공제 폐지 위기로 배터리 산업 사면초가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건설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우리 주력산업은 트럼프 2.0 시대의 개막에 앞서 대미 투자를 꾸준히 확대해 왔다. 2024년 말 기준 미국 백악관 자료를 기초로 우리나라의 투자 계획을 집계해 보면 931억 달러(약 135조 원)에 달한다. 2023년 우리나라의 설비투자액 231조 원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또한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분야에서 미국의 기여분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기업의 투자 점유율은 각각의 분야에서 32%, 44%로 압도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이는 막대한 대미 투자로 평가할 만하다. 우리 주력산업이 ‘아메리칸드림’을 향해 과감히 나선 셈이다.
트럼프의 귀환으로 우리의 ‘아메리칸드림’이 악몽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내 투자가 활발한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분야의 진출 현황을 산업별로 점검하고, 트럼프 2.0 시대가 야기할 주요 난관과 이에 대한 우리 기업의 준비 현황 및 대응 방안을 살펴보도록 하자.
트럼프 정부, 반도체법 이행 여부가 관건
반도체산업은 ‘반도체와 과학법(반도체법)’의 이행과 반도체 수출 통제 정책 향방이 트럼프 2.0 시대의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반도체법 이행 측면부터 살펴보면 미국은 동 법의 과감한 투자를 발판으로 세계 반도체산업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전미반도체산업협회(SIA)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2012~2022년 사이 월별 웨이퍼 처리량이 11% 증가에 그쳤으나 2022~2032년에는 203% 증가할 것으로 전망돼 어떤 국가보다도 생산 여력 확충 속도가 빠를 것으로 점쳐진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가짐은 다른 법이다. 이미 투자가 이뤄지는 마당에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의 보조금 정책이 불필요했다고 평가하면서 관세와 감세 정책만으로도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파하고 있다. 다행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조금 최종 계약을 체결하며 한숨을 돌렸으나,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정부효율부(DOGE)를 일론 머스크와 함께 이끌 비벡 라마스와미는 반도체법에 따른 낭비적 보조금을 감사관이 재검토하도록 요청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굳이 감사를 하지 않고 그냥 돈을 쓰지 않는 방법도 취할 수 있다. 일반적 상황에서 예산법률주의를 따르는 미국 대통령이 의회가 지출 승인한 것을 일방적으로 거부하기가 어렵다. 과거에 이를 무시한 대통령이 간혹 존재했지만 1974년 ‘의회예산 및 지출거부 통제법’ 제정 후 이러한 일방적 ‘무시’가 더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그의 첫 번째 임기 때 의회에서 통과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금 지급 의무를 무시한 전력이 있다. 이는 결국 그의 탄핵소추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를 낳았다.
탄핵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면,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일방적 무시보다는 법적 절차에 따라 특정 예산에 대한 철회(rescission)를 요청할 수 있다. 반도체법 제정 때와는 다르게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출발을 함께할 미 의회에서 공화당이 양원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러한 절차 활용에 도전해봄 직하다. 반도체법을 둘러싼 반도체 보조금과 R&D 예산에 대한 먹구름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 미국 투자에 대한 근본 목적을 되새기고 미국 팹의 차별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반도체법 제정 전, 삼성전자가 2021년 5월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미국 신규 투자 계획을 밝힐 때 미국 투자 확대의 궁극적 목적은 보조금을 통한 원가절감이 아니라 미국 시장 접근성 확대와 미국 생태계 활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고객사 확보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반도체 제작을 시험해 미래의 엔비디아가 될 또 하나의 동반자를 육성하는 전진기지로 대미 투자를 활용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기반, 반도체 차별화 전략 필요
차별화도 매우 중요하다. 차별화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재생에너지 기반이다. 대만 반도체회사 TSMC가 위치한 애리조나에 비해 삼성전자가 택한 텍사스는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하다. 미국에너지관리청(EIA)에 따르면 2024년 12월 기준 텍사스의 재생에너지 발전용량은 71GW에 달하지만, 애리조나는 11GW 정도로 7배가량 차이가 난다.
또한 삼성전자 테일러 팹 반경 100㎞에는 대략 10GW의 재생에너지 발전용량 확대가 기대되는 반면 TSMC 애리조나 팹 반경 100㎞에는 3.5GW 정도의 재생에너지 발전용량 확대가 예정돼 있다. 재생에너지 측면에서 텍사스의 유리한 환경은 경쟁사뿐 아니라 삼성전자의 국내 사업장에 대한 차별화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차별화의 두 번째 요소로 생태계를 꼽을 수 있다. 국가적 컨소시움 형태로 추진되는 국가반도체기술센터(National Semiconductor Technology Center)를 비롯한 반도체 R&D 정책이 위축되더라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 ‘텍사스 반도체법’과 같은 주 단위 정책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애리조나나 국내 사업장과는 차별화되는 연구 생태계를 조성해 이를 TSMC와 펼칠 파운드리 생태계 전쟁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미국 최상위권 공대 중 하나를 보유한 퍼듀대 등 현지 연구기관과 반도체 연구개발 협력을 추진하고 있으며, 웨이퍼 제조기업인 SK실트론, 유리기판을 제조하는 앱솔릭스(SKC 자회사)와 미국에 동반 진출해 독자적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수출 통제 역시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중국에 대한 강경한 반도체 수출통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트럼프의 기조를 생각해 보면 바이든 행정부의 수출 통제에서도 더 나아간 조치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앞으로 중국과의 거리두기를 강하게 요구할 때 우리는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수출 통제를 도약의 발판을 삼았던 사례로부터 역사의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2015년 2월 오바마 행정부가 시행한 중국에 대한 슈퍼컴퓨터 수출 통제는 중국의 반도체 설계 자립화를 앞당겼는데 이때 중국에 손을 내밀어준 기업이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반도체 기업인 AMD다. AMD는 현재의 위상과는 다르게 2015년 2월만 해도 시가총액이 24억 달러에 불과해 현재의 80분의 1 수준이었으며, 파산설까지 불거지기도 했다. 위기 일로의 AMD는 중국에 기술을 제공하고, 중국은 3억 달러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며 양측은 윈-윈 관계를 형성했다. AMD가 젠 아키텍처의 성공적 출시로 재부상하기 전까지 중국이 AMD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준 셈이었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에서 가한 2022년 10월부터의 대중국 광역 반도체 수출 통제는 중국의 반도체 제조 자립화를 촉진하면서 반도체 장비 기업인 ASML, TEL, Applied Materials의 대중국 매출 확대를 견인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중국은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반도체 수출 통제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AI 반도체 설계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할 것이다. AI 반도체용 메모리와 파운드리 저변을 확대해야 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러한 기회를 활용해 중국을 다음 10년을 견인할 새로운 형태의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테스트베드로 삼을 수 있다. 즉 미국의 진영 논리에 매몰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친환경차 세액공제 폐지, 유연한 대처로 위기 극복
미국 앨라배마주에 건설된 현대자동차 공장의 생산라인. [Gettyimage]
현대차그룹은 2024년 10월 메타플랜트 가동을 시작으로 미국 시장에서 성과를 이어가고자 하고 있다. 이에 맞춰 미국 소비자용 친환경차 세액공제 대상 차종이 40개에서 25개로 줄어든 반면 현대차그룹은 오히려 5개 차종을 신규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했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소비자용 친환경차 세액공제 없이도 상업용 자동차를 중심으로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 10% 수준을 기록하며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런데 이제 소비자용 전기차 세액공제 혜택까지 받으며 미국 시장 내 성장세를 이어갈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IRA 내 친환경차 세액공제 폐지는 미국 시장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는 우리 자동차산업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IRA의 세액공제액은 최대 7500달러에 달하는데 소비자용 친환경차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 승용차는 5만5000달러, SUV 등은 8만 달러의 가격 제한을 충족해야 한다. 가격 제한선에 맞추어 전기차 공급이 이뤄진다고 가정했을 때 7500달러의 보조금이 사라진다면 소비자가 체감하는 자동차 가격은 10~16%가량 오르는 셈이다.
연구 결과마다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가격이 1% 오르면 수요량은 2% 감소한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세액공제가 폐지됐을 때 전기차 수요가 20~32% 감소하는 결과로 연결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과 미국산 전기자동차 구매를 분석한 보고서(NBER Working Paper)에 따르면, 세액공제가 폐기되면 미국 전기차 판매량이 26.8% 감소할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동 연구는 테슬라를 비롯한 미국 기업의 전기차 판매량이 37.1%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해 세액공제 폐지에 따른 피해가 미국 기업에 집중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학계 전망과 별개로 일론 머스크는 세액공제 폐지에 찬성 의사를 밝혔으며, 트럼프 행정부가 예산 감축을 위해 두 눈을 부릅뜨는 상황이니 친환경차 세액공제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다만 트럼프 2.0 시대가 자동차산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전기차는 아직 현대차그룹의 미국 내 자동차 판매량의 10%도 되지 않는다. 또한 트럼프의 내연기관 규제 완화 움직임까지 고려해 보면 세액공제 폐기가 현대차그룹의 미국 내 매출 전체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
일각에서 미국의 보편관세 부과의 주된 피해 업종을 자동차로 점치지만, 현대차그룹이 대미 투자를 확대하고 적절한 시기에 미국 내 공장이 가동돼 관세 부과로 인한 피해를 우회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특히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기차 전용 공장에서 하이브리드 차도 생산하는 등 유연성을 발휘하고 있어 트럼프 2.0 시대의 부정적 효과를 최대한 상쇄하고 있다.
배터리 세액공제 폐지 대비 공급망 관리 해야
바이든 시대에서 전기차 보급과 함께 미국 내 배터리 수요 역시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이에 대응해 한국의 배터리 기업을 중심으로 미국 내 배터리 공급 능력도 빠르게 확충되고 있다.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는 대체로 합작 투자 형태로 진행된다. 예컨대 LG에너지솔루션은 GM·혼다·현대차그룹, SK온은 포드·현대차그룹, 삼성 SDI는 스텔란티스·GM과 각각 합작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참고로 2025년 1월 9일 기준 친환경차 세액공제 대상 브랜드는 테슬라를 제외한 대부분이 모두 위에서 언급한 우리 기업의 합작투자 대상 기업들의 서브 브랜드에 해당한다.
소비자용 친환경차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 까다로운 자동차 부품 및 핵심 광물 조달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배터리 3사가 배터리부터 전기차에 이르는 공급망을 강화함으로써 미국 경제 안보에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기업의 기여와는 별개로 미국 내 배터리 사업 여건은 친환경차 세액공제와 첨단제조생산 세액공제(AMPC·Advanced Manufacturing Production Credit) 폐지 위기로 인해 사면초가에 놓여 있다. 특히 AMPC 부분을 살펴보면 2024년 기준 리튬이온 배터리 셀 가격이 kWh당 78달러 정도로 추정되는데, AMPC의 배터리 셀에 대한 보조금만 kWh당 35달러에 달한다. 따라서 동일한 생산량을 가정할 경우, AMPC 철폐 시 배터리 셀 공급가격이 45% 이상 상승할 수 있다. 이외에도 배터리 모듈($10/kWh), 소재, 핵심 광물 등 공급망 전반에 대한 보조금까지 고려하면 AMPC 폐기의 배터리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보조금이 미국 내 과도한 생산비용을 보전해 왔으나, AMPC가 사라지면 배터리 셀 제조사는 다른 방법으로 생산비용을 절감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정과 소재 일부를 해외로부터 조달받는 등의 방법을 모색할 수 있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보편관세 등을 도입해 배터리 공급망 전반에 관세를 부과한다면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다양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배터리 셀 제조사의 공급망 관리 역량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AMPC 폐기와 같은 움직임이 현실화하지 않도록 미국 정부를 설득하고, 이를 대체할 주정부의 지원책 마련을 유도하는 등 기업의 대미 대관 기능 역시 우리 정부와 연계해 강화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기업의 독보적 투자 실적이 지역 일자리 및 부가가치 창출을 이끌어 보조금 이상의 혜택이 미국 경제에 돌아가고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배터리 저장 분야에 대한 미국 진출이 본격적으로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우리의 배터리 3사도 이에 맞추어 리튬인산철 배터리 개발을 통해 해당 분야에 대한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아울러 장기적으로는 미국 내 공장을 수출기지로 활용해 미주 시장 전역으로 공급처를 다변화함으로써, 트럼프의 숙원 사업인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해소에도 기여할 필요가 있다.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된 SK 배터리 공장. [Gettyimage]
미국 배터리 저장 분야 능동적 개척해야
중국 배터리 산업에 대한 미국의 견제 의지는 우리 배터리 기업의 미국 시장 선점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IRA 내 중국산 품목 조달에 대한 제한 조치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301조 관세를 7.5%에서 25%로 상향했다. 또한 미 국방부는 2025년 1월 CATL을 중국 군산업체 목록에 편입해 CATL의 국방부에 대한 조달 제한에 나선 바 있다. 2024년 11월에는 Gotion과 CATL의 주요 소재 공급사들이 ‘위구르 강제노동 방지법’에 따른 ‘우려거래자 목록’에 등재돼 해당 기업들의 제품이 미국 시장에 반입되는 것이 금지됐다. 이러한 기회를 모멘텀 삼아 우리 배터리 3사는 대규모 투자를 발판으로 미국 배터리 시장을 선점 및 사수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트럼프는 어제의 발언과 오늘의 발언이 다르며, 서로 모순되는 주장을 동시에 쏟아내기도 한다. 이처럼 극심한 불확실성이 던질 도전 과제들은 기업의 유연한 대응 능력을 시험하며, 옥석 가리기를 불러올 것이다. 트럼프라는 폭풍이 지나간 뒤, 이 옥석 가리기가 우리 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지위를 굳건히 하는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