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호

‘패권’ 앞세우면 시장경제 무너지고, 패권도 사라진다

[‘돈’으로 본 세계사] 고대를 좌우한 두 질서 ‘시장경제’와 ‘패권’

  • 강승준 서울과기대 부총장(경제학 박사)·前 한국은행 감사

    입력2025-02-0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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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토와 노예’ 확보 위한 정복 전쟁 활발

    • 시장경제 원활한 작동 위해 ‘문자’ 고안

    • 오리엔트 문명과 유럽 문명 부딪친 페르시아 전쟁

    • 영토 확장해야 유지되는 패권 질서, 지속가능성 없어

    • 고대 제국, 자급자족 ‘장원’ 경제로 쪼그라들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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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古代)란 인류 문명이 시작된 때부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이전 시기를 말한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예노동이 경제의 근본을 이루던 시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문명과 국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문명은 처음 유목민들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즉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유목민들이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진흙 덕분에 곡물 수확량이 다른 땅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데 있다. 이른바 ‘농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농업혁명 덕분에 생산한 식량 총량이 늘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생활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농업혁명이 인구 폭발과 방자한 엘리트 계층인 지배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때부터 토지에 묶였다. 수렵채집인은 강력한 라이벌에게 몰리면 거주 장소를 옮기면 그만이었지만, 농경인은 그들의 토지와 곡물창고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했다. 그래서 수렵채집인 못지않게 어쩌면 더 폭력적이었다. 도시, 왕국, 국가 등 이전보다 큰 사회적 틀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폭력은 통제받게 되었다.”

    고대 시장경제 질서의 중심, 문자와 화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도 이러한 인간의 폭력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농업혁명이 국가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국가를 만들었다는 토머스 홉스의 주장과 일치한다.

    기원전 5000~4000년 사이에 나일강 유역에는 인구 수만 명의 도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 도시는 모두 그 주변의 수많은 촌락을 지배했다. 기원전 3000년경에는 나일강 유역 전체가 통합되면서 최초의 이집트 왕국이 생겨나 수십만 명의 백성을 다스렸다. 기원전 19세기부터 메소포타미아에 거대 제국이 등장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은 수백만 명의 백성을 다스렸고,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렸다. 2세기 로마제국 최전성기에는 최다 1억 명의 백성에게 세금을 걷고, 그 수입으로 50만 명의 상비군과 지금도 쓰이고 있는 도로망을 만들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질서 세 가지가 기원전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와 관련한 화폐 질서였고, 두 번째가 정치적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필자는 보편적 종교 질서가 본격 시작된 것은 예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한 1세기부터라고 본다. 그렇다면 고대 내내 작동했던 보편적 질서는 화폐와 교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 질서’와 전쟁과 통치 권력에 기반한 ‘패권 질서’다. 전자가 소프트웨어(S/W)적 통합이라면 후자는 하드웨어(H/W)적 통합이다. 고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질서가 어떻게 서로 융합하고 또 대립하면서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고대에 시장경제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자. 시장경제 질서의 중심에는 문자와 화폐가 있었다. 문자와 화폐는 기원전 3000여 년경 수메르 왕국에서 생겨났다. 수메르 왕국(BC 5000~2000)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번성기를 이끈 국가다. 기독교의 ‘믿음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기 전 살던 곳이다.

    최초의 문자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건에 대한 채권·채무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개발됐다. 쉽게 말해 ‘외상 장부’ 표지(標識)였다. 농업혁명으로 생산력이 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인간은 물물교환을 시작했다. 당장 남의 물건을 얻어야 하는데 교환할 물건이 없는 경우 외상거래를 하면서 물표(物標)라고 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물건을 표시하는 흙 조각을 만들고 여기에 수량을 나타내는 쐐기 모양의 표지를 그려 보관했다. 이것이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다. 문자는 이렇게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화폐는 문자보다 조금 늦게 등장했다. 물물교환이 일상화하자 그 편의성 제고를 위해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화폐다. 당연히 곡물, 옷감과 같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생필품, 즉 상품이 화폐로 사용됐다. 최초의 화폐는 ‘보리 화폐’였다. 이후 상품화폐는 휴대나 보관이 간편한 금속화폐에 그 바통을 넘겨줬고, 기원전 7세기 아나톨리아반도의 리디아에서 국가가 공인한 금속화폐인 ‘주화’가 탄생한다.(신동아 2024년 12월호 ‘군주에게 핍박받던 ‘화폐’, 금융위기 일으키는 폭군 되다’ 참조)

    문자와 화폐가 등장하자 교역을 기반으로 한 시장경제 질서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교역이 늘어나자 교역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이 생겼고, 리디아 왕국에는 상설 점포까지 생겼다. 한 국가 내에서의 상업과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시장경제 질서가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국가 간의 무역도 시작됐다. 하지만 국가 밖에서 국가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 질서가 작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가 간의 신뢰는 너무 약했고 굳건하지도 않았으며 불안정했다. 국가 간 약속이나 협약이 제대로 이루어지거나 지켜질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역은 최소한의 필요에 그쳤다. 시장경제 질서 속에서 같이 성장하느냐, 강력한 군대에 기반을 둔 패권 질서를 강화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당시 모든 국가의 고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무역으로 번영한 대표적 나라가 페니키아였다. 페니키아는 고대 가나안을 근거로 고대 해양 문명을 창시한 도시국가의 연합체로 기원전 11세기경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페니키아는 자색을 의미하는 그리스 말로, 페니키아인이 값비싼 자색 옷을 입은 데서 유래했다. 해적질이 일반적이던 그 시대에 무역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페니키아는 최초로 노와 돛을 함께 사용하는 갤리선을 만들어 사용했고, 무역을 위해 발음대로 표기하는 표음문자 알파벳을 개발했다. 카르타고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소금을 팔아 금과 주석을 얻기 위해 지중해를 넘어 대서양 해안까지 진출했다. 오랫동안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페니키아는 동방의 패권국들에 의해 멸망한다.

    영토 전쟁과 제국의 등장

    고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대부분 정복 전쟁이 등장한다. 사진은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한 장면. [동아DB]

    고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대부분 정복 전쟁이 등장한다. 사진은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한 장면. [동아DB]

    그러면 고대 패권 질서는 어떻게 형성되고 변동했을까. 고대의 패권 질서는 정복(영토) 전쟁과 제국의 등장으로 설명된다. 작은 공동체들은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나중에는 외부의 침략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큰 공동체에 흡수됐다. 작은 나라는 왕국이 되고 더 커져 제국이 됐다. 클수록 모든 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에 정복 전쟁을 통해 계속 몸집을 키워나갔다. 고대사는 ‘정복 전쟁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정복 전쟁의 목적은 고대 경제를 운영하는 데 가장 필수 요소인 영토와 노예 확보였다. 고대의 특징이 정복 전쟁이라는 것은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화 ‘트로이’ ‘300’ ‘알렉산더’ ‘클레오파트라’ 등 고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대부분에 정복 전쟁이 등장한다.

    정복 전쟁의 결과물인 제국은 문명이 시작된 비옥한 초승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등장했다. 중동의 강력한 제국은 아시리아를 제외하고는 기껏해야 200년 정도 존속했다. 그만큼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정복 전쟁이 치열했다.

    고대 중동의 패권 다툼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19세기 고대 바빌로니아가 등장한다. 고대 바빌로니아는 유프라테스강 서쪽 아라비아 지역에서 온 아모르인이 세운 나라다. 고대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7세기 히타이트에 의해 망한다. 히타이트는 아나톨리아반도에서 일어난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국가로 철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국가다.

    아시리아 제국(BC 2450~605)은 무려 1500년 이상 세계사에 등장하는 국가다. 티그리스강 상류에서 시작한 국가로 강대국이 등장하면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기회가 찾아오면 중동의 주인이 된 오랜 강대국이었다. 유대 왕국의 북쪽에 있던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성경에 나오는 ‘앗수르’가 바로 아시리아다.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이집트까지 대제국을 형성한 신아시리아(BC 911~605)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멸망한다.

    신바빌로니아(BC 626~539)는 바빌론을 근거로 아시리아 남쪽에 세워진 국가다. 성경에 ‘바빌론의 유수’와 ‘바벨탑 이야기’에 등장하는 유대 왕국을 멸망시킨 나라가 바로 신바빌로니아다. 신바빌로니아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에 멸망한다. 페르시아는 메디아 왕국이 강성해지면서 생겨난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국가로 오늘날 이란의 선조다.

    페르시아 최초의 왕조는 아케메네스 왕조(BC 550~330)다. 기원전 6세기에 3대 국왕인 다리우스 1세가 오리엔트 지역을 통일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전국에 총독을 배치하고 지방행정 체계를 정비했으며, 중동에 ‘왕의 길’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도로를 건설했다.

    중동 지역을 석권한 페르시아는 패권을 유럽에까지 확장하려고 했다. 당시 그리스를 장악하면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공격해 많은 영토를 차지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에 패하고 몇 년 후 세상을 떠난다. 기원전 480년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선왕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그리스를 침공한다. 그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해 그리스 대부분 지역을 차지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그리스 연합군에 패한다. 영화 ‘300’ 시리즈는 그리스가 강력한 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의 땅을 지켰는지 잘 보여준다. 살라미스 해전은 칼레 해전, 한산대첩, 트라팔가르 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힌다. 페르시아 전쟁은 오리엔트 문명과 유럽 문명,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부딪친 최초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고대의 정복 전쟁 = 현대의 벤처 투자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에 도미노가 돼 돌아왔다. 전쟁 후 그리스에 군사주의가 팽배해졌다. 기원전 431년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싸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고 최종적으로 스파르타가 승리를 거둔다.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자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폴리스에 등장하지만, 기원전 338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는 남부의 군인들과 손잡고 그리스를 통일한다. 통일 후 필리포스 2세는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왕위를 계승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즉위하자 오리엔트 정복 전쟁에 착수했다. 유럽이 동방의 제국을 침략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이 정복 전쟁으로 유럽과 중동에 걸친 대제국이 세워졌고,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는 인도까지 전파된다. 알렉산더가 병으로 죽자 그의 제국은 분열됐다. 하지만 보편적 인류를 지향하는 헬레니즘 사상과 세계주의는 역사에 길이 남아 후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고대 제국의 대표 격인 로마제국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는 그리스 덕분에 동방의 위협에서 벗어나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로마가 도시국가의 동맹에서 지중해의 패권 국가로 올라선 계기가 된 사건이 기원전 3세기부터 100년에 걸쳐 ‘카르타고’와 격돌한 포에니 전쟁이다. 카르타고는 명장 한니발과 그의 코끼리 부대로 우리에게 익숙한 무역 중심 국가였다.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지중해 패권을 차지했고, 정복 전쟁을 계속하면서 제국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귀족들로부터 투자받아 강력한 군대를 키운 후 정복 전쟁을 성공시켜 로마제국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동아DB]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귀족들로부터 투자받아 강력한 군대를 키운 후 정복 전쟁을 성공시켜 로마제국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동아DB]

    ‌정복 전쟁으로 영토가 확장되고 이로 인해 막대한 이익이 생기자 로마 귀족들은 앞다퉈 군대에 투자했다. 정복 전쟁은 오늘날의 벤처 투자와 같았다. 전쟁을 통해 가장 중요한 부(富)인 토지와 노예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전쟁 비즈니스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귀족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강력한 군대를 키운 후 정복 전쟁을 차례로 성공시켰다. 부자들은 경쟁하듯 카이사르에게 투자했고 카이사르의 군대는 점점 더 강해졌다.

    카이사르가 민중의 영웅으로 부상하자 원로원은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했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결단을 내린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원로원 세력을 제압하고 권력을 차지하지만 오래지 않아 원로원 귀족들에게 암살당한다. 카이사르는 황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를 칭하는 ‘카이저’ ‘차르’가 카이사르에서 나왔을 정도로 황제라는 칭호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하고 로마 제정이 시작된다. 그는 카이사르와는 달리 원로원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었고, 원로원은 이에 화답해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선사한다. 그 후 로마는 정복 전쟁을 계속 벌여 2세기 오현제 시대를 거치며 최대의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 된다.

    최고의 전성시대는 내리막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하다. 로마는 이후 끊임없이 로마 영토로 밀고 들어오는 게르만족으로 인해 내리막을 걷게 된다. 로마 경제의 핵심은 정복 전쟁으로 인한 토지와 노예의 획득이었는데, 게르만의 남하로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 시리즈는 바로 이때 로마의 혼란상을 그린 영화다.



    영화 ‘글래디에이터2’에서 검투사 루시우스(폴 메스컬·왼쪽)와 장군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가 콜로세움에서 결투를 벌이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글래디에이터2’에서 검투사 루시우스(폴 메스컬·왼쪽)와 장군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가 콜로세움에서 결투를 벌이고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로마의 영토 확장이 멈추면서 로마의 성장도 멈춘다. 콜로세움의 검투사 경기는 경제 둔화로 인한 시민의 불만을 달래주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었다. 로마는 군인 황제의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혼란에 빠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혼란을 수습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로마는 다시 번영을 누리는 듯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결국 476년 게르만 용병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한다. 이로써 고대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새로운 시대인 중세가 시작됐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화폐와 시장경제는 무너졌고, 경제는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의 시대로 돌아갔다.

    고대의 국가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영토 확장에 집착했을까. 끊임없는 영토 정복 전쟁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운영하려고 했을까. 적당한 크기의 왕국들이 전쟁을 피하고 시장경제 질서를 발전시키면서 무역을 통해 서로 상생하는 구조로 갈 수는 없었을까. 왜 전쟁을 기반으로 한 패권을 앞세운 무력 질서가 시장경제 질서를 압도했을까.

    우리는 고대의 특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패권 또는 무력 질서가 고대라는 시대 특성에 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첫 번째 이유는 토지라는 자산에 있다. 고대에도 상업과 제조업이 있었지만 미미했고,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었다. 농업에서 생산요소는 토지와 노동력이다. 하지만 토지와 노예는 그 특성상 무역을 통해 얻기가 쉽지 않다. 특히 외국의 토지를 획득하는 방법은 전쟁뿐이었다. 전쟁이 다른 나라의 토지와 노예를 획득하는 하나의 경제 행위였던 것이다. 금은(金銀)이 국부의 근간이 되는 중상주의 이전까지 이러한 전쟁 패턴은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근세에 들어 중상주의가 대두하고 부의 형태가 금은을 포함해 다양화하면서 전쟁의 성격도 조금씩 달라졌다. ‘영토 확장’이라는 고대 전쟁의 의미는 퇴색하고, 전쟁의 목적도 다양해졌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왕위 계승을 위해, 나라를 위해 등 적어도 전쟁을 일으키는 거룩한 명분이 있었다. 물론 속셈을 들여다보면 모두 ‘돈과 권력을 위한 전쟁’이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말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토지라는 자산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넘어가자. 시대가 바뀌면서 자산은 토지에서 금은, 화폐, 생산물, 유가증권 등으로 다양해졌다. 하지만 토지는 예나 지금이나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고대와 중세는 물론 근대에 들어와서도 토지를 가진 자들은 사회의 최상류층인 귀족층이었다. 영국의 곡물법 논쟁에서 보듯 19세기 초까지도 자본가계급은 지주계급을 이길 수 없었다. 토지는 공장, 기계 등의 자본과도 구별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다. 전쟁을 통해 빼앗거나, 매입하지 않으면 공급이 늘지 않는다. 공급이 한정적인, 가장 비탄력적 생산요소인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토지로부터 얻는 수익을 지대(rent)라 하고, 공급이 비탄력적인 생산요소로부터 얻는 보수를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라고 한다. 토지는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완벽하게 경제적 지대를 실현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자산이다.

    공급이 가장 비탄력적인 생산요소, 토지

    고대에 끊임없이 정복 전쟁이 일어난 두 번째 이유는 한 국가를 넘어서 국가 간 신뢰를 형성하기 어려운 당시의 시대 상황에 있었다. 국가 간 신뢰가 부족했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라고 거의 신뢰가 부재(不在)했다고 봐야 한다. 그 시대는 이웃 나라가 갑자기 강력한 군대를 동원해 쳐들어오면 모든 것을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승자독식 시대였다. 그러니 한 나라가 군대를 양성하면 상대 국가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상대방한테 당하기 전에 먼저 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패권 질서가 시장경제 질서보다 우선시되는 사회였다. 페니키아가 추구했던 해상무역 국가의 꿈이 제국의 패권 질서에 의해 무너진 것이 어쩌면 그 시절에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왜 패권 질서가 시장경제 질서에 우선하는지를 아래 표와 같이 게임이론(game theory)의 ‘죄수의 딜레마’ 모형을 적용해 설명해 보자.

    ‌괄호 속 숫자는 원래 A국과 B국의 국력을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질서의 선택에 따라 양국의 국력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B국의 선택별로 A국의 최선책을 살펴보자. B국이 패권 질서를 선택한다면, A국도 패권 질서를 선택해야 한다. 시장경제 질서를 선택하면 A국은 B국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그럼 B국이 시장경제 질서를 선택하면, A국은 무엇을 선택할까. 이때도 A국은 패권 질서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면 A국은 B국을 침략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A와 B를 바꾸어도 결론은 똑같다. 결론적으로 각 국가 입장에서 패권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 우월한 전략이 되고, 두 나라가 모두 패권 질서를 선택하는 것에서 우월전략균형이 이루어진다. 표가 보여주듯 양국 모두 시장경제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 패권 질서를 선택하는 것보다 수익이 더 크지만, 현실에서는 모두 패권 질서를 선택하고 정복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왜 철학과 민주주의의 나라 아테네가 결국 스파르타처럼 군사 국가가 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 최강의 패권 국가였던 서로마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고대 시대는 어떻게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종말을 고한 것일까. 거대했던 제국이 어떻게 성(城)과 장원 단위의 작은 공동체로 산산조각이 났을까.

    표면상으로 게르만의 침략이 로마 패망의 직접 원인이었다. 좀 더 격조 있게 설명하자면 영토 확장의 중단으로 경제성장이 멈춰 제국의 기반이 약해진 상황에서 일어난 게르만의 침략이 제국에 치명적 타격을 준 것이다. 이미 내적으로 약해질 때로 약해진 제국이 외부의 작은 충격에 우르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시장경제 붕괴되자 로마도 무너져

    로마가 내적으로 약해진 것은 화폐와 시장에 대한 신뢰, 즉 시장경제 질서가 무너진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로마 황제들은 영토 확장의 중단으로 경제가 침체하자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데나리우스 은화에 동을 섞어 화폐를 타락시켰다. 시민들이 화폐를 받으려 하지 않자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는 제국의 경제를 점점 수렁에 빠뜨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들여다보면 로마의 패망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 남의 국가를 침략하면서 영토를 확장해야 경제가 유지되는 패권 질서는 지속가능성이 없었다. 전 세계가 하나의 제국이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드웨어적으로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보다는 소프트웨어적으로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 더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앞의 국가별 이익 표의 오른쪽 아래 경우처럼 모든 국가가 시장경제 질서를 유지한다면 전쟁 없이 두 나라가 각자 비교우위에 있는 상품을 생산해 소비하고 잉여물을 무역으로 교환한다면 양국의 이익은 최대가 된다. 영국의 경제학자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전쟁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체제와 국제질서를 잘 조직하면 영구적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아예 정복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각 국가의 상비군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마제국 몰락 이후 계속 번영을 누린 동로마제국도 사산조 페르시아, 이슬람제국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마지막에는 콘스탄티노플만을 가진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한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패권 질서에 의존한 제국의 한계였다.

    서로마제국이 몰락하고 화폐 질서가 무너지자 유럽은 물물교환 시대로 돌아갔다. 평민들은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스스로 농노가 돼 군사력을 가진 영주들에게 의탁하는 봉건제도가 성행했다. 자연스럽게 경제는 쪼그라들어 성(城)과 장원을 근거로 한 자급자족 형태의 장원 경제가 만들어졌다. 거대한 제국이 성과 장원의 공동체 단위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시장경제 질서를 정착시키고 확산시키지 못한 것이 로마제국의 책임만은 아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그 시대에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현대와 같이 전 세계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국가 간의 신뢰가 상당 수준 확보돼야 가능한 일이다. 무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 질서가 전쟁과 토지에 기반을 둔 패권 질서에 압도당하면서 제대로 꽃피지 못하고 질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대에는 시장경제 질서와 패권 질서가 균형 있게 성장하지 못했다. 시장경제 질서가 패권 질서에 내내 끌려다니거나 압도당하다가 시장경제 질서가 무너져 내리자 잇달아 패권 질서도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와 함께 고대도 막을 내렸다. 인류 앞에 세속 권력이 작은 공동체 단위로 분산되고 신(神)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중세(中世)가 도래한 것이다.

    강승준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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