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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 ‘남부인의 聖戰’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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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옥한 토지와 풍성한 농작물, 경제번영 위에 꽃핀 세련된 문화. 미국 남부의 이런 배경 속에서 ‘스칼렛 오하라’가 탄생했다. 남부인은 다르다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치러낸 남북전쟁. 그것은 미국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시험은 가혹했고 상처는 깊었다.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멀리서 본 섬터 요새

크리스마스 다음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부터 대서양 해안을 따라 달리는 국도 17번을 타고 찰스턴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겨울인데도 햇살이 화사하고 따뜻하다.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머틀 비치를 지나자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변 나무숲 너머 하늘은 한층 더 푸른 느낌을 준다. 남부인 것이다. 남부의 하늘은 언제 보아도 맑고 푸르다. 그렇지만 우리 가을 하늘처럼 공활하고 드높다기보다는 낮게 드리운 궁륭(穹?·아치) 같은 느낌을 준다. 하늘이 대지와 더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남부에서 하늘은 대지의 지붕이 아니다. 오히려 대지가 하늘의 마루인 것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상징하는 작달만한 종려나무가 눈에 많이 띄는 듯하더니 차는 어느새 쿠퍼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철제 다리를 지난다. 왼편으로 항구가 내려다보이고 ‘성스러운 도시(Holy City)’라는 별칭답게 여기저기 산재한 교회당의 첨탑과 함께 단아한 고도(古都) 찰스턴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부사회의 특이성은 근본적으로 도시중심의 북부 문명과 다른 ‘전원 문명’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재건시대에 북부의 선도에 따라 산업화하면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기반으로 한 남부의 전통적인 문화는 대부분 멸실되고 말았다. 찰스턴은 남부 본래의 전원 문명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고도다.

찰스턴은 1670년 당시 국왕 찰스 2세의 이름을 따서 영국의 식민자들이 개척한 도시다. 쿠퍼 강과 애쉴리 강 사이에 대서양을 향해 혓바닥처럼 내민 지형 위에 식민자들은 아담한 도시를 건설하고 바다 건너 종주국의 화려한 궁정 문화를 앞서서 도입했다. 그리하여 버지니아나 뉴잉글랜드에 비해 늦게 출발했지만, 신대륙이 자치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영국 왕실의 직할 식민지로 개편된 18세기 초엽부터 찰스턴은 남부의 새로운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의 경제력이었다.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찰스턴의 식민자들은 일찍부터 사이프러스 나무가 무성하던 인근의 늪지를 개간해 쌀농사를 짓고 값비싼 염료를 추출할 수 있는 인디고 나무를 재배했다. 농사는 물론 흑인 노예들의 몫이었다.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벼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있는 노예들의 도움이 컸다. 노예의 수요가 많았던 탓에 찰스턴은 뉴올리언스, 미시시피의 내처즈와 함께 남부에서 가장 큰 노예시장이 서던 곳이기도 하다.

식민자들은 이렇게 거둔 농산물을 모두 영국으로 수출해 재산을 모았다. 이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대서양 너머의 세련된 유럽문명을 도입하는 데 썼다. 식민자들은 희랍식 주랑과 층마다 ‘피아짜(piazza)’라고 부른 넓은 베란다를 갖춘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맨션을 바닷가에 지었다. 이들은 식민지 최초의 극장 ‘Doc Street Theatre’를 세우고(1736),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하고(1743), 또한 식민지 최초의 미술관을 지었다(1773).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이처럼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던 찰스턴의 귀족들은 그래서 자긍심 또한 남달랐다. 그들은 북부는 물론 여타 남부 사회에 대해서도 굽히기를 거부했다. 이 자존심이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정치사에서 찰스턴을 제퍼슨, 메디슨 그리고 먼로 대통령에 이르는 남부 공화파를 낳은 버지니아를 제치고 이른바 남부주의의 중심에 서게 만든 것이다. 조지아 주 플랜테이션 농장주의 딸 스칼렛 오하라의 드높은 콧대를 꺾고 그녀와 결혼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드 버틀러가 찰스턴 출신임은 우연이 아니다.

남부의 자긍심 찰스턴

남북전쟁의 도화선,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 요새

옛 귀족들이 살던 찰스턴 거리.

남부 자긍심의 상징이던 찰스턴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남북전쟁 때다. 링컨이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인 1860년 12월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의회는 찰스턴에서 특별회의를 소집해 만장일치로 연방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남부 분리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북부가 도피노예송환법(Fugitive Slave Law)을 준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反)노예제 운동을 방치하고, 게다가 북부 여러 주가 일치단결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헌법이 보장하는 주(州)의 독자적 권익을 지킬 수 없게 됐다는 것이 탈퇴의 주요 이유였다. 남북전쟁의 불씨는 노예제 문제였지만, 분쟁의 핵심에는 이처럼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권력배분이라는 건국 초부터 논란거리였던 해묵은 문제가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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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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