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제의 천자산.
장사(長沙)에서 마오쩌둥의 생가가 있는 사오산(韶山)으로 간다. 장사에서 약 150km, 버스로 약 2시간 거리다. 장사 일대를 하루에 모두 돌아볼 심산으로 택시를 빌렸다. 하루에 500위안, 우리 돈으로 6만원가량이다. 한국 사람이 마오쩌둥 생가를, 그것도 택시까지 대절해 간다고 하자 쩡(曾)씨 성의 기사는 신이 났다. 대부분의 후난성 사람들에게 마오쩌둥은 숭배의 대상이다. 택시기사 또한 마오교(敎)의 열렬한 신도다. 택시는 온통 마오쩌뚱으로 도배되어 있다. 마오쩌둥 사진에서부터 흉상까지 운전석 주위로 5개나 붙어 있다.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그는 돌아오는 길에 마오의 사진이 박힌 장신구를 하나 더 사서 차 안에 걸었다.
오는 9월이면 마오쩌둥이 죽은 지 30년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의 심장인 톈안먼 광장에 누워 있고, 중국인의 가슴에 살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인간 세계를 넘어 신이 되어간다. “마오 주석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중국인들, 가게나 집 한가운데 마오 사진을 걸어두는 중국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회 계층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특히 농민들에게 마오는 재물과 평화, 안녕을 가져다주는 신이다.
중국인 중에서도 운전기사들, 특히 남쪽 지방의 운전기사들이 마오쩌둥 사진을 부적처럼 차 안에 붙이고 다닌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그러니까 1992년 마오쩌둥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 중국에서는 마오가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최초로, 그리고 대규모로 마오쩌둥 신드롬이 일어난다. 그해 광둥 지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버스 교통사고가 났고, 큰 사고여서 버스에 탄 사람들이 모두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독 한 사람만 멀쩡했는데, 그가 마오쩌둥 사진을 사들고 차에 탄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때부터 마오는 교통사고를 막아주는 수호신이 되었고, 마오 사진은 부적처럼 여겨졌다.
중국인이 이처럼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것을 외국인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외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특히 문화대혁명 때 고난을 당한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중국인이 우매한 탓으로 진단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중 누가 나은지를 물으면 대다수 중국인은 이렇게 답한다.
“마오쩌둥은 중국인을 일어서게 했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잘살게 해주었다.”
아편전쟁 후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100년 동안 시달린 치욕의 역사를 끝내고 중국을 다시 일어서게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고, 문화대혁명 때 잘못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 공로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1일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이 이제 일어섰다!”
마오의 이 말에 중국인은 감격했다. 근대 100년 동안 겪은 굴욕과 설움이 씻겨 내려가는 기쁨을 맛본 것이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여느 사회주의 지도자나 정당과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중국인에게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단순한 사회주의 이념의 실천자가 아니라 민족해방을 가져다준 지도자이자 정당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인에게 영원히 살아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