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북한·파키스탄, 원심분리기와 탄도미사일 기술 맞교환 내막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4-02-27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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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과 파키스탄이 탄도미사일 기술과 핵기술을 서로 맞바꿨다. 밀거래의 중심인물은 파키스탄 핵과학자 압둘 칸. 그는 적어도 13번 북한을 드나들면서 결과적으로 한반도 핵 위기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핵과 미사일 기술 맞교환은 어떻게 이뤄졌나.
    북한·파키스탄, 원심분리기와 탄도미사일 기술 맞교환 내막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을 주도한 압둘 칸

    국제정치의 본질을 ‘힘(power)’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학자들은 국제정치를 ‘힘을 위한 투쟁’으로 규정한다. 그들에게 힘은 국제정치를 풀이하는 주요 분석단위다. ‘힘이 있느냐’ ‘힘의 균형이 이뤄져 있느냐’로 국제정치의 함수를 푼다. 국제정치학계의 대가 한스 모건소에 따르면, 인간이나 국가는 힘을 추구하며 국제사회는 ‘힘의 균형’ 아래 평화를 유지한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만들어진 핵무기는 고전적인 힘의 균형을 깨뜨리는 파괴력을 지녔기에 국제정치의 균형은 곧 ‘공포의 균형’이 됐다.

    최근 파키스탄의 한 과학자에 의해 이슬람 지역과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을 맞추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키스탄 핵실험 성공(1998년)의 주역 압둘 카디스 칸 박사가 북한·이란·리비아·이라크에 핵기술을 이전한 데 따른 파문이 바로 그것이다. 조지 테닛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 2월5일 워싱턴의 조지타운대에서 한 연설에서 “(CIA의) 정보 수집활동을 통해 파키스탄 압둘 칸 박사가 핵기술을 유출해온 루트를 탐지해냈다. 우리는 북한·이란·리비아와 같은 나라에 핵기술을 제공해온, 4대륙에 걸친 비밀 네트워크를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의 비밀공장에서 만들어진 핵 부품들이 리비아로 운송됐다는 것. 말레이시아 ‘스코미 정밀엔지니어링’이란 회사가 파키스탄 압둘 칸 박사로부터 반제품 상태의 핵 부품 제조를 주문받았고, 그 가운데 14개를 2002년 12월부터 2003년 8월 사이에 아랍에미리트연방 두바이에 있는 스리랑카인 소유의 한 중간상을 통해 리비아로 보냈다는 의혹이다. 문제의 회사는 압둘라 바다위 총리의 외아들 카말루딘 압둘라가 최대 주주인 스코미그룹의 자회사. 사태가 불거지자 말레이시아 정부 당국은 총리의 아들이 핵 부품 판매 자체를 모른다고 주장했다.

    미 CIA는 몇 해 전부터 압둘 칸을 ‘문제인물’로 꼽고 있었다. 2001년 3월 압둘 칸이 자신이 1976년에 세운 ‘카후타연구소(칸연구소)’에서 물러난 것도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핵기술 이전 사실은 2003년 이란과 리비아로부터 그 전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리비아는 유엔 경제제재에서 벗어나려고 팬암기 폭파사건(1988년)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대량살상무기 개발 포기를 결정하면서 영미 정보기관에 파키스탄의 핵기술 지원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지난해 11월 압둘 칸을 비롯해 관련 과학자들의 명단을 파키스탄 정부에 통보했다.

    지금껏 드러난 혐의내용을 보면 압둘 칸은 1990년대 초부터 이란, 리비아, 북한에 우라늄 농축 기술과 원심분리기 도면, 부품 등을 제공해왔다. 그는 이들 3국 실무자들과 콸라 룸푸르, 카사블랑카, 이스탄불, 모로코 등지에서 만나 관련 부품을 건넸고 기술자문 역할을 맡아왔다.



    미국 언론들은 압둘 칸이 핵기술 암거래 조직을 꾸려가면서 수백만 달러의 현금을 챙겼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키스탄 국익에 기여하기 위해 그렇게 해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슬람권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한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이자 이슬람권의 영웅인 그는 핵기술 유출 파문에 대해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다.

    “핵 보유국이 늘어나게 되면 서방국가들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곧 무슬림의 대의(大義)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무슬림의 대의’란 곧 반미, 반서방 저항의식에 바탕을 둔 범이슬람 민족주의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비호 아래 1970년 무렵부터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다. 따라서 압둘 칸은 ‘이슬람 핵무기=이슬람권의 힘’이라는 정치군사적 등식을 믿은 것 같다.

    조지 테닛 미 중앙정보국 국장도 지적했듯 압둘 칸의 커넥션은 북한과 리비아, 이란의 핵개발 일정을 여러 해 단축시켜줬다. “그렇다면 이슬람 국가가 아닌 북한엔 왜?”라는 질문에 압둘 칸은 “그 부분은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굳이 입을 연다면 대답은 “국가이익을 위해서”일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그 부분도 역시 ‘무슬림의 대의’를 위해서다. 이슬람 국가 가운데 최초로 핵을 보유한 파키스탄이 힌두교 국가인 인도와 군사적 균형을 맞추려면 핵무기를 실어 나를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파키스탄이 핵개발 핵심기술 중 하나인 원심분리기 도면과 부품을 북한에 건네주고 미사일 기술과 맞바꾼 속사정은 곧 국익과 관련된다.

    북한은 미사일 개발기술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 통한다. 북한은 사(射)거리가 1700∼2200㎞로 추정되는 대포동1호(1998년 8월 시험발사) 외에도 사거리 500∼600㎞인 스커드C, 사거리 1000∼1500㎞인 노동1호를 보유하고 있다. 1993년 5월말 시험 발사된 노동1호는 시험 발사 후 1년 반 만에 실전 배치됐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미사일은 단거리인 스커드B, C와 중거리인 노동미사일 등을 중심으로 1000여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압둘 칸 박사는 1990년대 초 핵무기 개발뿐 아니라 중거리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했다.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현 핵보유 국가 가운데 가장 늦게 ‘핵클럽’에 가입한 파키스탄으로선 당면한 국가적 과제였다. 핵실험에 성공했다 해도 이를 운반할 중장거리 미사일이 없다면, 말 그대로 ‘핵 효과(nuclear effect)’를 기대하기 어렵다. 라이벌 국가인 인도의 주요도시들을 사정권 아래 두기 위해선 적어도 사거리 1000km 이상의 미사일을 지닌 북한의 선진기술 도입이 절실했다. 인도와의 군비경쟁에 마음이 급해진 파키스탄 군부는 압둘 칸을 내세워 북한과 교환거래를 추진했다. 파키스탄 군부 대표단도 은밀하게 북한을 방문해 친선을 다졌다.

    압둘 칸이 처음 북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1년. 그후 적어도 13번은 북한에 다녀온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과 파키스탄의 거래는 1994년 12월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본격화됐다. 미-북한 사이의 ‘제네바 기본합의(Geneva Agreed Framework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해마다 50만t의 중유를 공급하고 이와 더불어 한국, 일본, 미국 3개국이 북한에 두 개의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한 합의)’가 있은 지 2개월 뒤였다.

    그후 압둘 칸이 이끄는 대표단이 평양을 다시 방문했고 1997년 12월엔 제항기르 카라마트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파키스탄이 사거리 1500km인 가우리(Ghauri)1호의 실험발사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98년 4월이다. 미 정보당국은 가우리 1호의 경우 압둘 칸이 북한에서 10∼12개의 부품 견본을 얻어와 조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파키스탄은 핵실험에 성공, 온 나라가 축제의 열기에 휩싸였다(1998년 5월15일 인도가 먼저 핵실험에 성공했고 파키스탄은 이에 질세라 5월28일 핵실험에 성공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잇따른 핵실험은 ‘세계평화’란 명분 아래 핵무기를 독과점하려는 기존 핵클럽 국가들, 특히 미국의 분노를 샀다. 미국은 즉시 파키스탄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했다.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2001년 여름과 2002년 7월 평양공항에서 미사일 부품이 파키스탄 화물기에 실리는 장면이 미 첩보위성에 잡히기도 했다. 이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을 정점으로 한 파키스탄 군사정권이 9·11 테러 뒤 미국이 대아프간 정책 필요상 파키스탄에게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뒤로도 북한과 거래했음을 보여준다.

    인도 위협하는 파키스탄 미사일

    미사일 기술과의 맞교환으로 압둘 칸은 북한에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 가운데 핵심인 원심분리기 부품과 설계도를 건네줬다. 그리고 북한 핵과학자들의 기술자문역을 맡아왔다. 원심분리기는 핵폭탄에 쓰일 우라늄을 농축하는 핵심적인 장치다.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에게 털어놓은 ‘핵폭탄 제조계획’이란 영변 원자로의 플루토늄 재처리 방식이 아닌, 압둘 칸에게서 얻은 원심분리기술을 이용한 농축우라늄 핵폭탄을 가리킨다.

    압둘 칸의 북한 커넥션은 가우리1호가 성공한 지 꼭 1년 만인 1999년 4월 사거리 2000∼2700km인 가우리2호 미사일 시험발사로 다시 빛을 보았다. 파키스탄은 가우리2호의 시험발사 당시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했다”고 발표했지만 미사일 전문가들은 북한 미사일 노동1호의 복제품 또는 개량형으로 본다. 가우리2호가 발사된 다음날 파키스탄은 또 다른 미사일 ‘샤힌(Shaheen)’을 발사했는데 이것 또한 북한 미사일 기술을 따른 것이었다. 가우리1, 2호가 발사될 때 북한 미사일 기술자들이 파키스탄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파키스탄은 1999년 9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가우리3호 엔진 시험가동도 성공리에 마쳤다. 최대 사거리가 3000km인 가우리3호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캘커타를 비롯한 인도의 주요도시들은 파키스탄의 미사일 사정권 안에 들게 됐다.

    북한·파키스탄, 원심분리기와 탄도미사일 기술 맞교환 내막

    파키스탄은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전수받아 1998년 4월 사거리 1500km의 가우리1호 실험발사에 성공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그동안 핵개발뿐만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 개발 분야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다. 한쪽이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다른 한쪽에서 그에 질세라 미사일 발사실험을 벌이곤 했다. 인도가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프리트비(Prithvi)와 아그니(Agni) 미사일을 발사하자 파키스탄은 가우리 1∼3호로 응수했다.

    파키스탄의 원자력위원회 소속 과학자들은 사거리 1500∼1800km인 미사일 샤힌 개발에도 성공했다. 가우리3호가 성공했을 무렵부터 2001년 봄 현역에서 물러날 때까지 압둘 칸은 파키스탄 대기권연구소와 손잡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2002년 초 아프간 취재 차 파키스탄에 들렀다가 만성적인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인 카슈미르를 가본 적이 있다.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주도(州都)인 무자파라바드 입구에 들어서자, 인도 쪽을 향해 거대한 미사일이 세워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실물이 아닌 모형이었다. 현지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가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후 기념물로 이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북한 미사일 모형이다. 우리 한반도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카슈미르의 거리에 북한이 볼거리를 하나 더한 셈이다.

    제네바 기본합의 위반한 북한

    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1990년대 중반부터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온 것으로 추정한다. 황장엽(80) 전 북한노동당 비서도 최근 일본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1996년부터 우라늄 핵개발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도쿄신문’에 실린 황씨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북한의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은 전병호 당시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1996년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협정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그는 당시 국제담당비서였던 나에게 러시아 등으로부터 플루토늄을 살 수 있겠느냐면서, 핵폭탄을 ‘조금 더’ 만들어두고 싶다고 말했다. 핵무기 보유 사실을 인정하면서 핵무기를 더 만들기 위해 플루토늄을 수입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혔다. 전 비서는 그 뒤 파키스탄에 1개월 정도 출장갔으며, 귀국 뒤 ‘앞으로 플루토늄은 필요없다.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됐다’고 통보해왔다.”

    일반적으로 핵무기 1기를 만드는 데 드는 농축우라늄은 15㎏. 그만한 양의 농축우라늄을 분리해내기 위해선 100개 가량의 원심분리기를 설치해놓고 적어도 5년은 작동을 해야 한다.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미 첩보위성에 잘 탐지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시설은 대규모 공간이 필요없을 뿐 아니라 원자로와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가동할 경우 발생하는 열도 없어 미 정찰위성의 감시를 비껴갈 수 있는 것. 2002년 10월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며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를 놀라게 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우라늄 농축 외에 핵무기를 제조하는 또 다른 방법이 플루토늄 재처리다. 이 방법은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원료물질을 짧은 시간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반면 원자로 가동, 폐연료봉 재처리시설 가동 등을 거치는 과정에서 미 첩보위성의 감시를 피하기 어렵다. 핵무기 1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은 약 5kg. 따라서 보유해온 폐연료봉 8000개(약 50t)를 처리하면 북한은 25kg의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그럴 경우 북한은 이론적으론 5개의 핵무기를 지니게 된다. 앞서 황장엽씨가 전병호 비서에게서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이미 1992년 플루토늄 재처리 과정을 거쳐 적어도 1개의 핵무기를 만들어놓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2004년 현재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나라는 모두 187개국이다. 북한,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쿠바 등 5개국이 미가입 국가다(북한은 NPT 가입국이었다가 지난해 1월10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개발한다면 2010년까지 45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으로 분석한다. 북한의 핵개발 논리는 자위력 강화다. 미국의 공격 위협에 맞서 강력한 핵 억지력을 확보한다는 것이 북한이 한결같이 내세워온 핵개발 논리. 북한 당국은 핵을 가짐으로써 군사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고, 아울러 미국으로부터 체제안전보장을 다짐받는 수단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한편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온 것에 초점을 맞춰, 북한의 핵개발은 자위력보다는 대외협상력 강화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자위력이냐, 협상력이냐의 논란을 떠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북한이 압둘 칸을 중심으로 한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을 통해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에 나섬으로써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를 위반했다는 점이다. 그 문서엔 “(1992년 남북한이 함께 발표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일관성 있게 이행한다”고 돼 있다. 즉 플루토늄 재처리 방식에 따른 핵폭탄 개발뿐 아니라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도 추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는 “재처리 시설은 물론 우라늄 농축시설도 보유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가 배후

    결과적으로 한반도 핵 위기를 높이는 데 한몫 거든 파키스탄 핵과학자 압둘 칸은 올해 69세다. 카라치대학을 마친 뒤 서독과 벨기에에서 공부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네덜란드의 위렌코사에서 일하며 농축우라늄 기술을 습득했다. 1976년 귀국 후엔 카후타연구소를 세워 파키스탄의 국책과제인 핵무기 개발에 몰두해왔다. 그는 1983년 네덜란드 법원에서 핵기술 절취혐의로 기소돼 궐석재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기도 했다. 군사 쿠데타 등 정치불안으로 정권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핵개발 프로젝트는 압둘 칸의 지도력 아래 이어졌고 1998년 파키스탄은 마침내 핵클럽 멤버임을 선언했다. 그는 파키스탄 국민에겐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천재성과 영화배우 존 웨인의 애국심을 갖춘’ 인물로 비춰진다.

    그렇다면 북한-파키스탄 커넥션의 중심인물 압둘 칸 뒤에는 누가 있었을까.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ISI)다. 군부의 입김이 센 파키스탄 역대정권의 권력구조로 미뤄보아, 한 민간인(압둘 칸)이 핵무기 확산이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파키스탄 정보부와 군부 실세들의 합의 아래 이뤄진 국책사업을 압둘 칸이 앞장서 이끌어오다가 사건이 터진 것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한마디로 파키스탄 국익 차원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다. 북한에선 미사일 개발 기술을, 리비아나 이란으로부터는 파키스탄의 재정적 숨통을 터줄 경제적 도움을 받으려 했을 것이다. 여기에 압둘 칸 개인의 이슬람 민족주의 성향이 명분으로 덧칠됐다고 보여진다.

    파문의 수습과정을 보면 잘 짜여진 각본이 떠오른다. 압둘 칸 박사를 내세워 자국의 핵기술을 전파했던 파키스탄 군부가 그를 문책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다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의 ‘국가적 공로’를 내세워 사면조치한다. 아프간전쟁에서 파키스탄 군부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미국은 파키스탄 실권자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의 사면조치를 이해한다며 파키스탄 ‘내정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국가이익이 법을 결정한다

    파키스탄 핵기술이 그동안 미국이 ‘불량국가’로 꼽아온 국가들에 흘러들어간 데 대해 미국은 “어디까지나 칸 개인의 소행”이라는 파키스탄 쪽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부시 대통령은 한술 더 떠 “페르베즈 장군이 (칸 개인이 관련된) 핵확산 국제조직망을 잘라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현행 미국법은 핵확산 방지를 어기는 국가에 대해 경제제재를 포함한 법적 제재(sanctions)를 가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국가(파키스탄 정부)가 아닌 칸 개인의 사적인 조직이 저지른 일이라 제재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9·11 테러로 아프간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파키스탄의 협력이 절실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부시의 말은 달랐을 것이다. “국가이익이 법을 결정한다”는 진리가 또다시 확인된 사건이다.

    1970년 발효된 핵확산금지조약 규정에 따라 핵개발을 감시해온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국제암거래 시장에 대한 조사에 나설 채비다. 이는 파키스탄의 행위 자체를 덮으려는 부시 행정부의 입장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미국의 소형핵무기 개발에 비판적인 IAEA는 부시 행정부와도 불편한 관계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IAEA의 조사가 북한 핵개발의 비밀을 푸는 데나 한반도 비핵화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이란 점이다. 그것이 IAEA의 한계라면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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