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시베리아는 열강의 각축장…노무현 정부는 시베리아로 눈을 돌려라

미국은 유전개발, 중국은 인해전술, 일본은 150억달러 투자

  • 글: 윤성학 러시아 IMEMO 연구소 연구위원 yoonskh@chol.com

    입력2004-02-27 18: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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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베리아는 개발의 여지가 풍부한 자원의 보고로 역사적으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 러시아, 미국, 중국, 일본이 시베리아 에너지 확보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치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중심국가론을 표방했음에도 뒷짐만 지고 있다.
    • 시베리아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각국의 자원쟁탈전과 한국에 필요한 ‘시베리아 전략’을 알아본다(편집자).
    시베리아는 열강의 각축장…노무현 정부는 시베리아로  눈을 돌려라
    2003 년 10월25일. 러시아 TV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시베리아발 긴급 속보를 내보냈다. 러시아 최대 재벌이자 ‘석유 황제’인 유코스(Yukos)사 회장 미하일 호도로코프스키가 러시아의 국가정보원 격인 연방보안국(FSB)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중무장한 연방보안국원들에 의해 모스크바로 압송되는 호도로코프스키의 창백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러시아와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러시아 증시의 주가는 폭락했고 거래 중단사태로 치달았다. 러시아 야당 인사들은 푸틴의 권력 남용에 항의했다. 러시아인에 대한 러시아당국의 사법권 행사에 대해 이례적으로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가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세계 언론들은 호도로코프스키의 구속을 권력투쟁으로 분석했다. 강력한 러시아를 정치적 모토로 내건 푸틴 대통령은 이미 정치에 개입해온 러시아 재벌(올리가르키)들을 숙청해왔다. 옐친 재선의 일등공신이던 베레조프스키와 구신스키는 자신의 기업을 빼앗기고 유럽으로 망명했다. 또한 러시아 세무경찰은 부가가치세를 탈루한 혐의로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루크오일’을 압수 수색하고 알렉페로프 회장에 대해선 형사고발을 검토하고 있다. 세계 최대 니켈회사 ‘노릴스크니켈’의 포타닌 회장도 사유화 과정에서 탈세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으며, 영국 프로축구 첼시 구단을 인수해 유명해진 러시아 재계 순위 2위 로만 아브라모비츠도 감사원의 내사를 받고 있다.

    전세계 언론들은 호도로코프스키의 구속을 ‘올리가르키 길들이기’의 최종판으로 보고 있다. 호도로코프스키는 그동안 러시아 재벌을 통제하려는 푸틴에 반발하여 진보색채 야당인 야블로코당과 우파연합(SPS)에 재정지원을 약속하였는데, 이 두 정당은 공산당과 함께 푸틴이 지지하는 ‘러시아 단일연합’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호도로코프스키는 또한 러시아의 전경련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기업연맹(RSPP)’을 통해 “권력기관의 전횡과 기업가들에 대한 위협을 중단해줄 것”을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호도로코프스키의 구속 사태는 일단 푸틴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러시아 여론조사에 따르면 호도로코프스키 구속 이후 푸틴에 대한 지지도는 9%나 상승한 82%를 기록했다. 폭락했던 증시도 반등하기 시작했고 무디스사도 러시아 국가 신용에 이상이 없음을 공식 선언했다.



    러시아 석유재벌 구속의 진짜 이유

    그러나 호도로코프스키 구속 사태가 단순히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유럽으로 추방된 베레조프스키나 구신스키와 비교했을 때 호도로코프스키는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푸틴 정부에 대한 비난도 온건한 편이었다는 것. 모스크바 출신의 이 유대인 대금업자는 개인적으로 겁이 많고 막후의 음모가 역할에 익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푸틴의 정치적 적수로 부상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호도로코프스키는 80억달러의 재산을 가진 러시아 최대 재벌이다. 당연히 ‘러시아 재벌치고 탈세하지 않는 재벌은 없는데 왜 유독 호도로코프스키만 혹독하게 당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구속 시기도 이상하다. 러시아는 올해 총선, 내년 3월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을 갖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서 본다면 호도로코프스키 구속은 푸틴에게 큰 악재다. 증시는 폭락하였고 외국인 투자가들은 러시아에서 발을 빼려 하고 있다. 푸틴에 겁을 먹은 러시아 재벌들은 자국에 투자하기보다 외국 축구단이나 인수하면서 해외로 자금을 빼돌리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소로스 등과 러시아 야당 세력들은 푸틴의 독재를 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고 호도로코프스키는 푸틴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의 대중성과 세력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러시아 국민은 누구도 호도로코프스키를 차기 대권주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러시아 인민의 재산을 강탈한 ‘반지트 캐피털리스트(강도 자본주의자)’라 비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푸틴은 그를 구속시켜야 할 또 다른 이유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호도로코프스키는 구속될 무렵 세계 석유 메이저의 지도를 바꿀 수 있는 두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호도로코프스키가 이끄는 유코스는 러시아 다섯 번째 규모의 석유회사인 시브네프티와 합병을 추진하고 있었다. 330억달러의 현금과 주식 교환을 통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석유 메이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던 것.

    1991년 소련연방 붕괴와 사유화 과정에서 러시아의 석유회사들은 끓임없는 인수 합병과 수직적 통합(vertical integration)으로 덩치를 키워왔다. 특히 1993년부터 시작된 사유화 과정에서 은행과 마피아, 정치권이 개입하여 러시아의 가장 가치 있는 자산(석유, 가스)을 놓고 일대 격돌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루크오일, 유코스, 시브네프티 등 러시아 석유 메이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2003년 들어 러시아 석유회사들은 탐욕스러운 서구 석유 메이저의 사냥감이 되었다. 서구 석유 메이저들은 생산 능력, 잠재적 채굴 가능성을 감안할 때 러시아 석유회사들의 주가가 저평가되었다고 분석하고 러시아 석유회사를 매입하기 위해 거액을 투자했다. 영국의 BP(British Petroleum)는 2003년 지분 25%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석유회사 시단코와 TNK인터내셔널 그룹 계열의 두 석유회사를 합쳐 약 67억달러를 투자하였다. BP가 투자해서 새로 탄생할 석유회사는 하루 120만배럴을 생산함으로써 러시아 내에선 유코스와 루크오일에 이어 세 번째 규모를 자랑한다.

    이 같은 서구 석유 메이저의 러시아 석유회사 사냥에 푸틴 정부는 상당히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당한 기업 투자에 대해 제동을 걸자니 부활하는 러시아 경제에 치명타가 될 것 같고 그대로 내버려두자니 러시아 석유산업이 서구 메이저 손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BP의 러시아 석유회사 인수를 막지 못했던 푸틴 정부는 미국의 석유 메이저 엑손 모빌마저 호도로코프스키를 통해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를 만들고 이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사실 엑손 모빌은 호도로코프스키를 배후 조종하면서 유코스 주식 매입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엑손 모빌의 경우 새로이 합병되는 회사를 인수하면 세계 1, 2위를 다투는 BP를 제치고 단숨에 세계 석유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호도로코프스키가 러시아계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푸틴과 러시아 행정부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호도로코프스키, 아브라모비치, 베레조프스키, 구신스키, 프리드만 등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세기적 약탈로 알려진 러시아 사유화 과정에서 대기업들을 서로 사고 팔아 기업 가치를 올리면서 벼락부자가 되었고, 정치까지 넘보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치에서 반유태주의는 뿌리깊다. 러시아 유대인들이 미국과 결탁하여 러시아의 자산을 팔아넘기려 하기 때문에 파산시켜야 한다는 극우파 정치인의 주장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점들이 푸틴이 호도로코프스키를 구속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주요한 이유로 지목되고 있다. 특히 호도로코프스키의 주도로 자산 규모 330억달러의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가 미국계인 엑손 모빌에 넘어간다면 국제 석유시장에서 러시아의 입지는 매우 좁아진다.

    이와 관련, 미국의 반응이 흥미롭다. 체첸이나 러시아의 인권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미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국무부 대변인을 통해 “러시아에서 기업인들에게 가해지는 일련의 조치가 경제의 건전성과 투명한 발전을 저해할 것이며, 외국계 기업인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항의했던 것이다.

    일본-중국의 박터지는 석유전쟁

    호도로코프스키가 구속될 무렵, 유코스는 채굴권을 갖고 있는 바이칼 호수 옆 시베리아 앙가르스크(Angarsk)의 원유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연결하는 대규모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앙가르스크 원유는 중국과 일본이 국력을 걸고 시베리아에서 벌이고 있는 ‘거대한 게임(Great Game)’의 사냥감이다. 앙가르스크 원유의 채굴권을 가지고 있는 유코스는 개발 투자 이익을 조속히 환수하기 위해 중국으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 설치를 적극 추진했다. 일본으로의 파이프라인 설치에 찬성하는 러시아내 극동 정치권, 그리고 보다 긴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이 유리한 러시아 송유관 업체 트랜스네프트(Transneft)에게 유코스는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호도로코프스키가 구속되고 유코스의 경영권이 바뀌었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베리아는 열강의 각축장…노무현 정부는 시베리아로  눈을 돌려라

    2003년 10월25일 구속수감된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로코프스키 전 유코스사 회장.

    현재 일본과 중국은 시베리아 중남부 이르쿠츠크주 앙가르스크 지방에 묻혀 있는 약 4억t의 원유를 놓고 일대 격전을 치르고 있다. 일본은 1997년 11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개최된 러·일 정상회담에서 시베리아와 일본을 연결하는 석유-가스관 건설사업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사업을 북방 4개 섬 반환과 연결시킴으로써 러시아 정부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사업은 장기간 표류했다.

    199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세계 원자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중국은 앙가르스크 원유에도 욕심을 드러냈다. 2003년 5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과 앙가르스크 원유 개발과 파이프라인 설치에 공식 합의하였다. 양국을 대표하여 중국 국영 석유공사와 러시아 유코스는 ‘앙가르스크-다칭(大慶)’간 송유관을 통해 1500억달러의 원유를 매매하기로 하는 내용의 잠정합의서를 체결했다. 나아가 중국과 유코스는 유코스가 갖고 있는 시베리아 유전에 대해 합작 개발하기로 합의하였다.

    러시아와 중국이 앙가르스크 원유 개발에 합의했다는 뉴스는 일본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거의 전량을 중동산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북방 영토 반환문제에 묶여 러시아와의 관계를 소홀히 했다가는 21세기 자원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일본은 이후 앙가르스크 원유에 대해 풀베팅을 감행하였다. 고이즈미 총리가 러시아로 급히 날아가 푸틴을 설득하였다. 뒤이어 전임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해 ‘앙가르스크-다칭’ 노선의 재고를 요청했다.

    또한 가와구치 일본 외무장관이 ‘앙가르스크-나홋카’ 노선에 지역적 이익이 달려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세르게이 다르킨 러시아 연해주 주지사에게 일본 노선의 장점을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그 결과, 다르킨 러시아 연해주 주지사는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일본측 안인 ‘앙가르스크-나홋카’ 송유관 노선이 러시아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러시아 극동 정부를 등에 업은 일본은 나홋카 루트 송유관 건설에 소요되는 50억달러 중 1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고, 해안 원유 터미널 건설 및 정유시설 공사에도 자금을 대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시베리아 원유 생산 컨소시엄에 대한 관심도 표명하면서 이 지역에 향후 15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방침을 러시아 정부에 전달하였다.

    ‘앙가르스크-다칭’ 송유관 건설은 총연장 2400km에 25억달러, 앙가르스크-나홋카 송유관 건설은 총연장 3800km에 50억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양 송유관의 연간 원유 수송량은 ‘앙가르스크-다칭’ 송유관은 3000만배럴, 앙가르스크-나홋카 송유관은 5000만배럴로 예상된다.

    일본이 파격적 조건을 제시하고 나오자 푸틴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러시아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모스크바 등 일부 지역에 불과하며 시베리아의 경제성장률은 미미한 상태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일본이 약속한 대로 투자해준다면 러시아는 자기 돈은 거의 들이지 않고 자국의 석유를 개발하여 수출하고, 지역 민원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푸틴은 중국과의 합의를 의식하여 노골적으로 일본 노선을 지지하지는 않고 있지만 나홋카 루트 송유관을 통하면 원유 수출 대상국이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은 물론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는 중국에 보다 나은 투자 제안을 내놓으라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최근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푸틴 대통령은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을 만난 자리에서도 동부 시베리아 송유관 건설에 관하여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노선을 적극 지원했던 유코스의 호도로코프스키가 구속되고 경영권이 바뀌자 일본으로서는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앙가르스크의 원유가 최종적으로 어디로 가게 될지는 2004년 결정이 날 것이다. 문제는 이 지역의 원유가 매년 5000만t씩 공급된다고 했을 때 6~7년 가량이면 소진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결국 시베리아에선 앞으로도 제2, 제3의 앙가르스크 게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19세기 힘의 공백 상태에 놓인 광활한 중앙아시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영국이 거대한 게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치열한 공방 끝에 러시아가 이 지역을 차지했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세계의 강대국으로 도약하였다.

    냉전이 해체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21세기판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고 있다. 우선 중동을 능가하는 원유자원이 묻혀 있는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가 21세기판 ‘거대한 게임’의 현장으로 떠올랐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개입한 이유는 카스피해 원유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카스피해 지역 연고권을 주장하는 러시아를 일축하고 카스피해 유전을 서방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게임의 1라운드에서 승리하였다.

    이제 시베리아가 새로운 게임의 2라운드로 떠오르고 있다. 한때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러시아는 자본과 인구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금 러시아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앞마당인 시베리아로 강대국을 불러들이고 있다. 카스피해에서 자본과 실력 부족으로 주저앉은 러시아가 자신의 앞마당을 판돈으로 내놓은 셈이다.

    시베리아는 열강의 각축장…노무현 정부는 시베리아로  눈을 돌려라

    2003년 10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마친 뒤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이 게임에 초청 받았고 미국도 대박을 터뜨린 사할린 유전개발 성공에 고무되어 시베리아까지 넘보고 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러시아를 무력화시키면서 시베리아 자원개발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이미 미국은 자국의 다국적 석유 메이저 엑손 모빌의 사할린 가스전 개발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미국은 또한 유코스 등 러시아 최대 석유 메이저 인수 작업을 시도하면서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정부의 대러시아 정책에 발맞추어 미국 기업들도 다양한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사할린 가스를 북한에 공급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한국과 일본 등이 중심이 되는 동북아 에너지 협력체에 미국의 석유 메이저들이 참여를 모색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한국과 중국 등이 주도하는 동북아에너지협력체를 통해 지역주의가 강화되면 동북아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감소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지만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석유 메이저의 로비에 외교정책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 보수주의 단체들은 시베리아 개발을 단순한 경제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시베리아 자원을 장악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패권주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푸틴 정부는 이 같은 미국의 패권적인 대유라시아 전략에 대해 ‘강력한 러시아’라는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푸틴과 러시아 외무성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 국가 관계를 미국의 주도하에 재편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최근 푸틴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벨로루시 등을 묶는 관세동맹과 중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를 엮은 ‘상하이협력기구’에 신경을 쓰는 것도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패권주의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푸틴은 사회주의 실험과 경제 혼란으로 무너져내린 러시아의 재건을 위해 미국과의 협력적 관계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지도자다. 그는 오기와 자존심만으로 국제관계를 다루었다가는 국익이 손상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러시아는 현재 국가 부흥의 핵심인 경제 살리기를 위해 시베리아 자원개발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러시아 경제발전 모델은 제조업이나 정보통신 육성, 금융 허브의 구축 등이 아니라 자원개발과 동서양을 관통하는 물류에 있음을 푸틴은 일찍 깨달았다.

    결론적으로 시베리아 개발은 더이상 시기를 늦출 수 없는 현안이 되었다. 1991년 소련연방 해체 이후 시베리아는 소비에트 계획경제하에서 부여받았던 원료 공급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고아신세로 전락했다. 푸틴 정부 등장 이후 외국인 투자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유럽에 인접해 있는 모스크바 지역 등에 집중되는 바람에 지역적 불균형은 더욱 심각해진 상태이다. 이에 따라 인구편중, 사회간접자본의 노후화, 주민 소득수준의 불평등으로 연방정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높다.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영토이긴 하지만 이미 시베리아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약화되는 추세다. 예를 들어 극동 러시아의 경우, 일제 중고차 수입이 중단되면 교통 대란을 피할 수 없을 정도다. 또한 시베리아에 있는 중국인들이 어느 날 전부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시베리아는 곧장 원시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시장의 기능은 정지할 것이고 야채와 채소류의 공급도 중단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는 푸틴 정부는 지금 시베리아를 개발하지 않으면 향후 이 지역의 주도권을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앙가르스크 유전은 거대한 게임의 시작

    푸틴은 극동 시베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베리아 연방관구와 극동아카데미에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발전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채택된 ‘2010년 극동·시베리아 개발계획’에 따르면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러시아 정부는 2010년까지 총 4412억루블(142억달러)을 산업개발과 국제협력 촉진에 필요한 인프라와 투자환경 정비 및 사회정책 진흥에 투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필요한 투자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제시하지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 에너지부는 동시베리아 및 극동 러시아 원유가스전 개발에 향후 20년간 800억~900억달러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러시아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불러놓고 거대한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 이 게임에서 러시아는 공급자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소비자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원유 및 가스 수요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10년 중국은 4억t의 원유와 1000억㎥의 가스, 일본은 2억5000만t의 원유와 900억㎥의 가스, 한국은 1억5000만t의 원유와 400㎥의 가스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앙가르스크 유전은 거대한 게임의 시작에 불과하다. 향후 이르쿠츠크 ‘코빅타’ 가스전, 사하공화국의 야쿠츠크 가스전, 그리고 사할린 석유-가스전 개발, 시베리아 산림개발 등 러시아가 시베리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무궁무진하다. 러시아는 자원개발과 함께 시베리아 지역의 사회 간접자본을 향상시키기 위해 물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를 관통하는 TKR이 TSR(시베리아 횡단철도)과 연결되면 시베리아 지역 개발과 지방정부의 세수(稅收)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러시아는 예상하고 있다.

    이제 러시아에 시베리아는 과거 구소련에서처럼 단지 외교적, 군사적 차원의 지역은 아니다. 소련연방의 해체 이후 러시아는 발트해와 흑해의 주요 항구를 상실하면서 태평양을 끼고 있는 시베리아 극동지역의 물류 기능을 더욱 중요하게 느끼고 있다.

    미국 영토를 능가하는 1380만㎡의 시베리아에는 천연가스, 석유, 석탄, 금, 다이아몬드 등 자원이 무궁무진하게 묻혀 있지만 실제로 개발된 것은 20%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지역에선 탐사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러시아는 이 막대한 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자본과 인력의 부족을 겪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시베리아의 인구가 낮은 출생률과 높은 사망률, 그리고 유럽 지역으로의 이주로 인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인구학자들은 머지 않아 시베리아 인구가 현재의 3100만명에서 1000만명 이하로 감소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시베리아의 경제침체와 혹한지역에 적용되던 정부의 특별수당 폐지로 시베리아의 인구는 약 100만명 이상 감소했다. 특히 극동지역 인구는 무려 10%나 감소했다. 극동과 동시베리아 지역의 인구 감소는 서시베리아 대도시보다 더욱 심각하다. 극동지역의 인구는 750만5000명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러시아 정부로 하여금 시베리아 경제개발을 늦추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틈을 타고 중국인들이 시베리아로 몰려들고 있다. 1991년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개방을 시작하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무역과 장사로 러시아에 들락거리다가 최근에는 아예 불법이민자로 러시아에 정착하고 있다. 특히 1999년부터 러시아 경제가 살아나면서 이러한 현상은 현저히 증가하였다.

    러시아인들은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시베리아 지역을 자신들이 피땀 흘려 개척해놓았는데, 중국인들이 여기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고용하지 않고서는 시베리아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을 정도가 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중국의 ‘인해전술’이 성공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러시아 연방이민국은 대부분 단기 비자를 받고 극동지역에 들어온 중국인 불법입국자를 100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연 60억달러 이상을 중국으로 송금하고 있다고 파악한다. 이 가운데 시베리아로 건너간 조선족은 약 2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주로 잡화 등을 취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족을 포함한 이들 중국인 불법이주자들은 조만간 극동 상권도 장악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인 고용해 중국인 견제

    중국은 인해전술과 함께 정부 차원에서 러시아 자원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과거 석유 수출국이지만 지난 10년간 경제성장을 계속하면서 점차 세계 최대의 석유 수입국으로 바뀌고 있다.

    중동을 제외하고 중국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 자원을 제공할 국가는 인근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밖에 없다. 현재 러시아산 비철 금속의 최대 수입국가도 중국이다. 여름만 되면 시베리아의 강줄기를 타고 내려온 목재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은 이제 러시아로부터 자원 유입이 없다면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 중국은 미국 시장보다 러시아 자원이 더 절실할 수도 있다.

    자원의 보고 시베리아에 대한 일본의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그동안 일본은 북방 4개섬 반환 문제로 러시아 진출을 등한시하였다.

    최근 러시아 시장의 규모가 커지자 일본의 전자업체들이 러시아 시장에 다시 뛰어들었지만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과 유럽의 업체들과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 전자제품 시장에서 소니의 캠코더를 제외하고 1위를 차지하는 일본업체가 없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2003년 1월,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쿠릴열도 반환, 핵무기 폐기 등 양국의 해묵은 정치 현안이 아닌 에너지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후 일본은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 획득을 위해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일본 민간기업들은 지나칠 정도로 풀베팅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에너지 안보와 일본 자본의 새로운 탈출구로서 시베리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에너지 자원개발과 산림자원 및 농업 개발에 러시아 다음으로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국가는 북한이다. 일찍이 북한은 노동력이 부족한 극동 시베리아 벌목장에 노동자를 파견하면서 극동과 인연을 맺었다. 러시아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중국인이 아니라 북한인을 끌어들인 것은 중국의 거대한 인구 유입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한편 북한은 부족한 외화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극동 시베리아의 자원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은 또한 만성적인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돌파구로서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특히 한국의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에 주목하고 있다.

    소원해진 한·러 관계

    이처럼 각국이 시베리아를 둘러싼 거대한 게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고 있는데 한국은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대러시아,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도는 한러 수교 이후 가장 낮은 상황이다. 수교 이후 한국의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한반도 4강 외교를 위해 러시아를 방문해왔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1년이 넘도록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역시 북핵 문제를 위한 외교 테이블에 자국을 적극 초청하지 않으려는 한국 정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2003년 5월 상테페트르부르크 정도(定都) 300주년 기념식에 한국을 공식 초청하지도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시베리아에서 벌어질 거대한 게임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는 새 정부의 핵심적인 정책으로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목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정책 목표는 정부 내부적으로는 의미 있는 목표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국력을 집약시키는 정책 수단으로서는 모호한 구호다. 무엇보다 한국 국민들은 ‘동북아’라는 실체 없는 지리적 범주에 혼란을 겪고 있다. 한국의 한 일간지는 동북아라는 범위에 홍콩까지 넣어서 동아시아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미국과 알래스카까지 포함된 지리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중심국가라는 표현도 외교적 결례이다.

    동북아 지역 가운데 한국이 공동으로 개발사업을 벌이고 협력을 강화할 곳은 시베리아밖에 없다. 시베리아는 또한 원료공급지, 제품소비처의 성격이 강해 한국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대시베리아 사업의 우선적인 목표는 자원의 확보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국내 수요가 높은 천연가스 자원을 시베리아로부터 파이프라인을 통해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문제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을 견제하는 미국까지 이 사업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으며, 엑손 모빌과 셰브론 텍사코, 쉘 등 세계 석유 메이저들도 ‘코빅타’ 가스전 개발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개발권 지분 매입을 적극 추진중이다.

    러시아 정부는 코빅타 가스전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루시아 페트롤리엄(RP)’에 가스개발 프로젝트 경험이 많은 가즈프롬을 참여시키기를 원하고 있는데, 이는 가스전 개발과 판매 사업에 메이저인 TNK-BP나 한국, 중국의 결정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한국측 컨소시엄은 파이프라인 설치에 돈 내고, 가스만 받아서 장사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파이프라인 건설 참여, 가스 가격 협상, 가스 물량 확보 등 장기적으로 제기될 문제에 대비해나가야 한다. 결국 코빅타 가스전 게임도 국가간 총력 베팅과 외교 역량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시베리아 가스 개발은 한국이 세계사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강대국과 자웅을 겨루는 거대한 게임이 될 것이다.

    한국-북한-러시아를 잇는 유라시아철도는 한국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동맥이 될 수 있다. 유라시아철도를 통해 한반도와 대륙간 대량 물류이동이 현실화할 경우 한반도와 연해주 등지에 물류단지, 배후 공업단지, 신도시가 생겨나게 된다. 이주, 여행도 활성화된다. 이는 한국과 러시아에 새로운 투자 요인, 경제성장 요인이 될 수 있다.

    유라시아철도 연결에는 러시아 정부가 가장 적극적이다. 유라시아철도 노선이 중국 만주 또는 연해주 중 어느 쪽으로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한국의 국익 차원에서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다. 연해주 노선의 경우 시베리아-연해주-한반도가 한번에 이어지게 되고 러시아정부의 파격지원으로 철도운임이 싸지며 중국 베이징 부근의 극심한 철로 체증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이 시베리아 에너지 자원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면 국가 경쟁력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돼 21세기를 주도해나가기 어렵다. 한국은 이미 중동에 아시안 프리미엄(아시아 석유 수입국이라는 이유로 추가로 더 내는 가격)을 연간 50억달러 이상 지불하고 있다. 시베리아 천연가스가 개발되면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중동산과의 경쟁관계를 이용하여 구매자가 주도권을 쥐는 방향으로 에너지 시장을 바꿔나갈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지금 ‘차이나 드림’에 빠져 있다. 러시아는 중국에 비해 인구가 적고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매력 없는 시장이라는 의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상황인식이다.

    한국 기업이 러시아에 관심을 기울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린 사례가 적지 않다. 러시아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러시아 시장에서 컬러TV, 모니터, VCR, 전자레인지, DVD플레이어, 냉장고, 레이저프린터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컬러TV의 경우 ‘러시아 국민브랜드’ 3회 연속 수상으로 국민브랜드 마크 영구사용권을 획득했다. 휴대전화는 2002년 모토롤라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가 러시아 시장을 석권한 비결은 러시아인의 기호와 소득수준에 맞춘 제품을 적기에 공급한 데 있다. 정치적 혼란과 복잡한 대금결제 관계로 일본 업체들이 러시아 시장을 거들떠보지 않던 1990년대 초반, 삼성은 러시아에 진출하여 현지인 소득수준에 맞춘 전자제품을 공급해 제품 경쟁력을 키웠다. 또한 삼성은 러시아 시장에서 관세와 세금을 제대로 내고는 이윤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제품 유통과 공급은 현지 업체에 위임하였다. 러시아 현지 딜러들은 자기들만의 통관 및 세무 노하우로 물건을 판매하고 한국 현지법인은 광고, A/S를 담당하였다.

    이런 전략은 적중했다. 이제 삼성전자는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러시아에서 일류 브랜드로 각인된 데엔 지속적인 광고 및 다양한 공익 활동도 한몫했다. 삼성전자는 1991년 러시아에 진출한 후부터 브랜드 이미지 광고를 지속적으로 벌여왔고 최근에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대규모 빌보드를 통한 이미지 광고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모스크바 중심가에 대규모 디지털 전시관인 ‘갤러리 삼성’을 열었는데, 이곳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삼성은 자사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삼성 톨스토이 문학상’을 제정했다. 또한 볼쇼이 극장, 디나모 아이스하키팀을 후원하는 등 러시아 예술과 스포츠 부문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삼성전자를 배워라”

    러시아에서 삼성전자의 성공 사례는 한국 정부 및 다른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에 진출할 때 참고삼을 만하다. 한국은 국가 이미지를 고양시켜, 러시아인들에게 우호와 협력이 가능한 나라로 다가서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 민간차원에서 한·러간 교류를 적극적으로 진행시키고 러시아의 부족한 기본 인프라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EDCF 차관에 러시아를 포함시키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시베리아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유리한 조건 한 가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10만명으로 추산되는 고려인 동포다. 이들은 한국이 갖고 있는 유용한 인적 자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물밀듯 들어오는 중국인들 중 상당수는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들이다. 이들은 무역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 벌목공과 탈북자도 한국의 인적 자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고려인들은 한국 정부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다. 같은 한국인인 고려인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한국 국적 부여에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비자 발급에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높은 것. 소련이 해체된 뒤 독일과 이스라엘은 부모형제 가운데 자국인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으면 본국으로 불러들여 국적을 부여했다. 중국 정부와 달리 러시아 정부는 이중국적을 인정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고려인도 러시아 경제가 호전됨에 따라 점차 기업가의 틀을 갖추어나가고 있다. 고려인들은 건설, 가구, 통신분야 등 소비업을 중심으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으며, 성공한 기업가들로 지역사회에 정착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려인 동포들이 자영업에 종사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한국은 고려인 동포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대출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조총련이 성장한 것은 일본 경제의 도약기에 북한이 재정적으로 이들을 지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러시아 경제도 과거 일본과 마찬가지로 도약기에 놓여 있다. 이러한 시기에 신용 대출은 고려인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시베리아 이민 장려해야

    시베리아는 기회의 땅이다. 무궁무진한 자원을 바탕으로 산업 및 사회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는 역동적인 변화의 현장이다. 한국은 국가적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시베리아에 눈을 돌려야 한다.

    선진국은 이미 고착화된 사회로 투자 대비 연 10% 이상 이익을 남기는 사업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도약기에 있기 때문에 아이템만 잘 잡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만 해도 자기 자본 하나 없이 한국과의 고철 무역이나 수산물 무역으로 연간 1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한국인이 많다.

    물론 러시아 사업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세무서와 경찰서의 횡포는 여전하며 거리의 마피아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인맥을 중시하는 러시아 사회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인이 갖고 있는 사업적 재능과 IT 감각은 러시아에서 곧바로 현금화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의 발전으로 전화접속 인터넷 서비스 시장이 이미 사장된 상태다. 한국통신 등이 갖고 있는 전화접속 ISP 장비는 거의 고철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이제 막 인터넷에 눈을 뜬 나라다. 그러나 광활한 면적 때문에 위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는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다. 그에 따라 전화접속 인터넷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의 중고 ISP 장비로 인구 10만 정도 도시에 서비스를 한다면 수익이 보장될 수 있다.



    유통업을 비롯해 요식업, 제조업에 이르기까지 시베리아에서 한국인들이 소자본을 가지고도 뿌리내릴 수 있는 기회는 많다. ‘동토의 버려진 땅’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시베리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약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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