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비등수로 단면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특이하게 설계됐다. 한국이나 프랑스는 경수로를 주로 운영하기에 비등수로에 대한 정보가 없는 편이다. 비등수로는 미국과 일본에서 많이 제작됐다. 미국과 일본이 많이 지었다고 해서 비등수로를 최고로 보면 안 된다. 세계 원전의 대세는 경수로다. 경수로는 비등수로보다 경제적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통계에 의하면 2011년 7월 4일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동되는 상업용 원전은 440기다. 이 중 가장 많은 노형이 271기가 가동되는 경수로이고, 다음이 88기의 비등수로다. 가동 중인 세계 원자로의 61.6%가 경수로란 사실은 경수로가 가장 안전하고 경제적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월성원자력본부에 있는 중수로 4기를 제외하면 전부(17기) 경수로를 운영하기에 1기도 없는 비등수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리 1호기보다 더 오래된 후쿠시마 1호기
경수로 발전소는 돔형 지붕을 가진 원통 모양의 건물(원자로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등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원자로에서 타고 나온 사용후핵연료는 터빈 건물에 만든 거대한 수조(水槽, pool)에 집어넣는다.
화덕에서 금방 꺼낸 연탄재는 뜨겁다. 그와 마찬가지로 원자로에서 타고 나온 사용후핵연료도 매우 뜨겁기에 물을 담은 수조에 담아 냉각시키는 것이다. 사용후핵연료는 연탄재와 달리 열이 오래 지속되니 수십 년간 수조에 담가놓는다.
비등수로 개발 초기 GE는 원자로를 둘러싼 격납용기를 작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격납용기 위에 사용후핵연료 수조를 설치하도록 설계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1호기는 한국 최고(最古)의 원전인 고리 1호기보다 7년 앞선 1971년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사고를 당했을 때 후쿠시마 제1발전소 1호기의 나이는 만 40세였다. 이 원전을 건설한 1960년대엔 일본(도쿄전력)도 기술이 없었기에 GE에 모든 것을 맡겼다.
원전 설계는 상업운전을 하기 10년 전쯤에 하니, GE는 이 원전을 1950년대 말이나 1960년대 초 설계한 것으로 추청된다. GE가 미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라고 하지만 1950~60년대에는 지금의 한국 대기업보다 기술 수준이 낮았다. 안전에 대한 기준도 허술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본은 미국의 군정을 받다가 1952년 독립했으니 1950년대와 60년대엔 미국에 대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미국이 하는 것은 무조건 수용했다. GE는 일본의 자연재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서 1호기를 해발 10m의 낮은 곳에 지어 이후 원전도 낮은 곳에 건설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호기의 비상발전기를 지하에 설치하도록 설계한 것도 GE로 봐야 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 별탈 없이 1호기가 운영됐으니 GE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은 일본도 1호기 선례에 따라 비상발전기는 지하에, 격납용기는 얇게 지었을 것이다.
경수로도 미국에서 설계한 원자로다. 경수로는 웨스팅하우스와 밥콕앤드윌콕스, 컴버스천엔지니어링에서 설계했다. 그런데 밥콕앤드윌콕스 사는 그들이 만든 스리마일 섬-2호기가 노심 용융 사고를 내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은 경수로 기술을 한국에 전수하고 웨스팅하우스에 합병됐다. 미국의 경수로 회사들은 하나같이 터빈 건물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를 설치했다.
한국의 울진5호기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 사용후핵연료도 뜨겁기 때문에 물에 넣어 냉각시킨다.
GE도 격납용기와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가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설계해 건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시설은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다. 이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로 확인됐다.
한 구조물 안에 두 시설을 짓다 보면 전기나 수도 등 공동으로 사용하는 설비는 서로 연결해줘야 한다. 격납용기가 밑에 있고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가 위에 있다면 격납용기 안에 있는 가스를 빼내는 관은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를 통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두 시설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연결되는 통로가 생긴다. 사람들은 없다고 믿었지만 구멍이 존재한 것이다. 그 틈으로 수소가 빠져나가 수소폭발을 일으켰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1호기가 폭발했을 때 핵폭발이 일어났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핵연료는 핵폭발을 하지 못한다. 핵폭발은 100만 분의 1초 이내에 모든 핵분열이 끝났을 때를 의미한다. 원자로에 들어가는 핵연료는 3년 동안 핵분열을 한다. 100만 분의 1초 이내로 일어나야 할 핵분열을 3년으로 연장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가 저농축이다.
한국형 경수로에 장전되는 핵연료(다발). 핵연료는 길이 3m쯤 되는 핵연료봉 289개를 묶은 것이다.
핵연료는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의 비율을 3~5%(경수로 기준) 정도로 농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위적으로 중성자를 쏴주지 않으면 핵분열을 하지 못한다. 중성자가 많아지면 핵분열 속도가 빨라지지만, 핵폭탄이 터질 때처럼 빨라지지 못한다.
이러한 핵연료가 물에 잠겨 있지 못해 녹아내리는 것은 핵분열 속도와 무관하다. 자동정지한 다음의 핵연료는 중성자가 사라졌기에 핵분열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녹아내리는 것은 자체 열 때문이다. 자체 열을 식히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없으니 냉각을 하지 못해 녹아내린다. 자동정지한 상태에서 핵연료가 녹아내리는 것은 핵분열과는 무관함을 분명히 알고 넘어가자.
핵연료는 담배필터만한 크기로 만든다. 이러한 핵연료를 금속으로 만든 긴 봉(棒) 속에 차곡차곡 넣는데, 핵연료를 집어넣은 봉을 ‘핵연료 봉’이라고 한다. 이러한 핵연료 봉을 격자 모양의 틀에 넣어 다발로 만든 것을 ‘핵연료 다발’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핵연료가 바로 핵연료 다발이다.
녹은 지르코늄관이 산소와 결합해 수소 발생
핵연료 다발은 원자로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른데, 한국형 원자로의 핵연료 다발은 핵연료봉을 17×17(289)개로 묶은 것이다. 289개 핵연료봉 중 몇 개에는 핵연료가 없고 중성자를 잡는 붕소가 들어 있다. 붕소가 들어 있는 연료봉을 가연성 독봉(可燃性 毒棒, Burnable Rod)이라고 한다. 가연성 독봉은 핵분열로 늘어나는 중성자를 잡는 역할을 한다.
원자로 크기에 따라 핵연료 다발을 수백 개씩 집어넣고 핵분열을 시킨다. 원자로 안에 들어간 핵연료 다발은 3년동안 타고 나와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로 옮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원전회사들이 3년에 한 번꼴로 모든 핵연료를 교체하는 것은 아니다. 1년에 한 번씩 3분의 1을 교체한다. 원자로 안에는 금방 넣은 것, 1년간 탄 것, 2년간 탄 것이 3분의 1씩 들어가 핵분열을 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3년간 탄 것을 꺼내 사용후핵연료 수조로 보내고 새로운 핵연료 다발을 넣는 것이 핵연료 교체다.
노심 용융이 일어난 원자로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나는 이유는 핵연료를 담고 있는 봉의 재료에서 찾아야 한다. 핵연료를 감싸는 봉은 ‘지르코늄(Zirconium)’이라는 금속으로 만든다. 지르코늄은 지르콘(Zircon)이라는 광물로 만든다. 지르콘은 화성암과 변성암 퇴적암 등에 널리 분포돼 있으며 다이아몬드에 가까운 광채를 띠는 특징이 있다.
원자로는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드는, 특수강으로 만든 거대한 물통이다. 따라서 원자로 안에 들어갈 물질은 고온(高溫)의 물에 오래 담겨 있어도 부식되지 않아야 한다. 지르코늄은 물에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다.
핵연료를 핵분열시키려면 인위적으로 중성자를 쏴줘야 한다. 따라서 핵연료를 감싸고 있는 물질은 외부에서 쏴준 중성자를 잘 통과시켜야 한다. 지르코늄은 중성자를 잘 통과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많은 중성자를 통과시키다 보면 재질이 약해질 수 있는데, 지르코늄은 ‘중성자 포격(砲擊)’을 받아도 애초의 강도를 유지하는 성질이 있다.
핵분열 중인 핵연료는 상당히 뜨거워지므로, 핵연료를 감싸고 있는 물질은 높은 온도에서도 물성(物性) 변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지르코늄은 높은 온도에서도 강도를 유지하는 특성이 있다. 핵분열을 하는 핵연료에서는 강한 방사선이 나오는데 지르코늄은 방사선을 쬐어도 끄떡하지 않는다. 방사선을 쪼인 물질 가운데 일부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성하는데, 지르코늄은 그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핵연료를 담는 재료로는 최고인 것이다.
수소의 강력한 힘
이런 이유로 핵연료봉을 지르코늄으로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지르코늄에도 한계가 있다. 핵분열하는 핵연료가 들어 있는 원자로 안의 물이 줄어들어, 핵연료가 물 밖으로 드러나 과열됐을 때 내는 열에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지르코늄은 물에 잠긴 상태에서만 핵연료에서 나오는 열을 견뎌낸다. 물이 줄어들어 물 밖으로 드러난 핵연료 상단이 과열돼 내는 열에는 함께 녹아버린다.
물이 공급되지 않는 원자로에서는 줄어든 물이 증기로 변하므로 원자로 안은 증기로 자욱해진다. 이러한 수증기가 녹아내린 지르코늄을 만나면 이산화지르코늄을 생성하면서 수소를 발생시킨다. 이를 화학식으로 정리하면 Zr(지르코늄)+2H₂O(물) ⇒ ZrO₂(이산화지르코늄)+2H₂(수소)가 된다.
지르코늄이 이산화지르코늄이 되는 과정은 발열(發熱)반응이다. 열이 나면 반응 속도가 빨라지니 지르코늄은 이산화지르코늄으로 더 빨리 변한다. 따라서 발생하는 수소의 양도 급증한다. 수소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기체이기 때문에 발생한 수소는 바로 격납용기 안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떠오른다.
수소의 농도가 4%를 넘으면, 주변에 있는 산소와 결합해 연소할 수 있다. 수소의 농도가 10%를 넘기면 연소가 아니라 강력한 폭발을 일으킨다(수소 폭발).
수소가 산소와 결합했을 때 일으키는 폭발력은 상당히 강하다. 요즘 과학계는 강력한 힘을 내는 수소폭발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수소 에너지를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로켓으로 만드는 우주발사체를 들 수 있다.
현재 지구궤도에 인공위성을 올려놓은 나라는 10개국이다. 이 가운데 수소(액체수소)와 산소(액체산소)를 섞어 태워 수소폭발을 시키는 수소엔진으로 우주발사체를 만드는 나라는 미국 프랑스, 일본 세 나라뿐이다. 러시아와 중국 등 여섯 나라는 산소(액체산소)에 등유(캐로신) 등을 섞어 태우는 엔진으로 인공위성을 올린다.
펠렛으로 불리는 담배 필터 크기의 핵연료. 이들을 넣은 길이 3m의 봉이 지르코늄으로 만드는 핵연료 봉이다.
수소엔진의 장점은 공해가 적다는 점이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면 물이 만들어지는데, 물은 무공해 물질이다. 등유와 산소를 결합시켜 태우면 엄청난 그을음이 발생한다. 등유+산소를 태우는 엔진은 그을음 때문에 재사용할 수가 없다. 수소엔진은 그을음이 발생하지 않으니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수소엔진을 사용한 대표적인 우주발사체가 미국의 우주왕복선이다. 이 우주왕복선이 반복해서 우주를 다녀오는 것은 수소엔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멀쩡한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
인류는 이러한 수소를 자동차엔진 연료로 쓰는 것도 연구하고 있다. 지금의 자동차엔진은 휘발유나 경유 같은 기름을 산소(기체산소)와 섞어 태우는 것으로 힘을 내기에 공해를 유발하고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수소엔진을 사용한다면 물을 발생시키고 강한 힘을 얻으니 공해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동차에서 발생한 물은 도로로 흘러내리게 해 자동으로 도로를 청소하는 데 쓸 수도 있다. 수소는 ‘깨끗할 뿐만 아니라 숫소(황소)’만큼 강력하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1호기에서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수소 때문에 강력한 수소폭발이 일어났다. 그런데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폭발은 격납용기가 아니라 그 밖에서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격납용기 위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를 이고 있는 구조다.
수소폭발이 있은 후 1호기를 관찰한 사람들은 지붕과 벽이 날아간 사용후핵연료 수조의 바닥이 건재한 것을 확인했다. 수조의 바닥은 격납용기의 지붕인데, 바닥은 그대로 였다.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 순간 사람들은 다른 상상을 했다.
사용후핵연료도 상당히 뜨겁다. 따라서 이들을 담고 있는 수조의 물도 뜨거워진다. 때문에 원전회사들은 수조에서 뜨거워진 물은 자동으로 빠지고 찬물이 들어가게 설계해놓았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큰 지진을 당했으니 그때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에 금이 가 물이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 자동으로 찬물이 들어가게 하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사용후핵연료 수조의 물이 끓어 증발되면서 사용후핵연료가 상단부터 물 밖으로 나오게 된다. 상단부는 냉각을 하지 못해 스스로 녹아내린다. 같은 원리로 수소가 생성되니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의 천장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사고를 수습한 후 살펴보니 1호기의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는 여전히 물을 담고 있었다. 줄어든 물 때문에 수면으로 나와서 상당부가 녹아내린 사용후핵연료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용후핵연료가 과열돼 수소가 생성됐다는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다.
그제야 사람들은 격납용기와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 사이에 관이나 전선 등이 통과하는 틈이 있었고, 그 틈으로 격납용기 안에서 발생한 수소가 빠져나가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의 천장에 모여 있다가 수소폭발을 일으켰다는 판단을 했다. 사고를 당해야 사람들은 기존 시스템이 갖고 있던 허점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유도리’가 없는 일본
사고가 났을 때 가장 애타는 이는 현장 책임자다. 당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소장은 요시다 마사오(吉田昌郞, 당시 56세) 씨였다. 요시다 소장은 배터리가 방전된 다음부터는 원자로 밸브를 열어 증기를 빼내고 해수를 주입하는 것 외에는 사고를 막을 방법이 없다고 본 듯했다.
그러나 해수를 넣는 것은 명목상으로는 1조 원이 넘는 멀쩡한 원자로를 버리는 것이라 결심하지 못하다. 이러한 결심은 도쿄전력의 CEO의 몫이다. 가쓰마타 쓰네히사 회장이나 시미즈 마사타카 사장이 용단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했다. 원자로 안에 해수를 넣어 원자로를 못쓰게 하는 것은 혼자서 독배(毒杯)를 마시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수를 주입한 후 추가 사고 없이 마무리를 했는데, 누군가가 해수를 넣지 않아도 됐는데 무리해서 넣어 1조 원이 넘는 자산을 날렸다고 비난하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본주의 사회다. 돈의 힘이 통하는 사회다. 도쿄전력은 주식회사다. 주주의 힘이 막강한 기업인 것이다. 해수 주입을 결정한 사람은 큰 사고와 더 큰 피해를 막았지만 1조 원을 날려버린 것에 대해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다.
도쿄전력은 주주들의 동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지켜본 사람들은 도쿄전력이 가시와자키 카리와 망령에 젖어 있어, 해수 주입을 망설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사회는 상명하복을 중시한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를 하기 쉽다. 그런데도 일본 사회가 독재로 흐르지 않는 것은 많은 매뉴얼이 있기 때문이다(사실 일본 조직에는 상급자가 마음대로 하는 특성이 많이 발견된다).
상급자일지라도 매뉴얼에서 벗어난 것은 지시하기 어렵다. 매뉴얼대로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항명을 한 하급자에게는 절대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일본이다.
문제는 매뉴얼이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다. 그때는 누구도 소신 있게 행동하지 못한다. 일본에서 공부한 석현수 무대감독은 한국인과 일본인 기질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일본인들은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일은 하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맡은 일만 성실히 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공연 중 한 배우가 대사를 잊어버리면 상대 배우가 애드리브로 메워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하기로 한 대사만 한다. 즉흥성이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즉흥성을 발휘하면 오히려 문제의 배우가 된다. ‘융통성(ゆとり, 裕り·유도리)’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은 반대다. 한국인들은 즉흥성이 뛰어나다. 일본의 회사원은 부장이나 사장이 있건 없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다. 사무실에 뱀이 들어온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일본인들은 바로 대응하지 않고 사장이나 부장에게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고, 지시가 내려진 뒤에 행동한다. 부장이나 사장이 없으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 반면 한국인들은 먼저 뱀을 잡고 본다.
응급 상황에는 즉흥성이 강한 한국인들이 잘 대처한다. 그러나 평상시 한국인들은 즉흥성 때문에 누군가가 농담을 하면 일손을 멈추고 전부 농담에 참여한다. 일본인들은 일하는 중에는 농담하는 법이 없다. 누가 농담을 해도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자기 일만 한다.”
‘유도리’가 없는 사회가 일본이다. 2003년 일본 문부과학성은 ‘유도리’ 없음이 주입식 교육에서 생겨났다고 보고, 2003년부터 유도리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히려 학생들의 실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나 2010년 주입식 교육으로 되돌아왔다. 유도리 없는 매뉴얼 사회가 좋은가, 임기응변의 사회가 좋은가? 분명한 것은 일본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짜여진 사회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가시와자키 카리와 망령
앞에서 정리했듯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후쿠시마 제2발전소, 가시와자키 카리와 발전소라는 3개의 원자력발전 단지를 운영했다. 이 가운데 가장 신형이고 가장 큰 단지가 가시와자키 카리와 발전소였다. 가시와자키 카리와의 6호기와 7호기는 일본이 개발한 제3세대 비등수로(ABWR)인지라 설비용량이 무려 135만6000여 kW나 되었다.
이렇게 큰 원자로가 있으니 7기가 있는 가시와자키 카리와 발전소의 총 설비용량은 도쿄전력 전체 원전 설비용량의 47.5%에 달했다. 는 도쿄전력이 운영한 3개 단지의 17기 원전이 상업발전을 시작한 때와 설비용량을 정리한 것이다.
태평양에 면한 쪽은 지진이 많이 일어나지만 동해 쪽은 상대적으로 적게 일어난다. 그런데 2007년 7월 16일 니가타현 앞바다에서 규모 6.8의 강진이 일어났다. 가시와자키 카리와의 7기 원전 중 지진이 일어난 날 2,3,4,7호기는 가동되고 있었고, 1,5,6호기는 정비를 위해 정지 중이었다.
1,5,6호기가 받은 충격은 이 원전의 내진(耐震) 설계치를 약간 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지진 이전부터 정지하고 있던 3호기의 주(主) 변압기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지진 직전까지 가동되고 있던 6호기에서는 정해진 관로로 흘러야 하는 계통수(水) 1.2t이 새나와 바다로 흘러들었다. 이 계통수의 오염 정도는 규제치 이하였지만, 지진으로 인해 원전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방사능이 섞인 물이 바다로 흘러갔다는 사실은 주변 지방자치단체를 긴장시켰다.
아무도 결심하지 못했다
니가타현을 비롯한 자치단체들은 가시와자키 카리와 원전의 재가동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도쿄전력에 확실한 안전 검사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도쿄전력은 안전 검사를 받고 재가동을 해도 좋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은 내진 부문 등이 약하다며 안전장치를 추가할 것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재가동을 승인하지 않았다.
전력회사는 전기를 생산해야 이윤을 얻는다. 가시와자키 카리와 원전이 오래 멈춰 서 있으면 도쿄전력은 상당한 손해를 본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요구하는 안전 검사에 응하고, 필요한 보강 조치를 했다.
그런데도 지방자치단체들은 더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재가동 승인을 미뤘다. 지방자치단체들은 한 호기마다 정밀한 검사를 한 후 재가동을 허용했다. 가시와자키 카리와 발전소의 7기 원전은 2010년에야 모두 가동될 수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선거권을 쥔 주민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주민 안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주민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결과 도쿄전력은 매출과 이익에서 큰 손해를 보았다.
이러한 기억이 있으니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원전에 해수를 주입해 더 큰 사고를 막고 원자로를 버린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용단(勇斷)’이다. 상투적인 결정은 삼척동자도 할 수 있다. 큰 손해를 보는 줄 알면서도 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한 용단은 아무나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CEO는 소탐대실(小貪大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범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