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호

WWW(월드와이드웹) 탄생 30년

컴퓨터 과학자의 ‘자료 공유’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꾸다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입력2020-03-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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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 유럽 한 연구실에서 탄생

    • 아마존, 구글 등 세계적 기업의 뿌리

    • 넥서스, 넷스케이프, 익스플로러, 크롬

    • 아이폰이 가져온 웹 대중화

    • 콘텐츠 생산자 폭증의 이면

    • 망 중립성 확보 과제

    2019년 3월 스위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한 ‘월드와이드웹’ 개발자 팀 버너스리. [뉴시스]

    2019년 3월 스위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한 ‘월드와이드웹’ 개발자 팀 버너스리. [뉴시스]

    2019년 10월 24일 세계 1위 갑부가 바뀌었다는 외신이 화제가 됐다. 미국 기업 아마존의 주가가 이날 하루 8.1% 급락하면서 지분의 12%를 소유한 CEO 제프 베이조스의 자산 70억 달러(약 8조3000억 원)가 증발했다. 그 결과, 베이조스의 총 자산이 1028억 달러(약 122조 원)로 줄어 1075억 달러(약 128조 원)를 소유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기술고문에게 세계 최고 갑부 자리를 빼앗겼다는 보도였다. 게이츠가 2017년 베이조스에게 1위를 내줬으니, 그의 관점에서는 2년 만의 탈환인 셈이다. 

    베이조스는 2019년 초 이혼하지만 않았어도 세계 최고 갑부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당시 그는 아내 매킨지에게 아마존 지분의 25%를 넘겨줬다. 당시 가치로 356억 달러(약 42조 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위자료로 기록됐다. 

    대체 아마존이 어떤 회사이기에 창업자가 이런 천문학적인 재산을 갖게 됐을까. 1964년생인 베이조스는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전기공학과 컴퓨터과학을 공부한 뒤 월스트리트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30세인 1994년 아마존을 창업했고 이듬해 온라인 서점 ‘아마존닷컴(amazon.com)’을 열었다. 

    아마존닷컴의 이름이 알려지자 베이조스는 점차 음반, 전자제품 등으로 취급 상품을 늘리며 종합 쇼핑몰을 만들어갔고, 투자금과 수익금으로 새로운 사업도 벌였다. 그 결과 아마존은 MS, 애플, 구글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정보통신(IT) 기업이 됐다. 

    베이조스가 사업 천재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대를 정말 잘 타고났다는 얘기다. 이 말은 1998년 구글을 창업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이들은 각각 세계 갑부 6위와 7위다). 이들이 회사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이 무렵 인터넷 대중화를 이끈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줄여서 WWW 또는 W3 또는 웹(Web)이라고 한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의 차이

    많은 사람이 월드와이드웹, 즉 웹을 곧 인터넷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둘은 다른 개념이다. 인터넷(internet)은 컴퓨터 사이에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다. 반면 웹은 인터넷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방법, 즉 서비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워낙 잘 만들어져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도 웹을 통해 쉽게 인터넷을 경험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대중의 뇌리에는 ‘웹=인터넷’이라는 등식이 생겼다. 

    1990년 월드와이드웹이 개발되고 30년이 지나는 동안 인터넷, 즉 웹은 세상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우리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이지만 그사이 많은 유수의 기업이 몰락했다. 반면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신생 회사가 세계적인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하는 믿을 수 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직업이 사라졌고 또 생겨났다. 

    웹이 불러일으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했고, 이를 기회로 잡은 사람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팔자를 고쳤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 격변과 비교될 정도다. 

    이런 극적인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1990년 웹의 탄생이다. 당시 웹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비슷한 서비스가 개발돼 인터넷 대중화가 이뤄졌을 수도 있지만 시간은 꽤 지체됐을 것이다. 2020년 새해를 맞아 웹 개발 30주년 역사를 되짚어보고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세계 최초의 웹브라우저 넥서스

    웹의 콘텐츠가 보관돼 있는 컴퓨터를 웹 서버라고 한다. 웹브라우저를 통해 해당 콘텐츠(웹 페이지)를 호출하면 HTTP 규약을 통해 웹 서버에 연결돼 콘텐츠 데이터를 가져올 수 있다. 1990년 버너스리가 최초로 만든 웹사이트 콘텐츠가 보관된 웹 서버 컴퓨터(왼쪽)와 개발이 완료된 웹브라우저 ‘월드와이드웹’ [위키피디아]

    웹의 콘텐츠가 보관돼 있는 컴퓨터를 웹 서버라고 한다. 웹브라우저를 통해 해당 콘텐츠(웹 페이지)를 호출하면 HTTP 규약을 통해 웹 서버에 연결돼 콘텐츠 데이터를 가져올 수 있다. 1990년 버너스리가 최초로 만든 웹사이트 콘텐츠가 보관된 웹 서버 컴퓨터(왼쪽)와 개발이 완료된 웹브라우저 ‘월드와이드웹’ [위키피디아]

    놀랍게도 웹은 국가나 기업이 투자한 대규모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아니다. 1989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를 관리하던 컴퓨터과학자 팀 버너스리(Tim Burners-Lee) 한 사람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불과 1년 만에 실현된 결과물이다. 오늘날 ‘웹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너스리는 어떤 사람일까. 

    1955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의 집에는 당시로는 정말 드물게 컴퓨터가 있었다. 부모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연구하는 응용수학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덕분인지 1976년 옥스퍼드대에서 물리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버너스리는 진로를 바꿔 컴퓨터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1984년 CERN에 자리 잡은 버너스리는 과학자들이 실험 데이터와 논문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CERN은 수십 개국에서 온 과학자와 공학자 수백 명이 상주하며 거대입자가속기를 만들고 실험해 새로운 물리현상을 발견하는 첨단 연구소다. 

    이곳의 실험 데이터는 연구소 내 과학자들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공동 연구자들에게도 공유돼야 했기 때문에 좀 더 빠르고 편리한 인터넷 시스템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다. 인터넷은 이미 1960년대 개발돼 연구소나 대학 등 연구 기관을 연결하고 있었지만 기관마다 관리 시스템이 달라 접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데이터 용량이 점점 커지고 연결된 컴퓨터(엄밀히는 단말기) 수가 늘어나 네트워크가 점점 더 복잡하게 엉켰다. 인터넷을 통해 데이터를 얻느니 차라리 담당 연구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서류로 받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던 버너스리는 1989년 어느 날 문득 이미 해결 방안이 제시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여러 아이디어를 한데 모아 구현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통합 시스템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버너스리의 제안에 대해 당시 상사는 “모호하지만 멋진 아이디어”라며 프로젝트화를 승인했다. 이후 버너스리는 동료 로베르 카이오와 함께 불과 1년 만인 1990년 12월 25일 웹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컴퓨터에서 웹에 접근하기 위한 창인 웹브라우저 ‘월드와이드웹(WorldWideWeb)’을 만들어 역시 자신들이 만든 세계 최초의 웹사이트(info.cern.ch)를 불러냈다. 그 뒤 웹브라우저 이름이 서비스 이름과 같아 헷갈린다는 지적에 따라 브라우저 이름은 ‘넥서스(Nexus)’로 개명했다. 그렇다면 웹의 핵심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먼저 콘텐츠를 하이퍼텍스트(hypertext)로 만든다. 웹 페이지를 읽다 보면 밑줄이 쳐진 파란색 단어나 문구를 볼 수 있다. 이것을 클릭하면 새로운 웹 페이지가 열린다. 이를 하이퍼링크(hyperlink)라고 한다. 웹 페이지가 하이퍼링크를 통해 서로 연결돼 있고 사람들은 이를 클릭하기만 하면 쉽게 웹 페이지 사이를 넘나든다. 그 결과 원하는 정보를 훨씬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다. 하이퍼링크를 따라 여기저기 둘러보는 행위를 흔히 ‘웹 서핑(web surfing)’이라고 한다. 

    다음은 도메인 네임(domain name) 시스템이다. 이는 하이퍼텍스트로 만든 콘텐츠(웹 페이지)에 주소를 체계적으로 지정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웹사이트(website)는 관련된 웹 페이지를 하나의 도메인 네임(domain name) 아래 모아놓은 묶음이다. 예를 들어 ‘신동아’ 웹사이트의 도메인 네임(shindonga.donga.com)을 입력한 뒤 엔터키를 치면 홈페이지 화면이 열리고 목록에 있는 기사를 클릭하면(물론 하이퍼링크로 연결돼 있다) 웹 페이지가 뜬다. 그 주소(URL)를 보면 도메인 네임 뒤에 ‘/…’ 식으로 표시돼 있다. 한 가족이라는 말이다. 

    하이퍼텍스트의 놀라운 점은 하이퍼링크의 범위가 한 웹사이트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이퍼텍스트로 만든 모든 콘텐츠는 하이퍼링크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즉 클릭 한 번이면 무대가 완전히 바뀐다. 

    한마디로 웹은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하이퍼텍스트로 묶인 거대한 집합이다. 사실 하이퍼텍스트는 1963년 정보기술 분야 개척자 테드 넬슨이 만든 용어지만 버너스리가 이를 구현하는 컴퓨터 언어 HTML을 만들면서 실용화됐다.

    웹 대중화 이끈 넷스케이프

    파이어폭스, 크롬, 익스플로러 등 웹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웹의 대중화가 이뤄졌다. [GettyImage]

    파이어폭스, 크롬, 익스플로러 등 웹브라우저가 개발되면서 웹의 대중화가 이뤄졌다. [GettyImage]

    한편 버너스리와 동료들은 웹에서 하이퍼텍스트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등록하거나 편집하고 컴퓨터에서 불러오기 위한 규약(프로토콜)도 만들었다. 이를 HTTP라고 한다. HTTP 프로토콜을 따르는 전형적인 URL(흔히 ‘웹사이트 주소’라고 한다)은 ‘http://www.…’으로 시작한다. 이때 ‘http:’는 이 콘텐츠에 접근하는 프로토콜이 HTTP라는 뜻이고 ‘// ’는 뒤에 도메인 네임이 온다는 뜻이다. 

    도메인 네임은 웹사이트임을 나타내기 위해 ‘www’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콘텐츠를 등록하거나 편집하는 작업이 아니라 단순히 불러오는 경우는 ‘http://’를 쓸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 많은 웹사이트 주소(URL)에서 ‘http:’ 표기가 생략돼 있다. 

    어쨌든 웹을 개발하고 기분 좋게 연말을 보낸 버너스리는 1991년 1월 CERN뿐 아니라 다른 연구소에도 웹브라우저 ‘넥서스’를 배포했다. 이제 연구소들은 웹사이트를 만들어 하이퍼텍스트로 쓰인 콘텐츠를 올리고 HTTP 규약에 따라 손쉽게 다른 연구소의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연구 효율이 크게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웹이 잘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버너스리는 같은 해 8월 일반 대중에게까지 ‘넥서스’를 공개하며 무료 배포했다. 바야흐로 정보화 시대의 막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뜨거운 반응과 달리 초기 웹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아 문서 기반 웹브라우저인 넥서스를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문할만한 웹사이트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바뀐 건 1993년, 미국 일리노이대 재학생 마크 앤드리슨이 그래픽 기반 웹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를 개발하면서부터다. 이제 컴퓨터 마니아가 아닌 사람도 모자이크의 안내에 따라 쉽게 웹을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이듬해 회사를 차린 앤드리슨은 모자이크를 개선한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를 내놓았고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제프 베이조스가 인터넷 서점을 구상하고 아마존을 창업한 게 바로 이때다. 

    1995년 필자는 국내 모 기업 연구소 연구원이었다. 당시 회의실에서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사용법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긴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1990년대 후반 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웹브라우저 시장을 평정했고 2008년 구글이 ‘크롬’을 내놓으면서 맹추격해 역전에 성공했다. 오늘날엔 크롬의 웹브라우저 점유율이 60%가 넘는다.

    스마트폰 시대의 웹

    2007년 미국 뉴욕에서 아이폰 출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위). 2019년 국내에서 가장 많이 조회된 동영상(공식 뮤직비디오 제외)은 가수 장윤정이 신곡 ‘목포행 완행열차’를 부르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으로 132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GettyImage, 유튜브 캡처]

    2007년 미국 뉴욕에서 아이폰 출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위). 2019년 국내에서 가장 많이 조회된 동영상(공식 뮤직비디오 제외)은 가수 장윤정이 신곡 ‘목포행 완행열차’를 부르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으로 132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GettyImage, 유튜브 캡처]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하며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고, 이와 더불어 웹의 두 번째 도약이 이뤄졌다. 1990년 이후 인터넷 인프라가 급격히 확장되고 데이터 전송 속도가 빨라지면서 웹이 널리 퍼졌지만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많았다. 특히 중장년층 이상에서는 ‘인터넷(=웹)’이라는 단어에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웹 서핑에 익숙한 사람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만 접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있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소위 ‘컴맹’인 사람도 직관적으로 작동하는 손 안의 컴퓨터로 쉽게 웹을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결합하면서 웹의 덩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최근에는 유튜브가 인기를 얻으면서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1위가 ‘유튜버’인 세상이 됐다. 

    사실 애플이 스마트폰을 내놓으며 선보인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줄여서 ‘어플’ 또는 ‘앱’이라고 부른다)은 웹이 아니라 모바일 기기에 최적화된 별도의 인터넷 서비스다(이를 네이티브앱(native app)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앱은 하이브리드앱(hybrid app)이다. 즉 포장지만 앱이고 내용물은 웹이다. 이미 웹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다시 앱 양식으로 만들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이티브앱은 아이폰용과 안드로이드폰용을 따로 만들어야 해 비용이 이중으로 든다. 

    요즘 우리가 즐겨 찾는 포털과 쇼핑몰, SNS 등의 앱은 대부분 하이브리드앱으로 콘텐츠는 웹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설치한 교보문고 앱을 누르면 열리는 화면은 스마트폰의 네이버 또는 구글에서 교보문고를 검색해 사이트 주소(mobile.kyobobook.co.kr)를 클릭했을 때 열리는 화면과 똑같다. 결국 스마트폰에서도 인터넷은 대부분 웹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말이다. 

    다른 인터넷 서비스도 웹의 영향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e메일(전자우편)이나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도 웹 페이지 주소를 쓰면(예를 들어 www.donga.com) 자동으로 하이퍼텍스트처럼 밑줄이 있는 파란색으로 바뀌면서 하이퍼링크가 생성돼 클릭하면 웹으로 연결된다. ‘한글’이나 ‘MS워드’ 같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콘텐츠 생산자 되는 세상

    수많은 익명의 개인이 필자로 참여하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GettyImage]

    수많은 익명의 개인이 필자로 참여하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GettyImage]

    웹이 자리 잡으면서 ‘세계 모든 사람이 정보를 만들고 공유하는’ 버너스리의 꿈이 사실상 이뤄졌다. 그의 이상이 구현된 대표적인 예는 익명의 수많은 사람이 필자로 참여하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일 것이다. 

    누구나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는 건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다.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이미 콘텐츠 생산자이긴 하다. 하지만 본인 외에는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도 과거엔 방법이 극히 제한돼 있었다(그러니 ‘샘터’ 같은 잡지에 보낸 수필이 게재되면 평생 기억될 일이었다!). 그 시대에 콘텐츠 생산자는 학자나 작가, 기자, PD 등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웹의 등장으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기 웹사이트를 만들어 콘텐츠를 올릴 수 있게 됐다. 블로그가 대표적인 예다. 2000년대 들어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 즉 블로거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몇몇은 인생이 바뀌기도 했다. 

    과학저술가 이은희 작가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모 기업 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이 작가는 취미로 블로그를 만들어 생물학 이야기를 틈틈이 써 올렸는데 네티즌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마침내 한 출판사가 그 내용에 주목했고, 2002년 ‘하라하라의 생물학 카페’라는 책을 펴냈다. 이것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씨는 연구소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서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과학저술가가 됐다. 

    사실 블로그 같은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건 꽤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여전히 오랫동안 대다수 사람은 콘텐츠 소비자에 머물렀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SNS가 결합되면서 이제 정말 누구나 콘텐츠 생산자인 시대가 됐다. 

    모든 일에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웹도 예외는 아니다. 버너스리의 바람대로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양질의 정보를 마음껏 접할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이 됐지만 어느 시점부터 웹의 정보가 넘쳐나면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즉 검색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를 알아챈 컴퓨터공학도 두 사람이 검색엔진을 만드는 사업을 구상해 1998년 창업한 회사가 바로 구글이다. 

    탁월한 검색엔진이 나왔다고 바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양질의 정보뿐 아니라 불량 정보에 대해서도 접근이 더 쉬워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맑은 것보다 탁한 것에 더 끌리기 마련이다(‘물이 맑으면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각국 정부를 중심으로 명백히 유해한 사이트를 차단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회피하는 방법도 진화하고 있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웹이라는 양날의 칼

    정보의 왜곡 또는 조작도 웹 발전이 가져온 심각한 부작용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이 보여줬듯 웹을 통해 가짜 뉴스가 순식간에 퍼지면서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이런 행위가 갈수록 교묘해짐에 따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가짜)인지 구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버너스리가 꿈꾸던 웹의 모습과는 정반대가 되는 현상이다. 

    웹은 사람들의 정신건강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이 본격 보급된 2010년대 들어 SNS와 온라인 게임, 온라인 쇼핑에 중독된 사람이 크게 늘었다. 회사에서 SNS를 지나치게 하다 수차례 지적을 받고도 고치지 못해 결국 쫓겨난 사람도 있다. 

    공인들 역시 웹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어디를 가나 스마트폰 카메라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실수나 다툼도 카메라에 포착돼 웹에 올라가는 순간 수많은 사람 앞에 노출된다. 이는 순식간에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으로 돌아온다. 얼마 전 자살한 젊은 여성 연예인의 경우 전 남자친구에게 “성관계 동영상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는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나의 은밀한 장면을 훔쳐보더라도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물론 이것도 무척 불쾌한 일이다) 지금은 동영상으로 기록돼 만인이 ‘감상’할 수 있는 끔찍한 세상이 됐다. 많은 여성이 일상생활에서 이런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건 엄연한 현실이다. 

    독일 베를린예술대의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2012년 출간한 책 ‘투명사회’에서 웹이 연 정보화 사회의 부작용을 지적했다. 그는 “걸러지지 않은 대량의 정보는 지각을 무뎌지게 한다”며 “정보의 과다는 사유의 위축으로 귀결된다”고 썼다. 

    SNS 역시 일상 공개를 포함한 정보 교환을 통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는 것보다 자신에 대한 인정을 갈구하는 측면(올린 콘텐츠에 대한 ‘좋아요’ 횟수에 따라 일희일비한다!)이 더 강하다. 지인이 SNS에 올린 여행지나 맛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좋아요’를 누를 때 느끼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그 결과 SNS에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더 우울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나왔다. 

    한 교수는 앞의 책에서 “소셜미디어는 나르시시즘적 매체”라며 “우울증은 무엇보다도 나르시시즘적인 질병”이라고 갈파했다. ‘투명사회’가 나오고 8년이 지난 지금, 웹의 영향력이 더 커지면서 사회는 더 투명해졌고 우울증이나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더 늘어났다.

    버너스리의 끝나지 않은 꿈

    1993년 접근성이 높은 웹브라우저의 등장으로 웹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자 버너스리는 이듬해 10월 ‘W3C(World Wide Web Consortium)’를 설립해 웹의 국제표준을 만드는 작업에 매진했다. W3C에는 세계 각국의 관련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W3C는 지금까지 80여 개의 권고안을 발표했고 웹 관련 교육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여해왔다. 특히 웹 언어와 프로토콜에 대한 저작권이 없는 공개 표준을 만들어 웹이 분열되거나 상업화되는 걸 막는 데 주력하고 있다. 웹 개발자가 자신의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 자산 확산에 기여하는 데 삶의 의미를 둔 사람이라는 게 인류로서는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버너스리는 자신이 만든 웹이 성장하는 양상에 갈수록 실망이 커졌다. 너무나 빨리 웹이 정부와 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가 교묘하게 좌지우지되는 공간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결국 버너스리는 2009년 ‘월드와이드웹재단(WWWF)’을 설립해 ‘망 중립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망 중립성(net neutrality)이란 정부와 기업이 인터넷(웹)에 존재하는 콘텐츠에 대해 ‘비차별, 상호접속, 접근성’의 세 가지 원칙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정신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최근 중국 정부는 선별적인 웹사이트 차단으로 망 중립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버너스리는 이런 현상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2019년 11월 2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에서 버너스리와 WWWF는 ‘웹을 위한 약정(Contract for the Web)’으로 명명한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웹이 오용되는 걸 막고 인류의 이익을 위해 쓰일 수 있게 9개 원칙을 정해 각 주체(정부, 기업, 시민)가 실천하도록 촉구하자는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정부가 지켜야 할 원칙 세 가지는 ‘누구나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게 보장하고, 모든 인터넷을 항상 쓸 수 있게 하고, 국민의 온라인 사생활과 데이터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이다. 기업이 지켜야 할 원칙 세 가지는 ‘누구나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게 하고, 고객의 사생활과 개인 데이터를 존중하고, 인류를 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이다. 끝으로 시민은 ‘웹의 창조자이자 협력자가 돼야 하고,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웹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다 좋은 말인데 어딘지 공허하기도 하다. 

    인류에게 웹을 선물한 버너스리는 2002년 BBC가 선정한 ‘위대한 영국인 100인’에 이름을 올렸고, 2004년 ‘밀레니엄 테크놀로지상’의 첫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2016년 튜링상을 받았다. 

    필자는 이번 글을 준비하며 1997년 미국 월간 과학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12월호)에 실린 버너스리의 인터뷰를 읽어봤다. 당시 42세인 버너스리는 “웹이 아직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웹을 통해 부모님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낸 경험을 들려줬다. 

    그 무렵 미국 MIT에 살고 있던 버너스리는 영국 런던에 있는 부모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선물로 웹사이트에서 와인 한 상자를 주문했다. 버너스리는 “부모님 집 앞까지 배달하는 비용으로 7파운드, 즉 고작 10달러(약 1만2000원)만 지불했다”면서 “이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며 즐거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소박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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