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울역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비록 식민 통치의 산물이지만, 그래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옛 서울역사(驛舍)는 국내에서 가장 돋보이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공간이다. 붉은 벽돌로 쌓은 르네상스식 2층 건물에, 한가운데 비잔틴식 돔을 멋지게 올렸고, 중앙 출입문 처마에 커다란 원형 시계를 걸어놓은 모습.

옛 서울역사는 KTX 개통으로 2004년부터 역의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은 ‘문화역서울 284’로 간판을 바꿔 달고 주로 전시 공간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허전하다. 이곳에서 서울역 100년의 역사와 흔적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지…. 그저 전시만 열심히 기획하는 것은 아닌지…. 저 의미심장한 건축물을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소비하고 있는지….

경성역에서 서울역까지

옛 서울역의 뿌리는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금의 서울역 북쪽 염천교 가까이에 남대문정거장이 생겼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로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 경의선 철도가 생겼고 이듬해인 1900년 이 철도가 한강을 지나 서대문까지 연장되면서 이에 필요한 남대문정거장이 염천교 옆에 생긴 것. 이후 1922년 남대문정거장이 경성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25년 경성역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것이 바로 옛 서울역 건물이다. 경성역은 광복 이후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옛 서울역사는 1922년 6월 건축 공사에 들어가 1925년 9월 준공됐다. 설계는 일본인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가 맡았고, 공사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진행했다. 건물 규모는 지상 2층, 지하 1층에 총면적은 8216m²(2480여 평). 중앙 건물엔 비잔틴풍의 돔을 얹었고 앞뒤 4곳에 작은 탑을 세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1층 창의 3분의 2 되는 곳까지는 석재로 마감하고 그 위와 2층은 연분홍 벽돌로 마감했다. 역사의 처마엔 지름 1m가 넘는 대형 시계를 걸었다. 1층에는 대합실과 귀빈실, 2층에는 이발실, 양식당(그릴)이 있었고 지하는 사무실로 사용했다.

옛 서울역사는 KTX 서울역사가 바로 옆에 신축되면서 2003년 12월 31일 철도역으로서의 기능을 마감했다. 그때까지 80년 가까이 이 땅의 수많은 사람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이후 한동안 비어 있던 옛 서울역사는 2011년 8월 신축 당시의 형태로 복원됐고, 이름을 ‘문화역서울 284’로 바꾸어 전시와 공연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흔적

일제가 경성역 건물을 신축하고 철도 건설에 열을 올린 것은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해서였다. 중국과 러시아로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한반도의 식량 자원과 광산 자원을 약탈해 실어 나르기 위한 의도였다. 일제의 의도가 이렇다보니 철도를 이용하는 데에도 한국인 차별이 빈번했다. 동아일보는 1923년 3월 6일자 사설에서 “다소의 편리를 이용하여 조선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주머니를 빼앗아 가는 교통기관”이라고 비판했다.

기본적으로 식민 침략의 산물이었지만 유럽풍의 새로운 모습 덕분에 서울역은 당시부터 화제였다. 동아일보 1925년 10월 8일자엔 이런 기사가 실렸다.

“2층 양옥 경성 정거장도 머지않아 손님을 맞고 보내게 된답니다…이 집 구조의 내용은 가보시면 아시려니와 내부에는 승강기와 난방 장치도 있고…2층에는 이발실과 크고 작은 식당이 있다는데 200여 명분의 연회설비도 할 만 하답니다. 그 중에도 우스운 것은 중계(中階)에는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변소를 만들어 두었답니다.”

유럽풍의 이국적인 외관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2층 최초의 양식당 ‘그릴’은 양식당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통용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역에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고, 그로 인해 다양한 사연과 흔적이 축적됐다. 이상의 소설 ‘날개’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식민지 지식인과 도회인의 낭만과 우울, 독립운동과 생계를 위해 만주로 떠난 망명객 이주민들의 고단한 발걸음, 6·25전쟁과 피란열차, 가난을 극복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무작정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던 사람들의 설렘과 두려움, 귀성표를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서 밤을 지새운 기억, 2층 그릴에서 맞선을 보던 청춘남녀의 설렘….

1930년대 말 일제 침탈이 극심해지던 시절, 서울역은 만주로 떠나는 사람들의 출발점이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 떠났고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서울역에서 먼 길을 떠났다. 군수물자도 서울역을 거쳐 북방으로 이동했고, 돌아올 기약 없이 징용을 떠나는 사람들도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광복 직후엔 이런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조선말 큰 사전’ 원고 2만여 장의 뭉치가 발견됐다. 엄혹했던 시절,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작성한 조선말 큰 사전 원고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글학자들이 체포되고 뺏긴 채 그 행방을 알지 못했던 그 원고가 극적으로 발견된 곳이 바로 옛 서울역사였다.

서울역은 그런 곳이었다. 지난 100년 우리의 영욕과 애환이 가득한 곳이었다. 어느 하루도 그냥 넘어간 날이 없을 정도다. 그렇기에 옛 서울역사에서의 경험은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곳에서의 흔적은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역사적 차원까지 포함한다.

옛 서울역은 보통의 열차역이 아니다. 단순히 열차가 섰다 출발하고, 열차를 타고 내리는 공간이 아니다. 20세기 한반도와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일상적 삶의 흔적이 다층적으로 축적돼 있는 공간이다. 20세기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이보다 더 진지하고, 이보다 더 위대한 공간의 흔적이 또 어디 있을까.

전시장으로 갇혀버린 옛 서울역

전시장으로 사용 중인 ‘문화역서울 284’ 내부. [고미석 동아일보 기자]

옛 서울역사는 한동안 방치되다 2011년 복원됐다. 복원 작업은 1925년 신축 시점으로 건물을 최대한 되살리면서 서울역의 80년 역사를 모두 담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1920년대 사진을 토대로 벽난로와 몰딩, 벽지 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건물 뒤쪽 외벽의 6·25전쟁 당시 총탄 자국도 그대로 두었고, 1970년대까지 대통령이 이용했던 1층 귀빈실도 되살렸다.

1층 중앙홀 천장에 있었던 천창(天窓)도 되살렸다. 중앙홀 천창은 원래 8×8m 크기의 정사각형 스테인드글라스로 돼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파괴된 뒤 폐쇄했다. 1925년 서울역 신축 당시 스테인드글라스의 형태는 남아 있지 않아 새로 제작했다. 제작은 작가인 조광호 신부가 맡았다. 1×1m짜리 유리 64장으로 구성된 새 중앙홀 스테인드글라스는 은근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다. 한가운데에 3태극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두 겹의 선이 다양한 색상의 하트 모양으로 물결치듯 돌아간다. 사각형 스테인드글라스의 네 모퉁이에도 이 같은 디자인을 반복해 넣었다.

이렇게 복원된 옛 서울역사에서는 주로 전시가 열린다. 가끔씩 공연이나 행사도 열린다. 그런데 전시와 공연을 통해 옛 서울역 100년의 경험과 흔적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물론 2층에 복원 전시실이 마련돼 있기는 하다. 이곳은 원래 옛 서울역의 이발소 자리였다. 여기에선 복원 공사 도중 확보된 건물 부재나 관련 자료, 영상 등을 보여주고 있다. 복원 전시실을 마련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발소 분위기를 전혀 살리기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2층 대식당 그릴 또한 마찬가지다. 그릴은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당이었다. 그런데 그릴의 인테리어는 복원했지만 그곳에서 행해졌던 음식과 관련된 행위의 흔적은 전혀 만나볼 수 없다. 음식과 연관된 전시나 공연은 물론이고, 재현 행사 같은 것도 열리지 않는다. 옛 서울역사에서는 보통의 갤러리나 공연장에서 선보이는 전시와 공연만 열리고 있다. 그릴이라는 공간만 남아 있고 서울역 그릴과 관련된 콘텐츠는 전혀 구현되지 않는 상황이다.

옛 서울역사를 찾는 사람들은 옛 서울역의 본래 기능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지만 복원된 건물 외에 그 기능적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복원된 건물의 물리적 형태에서도 옛 서울역의 시간성·역사성을 느낄 수 있긴 하지만, 전시 공연이라는 콘텐츠 측면에서 보면 그냥 보통의 전시이고 공연일 뿐이다. 전시나 공연 장소가 오래된 건물(근대건축물)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시 공연과 다를 바 없다. 형태만 남아 있고 그곳이 담고 있던 행위와 감성의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옛 서울역 vs 문화역서울 284

스테인드글라스로 새로 제작한 옛 서울역 중앙홀 천창(天窓).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옛 서울역사는 복원 이후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면서 공식적인 이름이 ‘문화역서울 284’로 바뀌었다. 2011년 당시 문화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이 서울역을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 문화의 매력을 전파하는 거점으로 삼겠다는 취지로 ‘문화역 서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옛 서울역이 사적 284호라는 이유로 숫자 284를 덧붙였다. 이에 관해 문화역서울 284 홈페이지에 이런 설명이 실린 바 있다.

“대국민 공모를 통해 역사적, 공간적, 도시적 상징성을 결합해 탄생했습니다. 옛 서울역의 사적번호(284)를 문화 공간이라는 콘셉트와 접목하였습니다. 또한, 사적으로서의 모습과 그 가치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문화가 교차되는 역으로서의 의미를 계승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칭은 그 개념이 불분명해 대중에게 와닿지 않는다. 문화역이라고 하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과 284라고 하는 난해한 숫자가 얽혀 있는 형국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284라는 숫자의 의미를 모른다. 그렇기에 284라는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예전처럼 ‘옛 서울역’이라고 하면 서울역이 지니고 있는 오랜 영욕의 역사와 보통 사람들의 무수한 삶의 애환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문화역서울 284’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누군가는 ‘옛 서울역’이라고 하면 촌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촌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외려 이 건물의 본질을 더 잘 구현한다. ‘문화역서울 284’는 세련된 느낌을 줄 수는 있지만 이 공간의 역사와 본질은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명칭에서도 옛 서울역의 본래 역사와 기능을 외면한 셈이다.

옛 서울역(문화역서울 284)은 건물을 원형으로 복원하고 복원 전시실을 마련했지만 거기 담겨 있던 무형의 흔적은 제대로 복원하지 못했다. 서울역의 역사와 본래 기능을 외면한 채 흔하디흔한 전시 공간으로만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적 284호 옛 서울역사를 복원하고 활용하고자 한 것은 그곳이 다름 아닌 ‘서울역’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침략 의도와 함께 근대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공간이었다는 사실, 1925년부터 2003년까지 80년 가까이 무수히 많은 한국인이 열차를 타고 내리던 서울의 관문이었다는 사실, 역사와 삶의 다양한 층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에 주목해 복원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타고 내리는 것의 의미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차역으로서의 역사(歷史)가 아닐 수 없다. 그 역사가 지금 옛 서울역사(문화역서울 284)라는 존재의 출발점이다. 옛 서울역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은 열차를 타고 내리는 기능이다.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승하차 기능을 일부 되살려야 한다는 말이다. 옛 서울역사는 현재 KTX 서울역사와 연결돼 있다. 옛 서울역사에서 나가면 바로 철길이 있고 플랫폼이 있다. 철도 기능의 일부를 복원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근대건축사 전공인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서울역사는 여전히 기차역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능력이 있다. 지금도 구 서울역사의 플랫폼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문화역 뒤편의 플랫폼에서는 기차를 탈 수 있고, 대통령의 지방 나들이 역시 옛 서울역의 플랫폼을 이용한다. 단지 플랫폼과 옛 서울역사가 인접해 있으면서도 기능적으로 연계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플랫폼과 옛 서울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문만 연결한다면 구 서울역사는 다시 원기능을 회복할 것이고 이는 KTX 신역사와 함께 훌륭하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기차역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안창모, ‘대한제국과 경인철도 그리고 서울역’, ‘철도저널’ 제19권 제6호, 한국철도학회, 2016)

서울역을 제대로 소비하려면

우리는 100년 된 철도역 건물에서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없을까. 옛 서울역사와 그 주변에서 현재 타고 내리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면 승하차 기능을 굳이 되살리자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옛 서울역 건물을 전시 공연 문화 공간으로만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옛 서울역사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바로 옆 KTX 서울역사와 철도 레일이 연결돼 있고 열차가 수없이 오가고 있다. 옛 서울역사는 대합실로 활용해도 충분할 정도로 안전하다. 하루의 일부 시간대에 철도역으로서의 기능을 일부 살린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옛 서울역사의 기능을 봉쇄했다. 옛 서울역사와 신축 서울역사를 애써 단절시켜 버렸다.

유럽이나 일본 등지를 여행하다 보면 오래된 열차역을 종종 만난다. 세월의 흔적이 흠뻑 묻어나는 열차역. 우리는 그곳에서 열심히 추억을 만든다. 대합실 내부를 둘러보고 빛바랜 외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것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며 그 열차역의 역사와 문화와 건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 열차역에서는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100년 역사의 옛 서울역이 있는데도 말이다.

열차를 타고 내리는 기능. 그것의 일부라도 되살아날 때 옛 서울역의 수난사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서울역에서 경험했던 수난의 역사는 모두 서울역이 열차역이었기 때문이다. 식민 통치의 수난과 치욕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옛 서울역의 활용 방식은 본래의 기능에 더 충실해야 한다. 지금처럼 전시 기획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옛 서울역 100년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저 근대건축물을 제대로 소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