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와 닛산의 경영 통합 문제가 결정적 원인
통합 반대 일본인 임원들이 ‘딥 스로트’ 역할
르노·닛산·미쓰비시 연합체 회장에서 囚人, 도망자 신세로
도쿄지검 특수부, 신화의 붕괴 넘어 몰락…
강제송환 방법 없는 日사법 당국… 닭 쫓던 개 신세
올해 1월 일본 와사비스시스튜디오가 발매한 컴퓨터 게임 이름이다. 카를로스 곤(Carlos Ghosn) 전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연합체) 회장의 탈주극을 모티프로 제작됐다. 넷플릭스가 이 탈주극의 영화화를 검토 중이라는 설(說)도 흘러나온다. ‘경영의 신(神)’ 카를로스 곤은 왜 일본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을까.
세기의 탈주극
2019년 12월 29일 일본 도쿄(東京) 도심 미나토(港)구에 터 잡은 단독주택. 한 남성이 문밖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자택에서 800m 떨어진 프린스호텔. 그곳에서 미국인 남성 2명과 합류했다. 오후 4시 30분 세 사람은 시나가와(品川) 역에서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에 탑승했다. 고속열차는 시속 250㎞로 3시간을 달려 종착지 신오사카(新大阪) 역에 오후 7시 30분 도착했다. 대기 중이던 승용차로 갈아탄 일행은 간사이(關西) 국제공항 근처 호텔로 향했다. 이 남성은 대형 음향기기 상자에 몸을 숨겼다.일행은 오후 8시 30분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두 미국인은 여권을 제시하고 입국 수속을 밟았다. 수하물 검색대 통과가 관건이었다. 수하물 검사를 실시하려는 공항 보안직원에게 미국인 남성이 말했다. “개인 제트기용 화물입니다.” 공항 직원은 “알겠다”고 답했다. 엑스레이 검사를 생략하겠다는 뜻이었다. 공항에 설치된 검색기로는 대형 수하물을 검색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도 존재했다.
공항 보안구역에 들어선 두 미국인은 개인제트기 터미널 출국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기장에는 캐나다 봉바르디에(Bombardier)가 제작한 비즈니스 제트기 글로벌(Global) 7500이 관제탑의 이륙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체에는 터키 민간 항공사 MNG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오후 11시 10분 이륙한 제트기는 12시간을 비행해 다음 날 오전 9시 터키 수도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내려앉았다. 공항에는 또 다른 MNG 소속 글로벌 7500 제트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라피크하리리 국제공항이었다.
12월 31일 오전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남성은 입국 심사대에 프랑스 여권을 내밀었다. 신상 정보란에는 ‘카를로스 곤(Carlos Ghosn), 1954년 3월 9일 출생’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경영의 신에서 囚人, 도망자 신세로
도쿄 시민들이 1월 8일 카를로스 곤의 탈주극을 다룬 방송 뉴스를 보고 있다. [뉴시스]
2018년 11월 19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닛케이신문(日經新聞) 사옥 닛케이(日經)홀에서 주일(駐日)프랑스상공회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아녜스 파니에뤼나셰 프랑스 경제부 부(副)장관, 루이 슈웨체르 르노 명예회장을 비롯해 프랑스·일본 정·재계 인사 800명이 참석했다. 곤도 저녁 행사에 참석해 연설할 예정이었다.
이날 오후 4시 35분 도쿄 하네다(羽田) 국제공항 활주로에 닛산 회장 전용 제트기가 착륙했다. 곤이 몸을 내리려던 찰나 검은색 정장 차림 남성 5명이 기내로 난입했다. 모리모토 히로시(森本宏) 부장검사가 지휘하는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수사관들이었다. 그들은 3시간여 심문을 진행한 후 곤을 체포했다.
비슷한 시각, 요코하마(横浜) 닛산 본사와 도쿄 미나토구의 곤 자택에서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같은 날 저녁 그렉 켈리(Greg Kelly) 닛산 대표이사도 공범으로 체포됐다. 일본 검찰이 이들에게 적용한 혐의는 유가증권보고서 허위신고, 배임, 횡령이었다. 유가증권보고서에 누락된 곤의 소득은 4400만 달러(496억 원)에 달했다.
밤 10시, 사이가와 히토로(西川廣人) 닛산 사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히토로 사장은 “카를로스 곤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됐다. 사건은 그의 장기간 통치가 낳은 어두운 단면이다”라고 밝혔다.
곤이 체포된 지 사흘 후인 11월 22일, 닛산 이사회는 곤과 켈리를 각각 회장과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하기로 의결했다. 11월 26일, 미쓰비시자동차 이사회도 곤의 회장직 박탈을 결의했다.
하루 10시간 정자세… 1주에 2번만 샤워 허락
12월 10일, 도쿄지검 특수부는 곤과 닛산을 동시에 기소했다. 공소장에는 곤의 소득신고서 허위 기재, 배임·횡령 혐의 등이 기재됐다. 검찰은 최장 10년 징역형을 재판부에 요청했다.그 무렵 일본 언론은 곤의 혐의를 집중해 보도했다. 도요타 회장의 6배가 넘는 49억8700만 엔(50억 원)의 고액 연봉과 도쿄, 뉴욕, 파리, 암스테르담, 리우데자네이루, 베이루트 등에 닛산 명의의 호화 저택, ‘자가용’으로 사용한 업무용 제트기 등을 거론하며 곤을 향해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부도덕한 경영자’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듬해 1월 23일, 프랑스의 르노 이사회도 곤을 회장직에서 해임했다. 이로써 곤은 르노-닛산-미쓰비시 3개 자동차 회사 회장직을 모두 잃었다.
체포 후 곤은 도쿄구치소에 수감됐다. 경영의 신(神)에서 수인(囚人)으로 영락(零落)한 그의 구치소 생활은 가혹했다. 다다미 3장 넓이(6.6㎡)의 독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재소자는 24시간 중 10시간 동안 정자세를 하고 있어야 했다. 샤워는 1주일에 2번만 허락됐다.
곤의 신병을 확보한 도쿄지검 특수부의 조사는 집요하게 이어졌다. 곤은 체포 직후부터 “형사 피의자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최장 23일의 구속 기간에 수사를 종결짓지 못했다. 곤의 추가 비리를 캐는 ‘별건수사’로 구속 기간을 연장해 108일 동안 구금했다.
곤도 ‘방어권’을 적극 행사했다. 2019년 2월, 변호인단 책임자로 히로나카 준이치로(弘中惇一郞)를 선임했다. 히로나카는 22년간 검찰에 몸담았으며 도쿄지검 특수부장을 지냈다. 그는 검사들의 논리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면도칼’이라는 별칭을 얻은 스타 변호사였다. 3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는 곤의 보석을 허가했다. 보석금은 10억 엔(110억 원), 일본 사법 사상 최고금액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곤은 4월 3일, 트위터 계정에 “진실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다”며 4월 11일 기자회견 개최를 암시했다.
다음 날 도쿄지검 특수부는 그를 재(再)체포했다. 명목은 특별배임, 닛산 본사가 중동(中東) 지역 오만의 판매 대리점에 보낸 지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였다. 다시 체포된 지 나흘 후인 4월 8일, 닛산은 임시 주주총회를 개최해 곤을 이사직에서도 해임했다. 4월 25일 도쿄지방재판소는 곤의 재(再)보석 청구 신청을 받아들였다. 추가 보석금 5억 엔(55억 원), 석방 조건으로 아내 카롤 곤과 접촉 금지 항목을 추가했다. 거주지는 도쿄 지요다구 자택으로 제한됐으며 CCTV 등을 통해 생활을 감시했다.
8개월 후 곤은 세기의 대탈출을 감행했다. 극적 드라마의 감독은 아내 카롤 곤, 조연은 마이크 테일러였다. 테일러는 미국 육군 특수부대 ‘그린베레’ 출신으로 1994년 민간보안업회(AISC)를 설립했다. 테일러는 ‘레바논 도주’를 설계했고, 20회 넘게 일본을 방문해 나리타(成田)·하네다·간사이 등 주요 10개 공항을 답사했다. VIP 승객, 대형 수화물 보안검사에서 허점이 발견된 간사이 국제공항을 탈출 루트로 낙점하고 ‘예행연습’까지 거쳐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인정사정없는 미스터 코스트 커터
‘극적 드라마의 주인공’ 곤의 생애는 예사롭지 않다. 곤은 1954년 3월 브라질 내륙 콘도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조부 비차라 곤(Bichara Ghosn)은 레바논에서 브라질로 이주한 동방가톨릭교 신자였다. 아버지 조르지(Jorge)는 나이지리아 출신 프랑스 국적자 로제 제타(Rose Jazzar)와 결혼해 4남매를 두었다. 곤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1960년 일가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로 이주했다. 1968년 예수회가 설립한 노틀담고교에 진학, 프랑스인 사제로부터 프랑스어와 역사·문화를 배우며 프랑스 소재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1971년 곤은 혈혈단신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랑제콜(grandes écoles·프랑스 전문기술인 양성대학)의 하나인 파리 국립고등광업학교에 입학했다. 수학, 물리학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주요 관심 분야는 사학, 지리학, 언어학이었다. 문·이과 통섭(統攝)형 엘리트였던 셈이다. 대학 졸업 후 석·박사 과정 진학을 염두에 두던 곤에게 운명의 전기가 찾아왔다. 프리미엄 타이어 제조사 미쉐린(Michelin)이 해외사업 확장을 준비하면서 인재를 구했다. 조건은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남미 사정에 정통한 자’였다.
24세의 곤은 미쉐린의 프랑스 공장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주업무는 생산품질관리였다. 성과를 인정받아 공장장으로 승진했다. 1985년 브라질 법인 대표로 발령받았다. 당시 브라질은 정치·경제 혼란이 지속됐고, 현지 법인 사정도 나빴다. 곤은 경영 정상화에 매진해 4년 후 브라질 법인을 정상궤도에 올려놨다. 1989년 미쉐린 본사는 곤을 미국·캐나다·멕시코를 관할하는 북미법인 사장으로 승진 임명했다.
“미쉐린 직원, 르노 요직에 취임.” 1996년 9월, 유럽 일간지들은 곤의 ‘출세’를 대서특필했다. 루이스 슈바이처(Louis Schweitzer) 르노 회장이 그를 스카우트한 것이다. 직함은 ‘기술·개발·제조·구매·남미지역 담당 부사장’. 생산성 하락, 수익 저하의 늪에 빠진 르노의 구원투수 역할이었다. 곤은 입사 5개월 후 200억 달러의 비용 삭감 계획을 발표하고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미스터 코스트 커터(Mr. Cost-Cutter·비용 절감인)’는 이렇게 탄생했다. 신규 차량 개발에도 매진해 ‘공무원이나 타는 인기 없는 차’로 인식되던 르노의 이미지 변신에도 성과를 냈다. 곤 취임 1년 후 르노의 수익성은 급격히 개선됐다.
도산 위기 닛산을 구한 영웅
카를로스 곤은 ‘경영의 신’에서 도망자 신세가 됐다. [뉴시스]
곤이 부임할 당시 닛산의 경영 실적은 참담했다. 부채가 2조 엔(22조 원)에 달했고, 전체 시판 46개 모델 중 3개에서만 수익이 났다. 일본 국민은 ‘닛산 도산’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닛산은 일본의 부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도 얻었다.
곤은 ‘닛산 재건 계획’을 발표했다. 골자는 생산 효율이 나쁜 공장 폐쇄, 전 차종 엔진·부품 공동 사용을 통한 비용 절감, 총 직원 14%에 해당하는 2만1000명 정리해고였다. 닛산 임직원들은 독재자라 야유하며 개혁에 저항했으나 성과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 곤 취임 4년 만인 2003년 6월, 닛산은 누적 부채 2조 엔을 청산했다. 일본 시장점유율도 20%로 회복됐다. 일본 사회는 그를 ‘일본의 영웅’이라고 칭찬했다.
곤도 승승장구했다. 2003년 닛산 회장직에 올랐다. 2005년 르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를 겸직했다. 2016년 4월, 미쓰비시자동차 지분 34%를 확보해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폴크스바겐, 도요타에 이은 세계 3대 자동차 제조사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됐다. ‘경영의 신’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회사 내 영항력도 막강해 그의 말은 ‘신의 목소리’로 불렸다.
정상에 오른 곤에 대한 비판·반감도 커져갔다. 매년 일본 CEO 평균 보수의 10배가 넘는 거액 보수를 수령한다는 점, 세계 각지에 호화 저택을 구입하고 매입·관리 경비를 닛산 부담으로 했다는 점 등 개인 문제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다. 경영 방식에 대한 비판도 따랐다. 그중 ‘계열’로 불리는 ‘기업집단’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특히 컸다. 가장 큰 불만은 르노와 닛산 간 불평등 관계였다. 르노는 닛산 주식의 43.4%를 보유한 최대 주주로 닛산은 르노의 연결 자회사였다. 반면 닛산은 르노 주식의 15%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 임원들이 ‘딥 스로트’ 역할
문제를 가중시킨 것은 프랑스의 관련 법률이었다. 프랑스 법률에 따르면 닛산은 자사가 보유한 르노 지분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갈등은 2017년 닛산 경영 실적이 르노를 추월하면서 폭발했다. 그해 닛산은 매출 120조 원, 순이익 7조5000억 원을 기록했다. 르노가 같은 해 거둔 순이익 6조8500억 원 중 54%에 해당하는 3조6700억 원이 닛산에서 넘어온 것이었다. 자동차 판매량도 닛산이 580만 대로 370만 대의 르노를 상회했다.이런 가운데 프랑스 정부가 지분 15%를 보유한 준(準)국영기업 르노는 닛산과 경영 통합을 추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 시절부터 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일본인들은 “닛산(日産·일본산업)’을 프랑스 것으로 만들려 한다”며 반발했다.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사이카와 히로토(西川廣人) 전 사장, 가와구치 히로시(川口均) 전 부사장, 도요타 마사카즈(豊田正和) 사외이사 등 6인이 대표적이다. 일본 탈주 후 곤은 이들을 ‘배신자’로 지목했다. 곤의 전격 체포가 가능했던 것은 르노와 경영 통합에 반대하는 ‘반(反)카를로스 곤’ 진영 임원들이 ‘딥 스로트(Deep Throat·내부 제보자)’로서 검찰에 회사 기밀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본 검찰의 무리한 수사도 곤의 탈출에 원인을 제공했다. 곤은 “검사들은 처음부터 유죄로 단정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자백하지 않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까지 추적할 것이라면서 협박과 회유를 했다”고 폭로했다. ‘일본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도쿄지검 특수부는 1948년 쇼와(昭和)전기 사건, 1976년 록히드 사건, 1988년 리크루트 사건, 1992년 사가와규빈(佐川急便) 사건 등 권력형 비리를 파헤쳐 명성을 얻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구속한 전력도 있다.
붕괴 넘어 몰락 거론되는 도쿄지검 특수부
‘도쿄지검 특수부 신화’가 무너진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산케이신문 기자 이시즈카 겐지(石塚健司)는 2010년 출간한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에서 검찰(檢察)이 강압 수사를 일삼는 ‘가찰(苛察·가혹한 검찰)’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곤의 탈출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도쿄지검 특수부는 ‘붕괴’를 넘어 ‘몰락’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이나다 노부오(稻田伸夫) 검사총장, 소구 데쓰야(曽木徹也) 도교지검 검사정(檢事正·검사장 해당) 등 수사 지휘부에 대한 인책론도 힘을 받고 있다.
‘마음의 고향’ 레바논에서 곤은 히로토 전 사장 등 딥 스로트들과 일본 검찰을 상대로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한국(2002년 체결) 외에는 범죄인 인도조약 체결 국가가 전무한 일본의 사법 당국으로서는 곤을 강제 송환해 수사·공판을 재개할 방법이 없다. “차별이 만연하고 기본 인권이 무시되는 부정(不正)한 일본 사법제도의 인질이었다. 불공정과 정치적 박해로부터 도망쳤다”고 주장하는 곤과 “정정당당하다면 돌아와 재판을 받으라”는 일본 사법당국 간 대결의 종착점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