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은 찰(察)이다. 남을 관찰(觀察)하고, 나를 성찰(省察)하며, 세상을 통찰(洞察)하는 도구여서다. 찰과 찰이 모여 지식과 교양을 잉태한다. 덕분에 찰나의 ‘책 수다’가 묘한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 정작 살다보면 이 쾌감을 충족하기가 녹록지 않다. 이에 창간 88주년을 맞는 국내 최고 권위의 시사 종합지 ‘신동아’가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한 시즌(4개월)간 월 1회 씩 책 한 권을 고재석 기자와 함께 읽는다. [편집자 주]
한국 회사에선 나이와 직위가 대체로 일치한다. 상사는 인생 선배로서도 군림한다. ‘현재’ 업무를 지시하면서 ‘나 때는 말이야’를 앞세운다. 동시에 청춘을 예찬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청춘과 청년들이 겪고 있는 청춘은 다르지만 무시할 재간은 없다. 업무 노하우와 빛바랜 격언이 뒤섞인 공간에서 청년은 갈팡질팡한다.
사회는 성장을 멈췄다. 청년에게 더 멀리, 높이 보라고만 할 수 없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 발만 보고 가기에도 숨이 벅차다. 죽어라 노력해 ‘평범’에 수렴하는 인생이 더는 평범하지 않다. 저출산 문제에서도 의견이 극명히 갈린다. 청년 세대는 자기 자식이 자신보다 잘살 거라는 희망이 없다.
다만 청년을 무조건 피해자에 위치시킴으로써 얻는 건 없다. 연민은 독이다. 소량의 독은 항체를 만들지만, 선을 넘으면 치사량이 된다. 마찬가지로 386세대를 절대악으로 설정한다고 세대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 적이 생겨 안심할 뿐이다. 서로 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사회가 공회전할 뿐이다.
386세대와 청년들은 너무도 다른 문화 코드와 사회 조건, 그리고 경험을 지닌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도 판이하다. 386세대에 민주주의는 ‘자유’다. 이들은 자유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란 사실을 깨달은 첫 세대였다. 군부독재와 산업화의 비인간성에 지친 대학생들에게 민주화는 대의이자 과제였다. 그러나 386세대는 자신들이 쟁취한 기득권은 내려놓기 힘들었다. 정치 민주화를 이룬 386세대는 일상에서의 민주화는 달성하지 못했다.
한편 청년 세대가 배운 것이라곤 교과서에 나온 형식적 민주주의가 전부다. 그조차 권리보다는 의무 중심의 교육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한 부모조차 자식들에게 ‘일단 성공’을 강요했다. ‘안정’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음을 경험으로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386세대가 퇴장한다고 지금 청년들이 그 자리를 꿰찰 거란 발상은 순진하다. 청년을 닦달한다고 사회가 나아질 거란 기대도 비현실적이다. 한국 사회 불평등의 이유를 세대에서 찾은 시각은 유의미하지만, 해법까지 386세대에서 찾을 수는 없다. 지금 청년 세대가 기득권이 돼도 다른 형태의 사회 불평등이 발생하지 않는 구조가 필요하다. 물론 힘에는 책임이 따르듯, 기득권의 자발적 양보와 협력 의지는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