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품명가(品茗家) 손성구씨는 차기(茶氣)만으로 차의 품질을 알아내며, 차 한 모금으로 비료를 사용했는지 아닌지 간파한다. 1982년 우연히 중국차를 마신 후 차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오다가 품명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손씨. ‘차는 곧 수행’이라는 그는 “마음이 고요하고 에고가 없어야 진정한 차 맛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품명가 손성구씨에게 차는 참선이나 명상 같은 수행법이라고 한다.
차의 출신성분, 족보 꿰뚫어야
국내의 품명가를 수소문해보았다. 도대체 그 수많은 차 중 어떤 차가 좋은 차이고 차 맛은 각기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품명가가 바로 손성구(42)씨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국내에 몇 안 되는 품명가 중 한 사람이다.
차 전문가라는 말을 듣고 지리산의 그윽한 골짜기에 살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그의 거처는 서울 강남 서초동의 12평 짜리 조그만 오피스텔이었다. 사바 세계의 한가운데서 차 맛을 즐기고 사는 한량이랄까. 한량은 인생의 맛을 아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은 매연 맛만 보고 사는데 그는 차 맛을 보고 산다. 차 맛을 안다는 사실 하나로도 그 삶의 질이 어떠한가를 추론해낼 수 있다.
손씨의 체격은 보통이었지만 눈이 인상적이었다. 야간 등대에서 나오는 탐조등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품명가 소리를 들으려면 차에 대해 어느 정도 감식력을 가져야 됩니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차에 비료와 농약이 들어갔는지 구별해내는 일입니다. 비료와 농약이 안 들어간 차는 일단 좋은 차입니다. 하지만 요즘 차를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비료와 농약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비료나 농약이 들어가면 차의 색깔이 투명합니다. 비료가 들어가면 차 맛이 미끄덩거린다고 할까, 맛이 텁텁합니다. 음식점에서 조미료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느낌과 비슷한 거죠. 농약이 들어가면 목이 따끔거리거나 아리아리합니다. 비료나 농약이 들어간 차를 마시면 몸의 순환이 막혀요. 예민한 사람이라면 머리가 꽉 막히거나 척추와 등이 굳어지는 느낌을 갖기도 합니다. 반대로 화학첨가물이 없는 차를 먹으면 몸의 순환이 잘 되는 게 느껴집니다.
다음으로 차의 맛만 보고도 어느 지역에서 생산됐는지, 해발 몇 미터 높이에서 자랐는지, 차를 수확하던 해에 비가 얼마나 왔는지, 어느 정도 온도에서 자란 잎인지, 차를 익힐 때 적당하게 덖었는지(볶듯이 익히는 것), 전문가가 덖었는지 아마추어가 덖었는지 등등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차 한잔에 그 차의 출신성분과 족보를 꿰뚫어야 합니다.”
중국 차 맛보기 위해 박람회 참석
-감별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소개해주시죠.
“한번은 지방에서 감정을 해달라고 두 종류의 녹차를 보내왔습니다. 맛을 보니 하나는 ‘세작(細雀)’으로 비료와 농약을 사용한 차였고 다른 하나는 ‘우전(雨前)’으로 농약은 사용하지 않고 비료만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전에 사용된 비료가 매우 섬세할 뿐 아니라 다른 것과는 맛이 달랐습니다. 비료를 쓴 것 같기는 한데 맛이 좀 색다르다고 했더니, 차를 보낸 측에서 우전을 따기 전에 영양제를 투입했다고 하더군요. 영양제 맛이라서 다른 비료하고는 약간 달랐던 거죠.
중국에 갔을 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중국 차를 맛보기 위해 차 박람회에 꼭 참여합니다. 차 박람회에는 중국 각지의 차가 모이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수십 종류의 차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죠. 중국의 내로라하는 차 전문가들과도 조우하게 됩니다. 제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어떤 사람이 저를 테스트하더군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든 15가지의 보이차(普햔茶)를 우려 놓고 생산지와 제조방식을 말해보라는 겁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물러서자니 체면이 상할 것 같아 감별에 응했습니다. 맛과 차기(茶氣)만 가지고 15가지 보이차의 생산지가 어디인지를 말했습니다. 세 곳은 틀리고 열두 곳은 맞췄어요. 80%는 맞춘 셈이죠. 보이차는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어떤 감이 전해져 옵니다. 저는 그 감을 차기(茶氣)라고 표현해요. 차기를 접하는 순간 이 보이차가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간파할 수 있죠.
3년 전 중국 원난(雲南)성 쿤밍(昆明)에서 제1회 보이차 박람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원난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왔어요. 제가 한국의 품명가라고 하니까 똑같은 모양의 보이차 두 덩어리를 제게 주면서 어떤 것이 좋은 제품인지 감별해보라고 하더군요. 물론 좋은 제품을 맞췄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길래, ‘만져보면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역시 차기를 감지한 결과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중국에는 타이후(太湖)라는 큰 호수가 있습니다.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호수죠. 타이후 근처에는 둥팅산(洞庭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거기서는 녹차 계열의 벽라춘(碧螺春)이라는 유명한 차가 생산됩니다. 차를 우려낸 빛깔은 선명한 벽록색이고 어린 차의 싹과 잎은 여린 비취빛이며 잎의 모양은 소라고둥처럼 나선형입니다.
둥팅산 벽록봉 아래에서 난다고 해서 벽라춘이라 이름 붙였어요. 그런데 이 둥팅산은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으로 나눌 수 있어요. 같은 벽라춘이더라도 동산에서 나온 것을 극품(極品)으로 칩니다. 동산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라 일조량이 더 많기 때문이죠. 그 정도로 미세한 차이, 즉 햇볕의 강도 차이가 차 잎의 성숙에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둥팅산에서 차를 재배하며 자란 친구가 제게 벽라춘을 주며 맛을 보라고 하더군요. 맛을 보니 동산 것이 아니었어요. ‘이건 동산이 아닌 서산 것 같다’고 하니 그 친구가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하더군요. ‘서산 것이 맞다’고 인정한 뒤 비로소 동산에서 난 벽라춘을 제게 주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처음부터 극품을 내놓지 않아요. 밑에서부터 내놓죠. 그러면서 상대방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이 친구가 차 맛을 제대로 아는가 살피는 거죠. 모른다고 생각되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고 알면 차츰 좋은 상품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극품을 내놓습니다.
참고로 극품의 차는 시장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상품화하지 않고 차를 아는 사람들끼리만 소비하죠. 밖에 내놓아봤자 일반인들은 그 차의 진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차에 몰입한 경지를 어떻게 나눕니까.
“품명가에게는 4단계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청명(聽茗), 청호(聽壺), 청신(聽身), 청심(聽心)이 그것입니다. 청명은 차를 마시기 전 차 잎을 만지거나 눈으로 보고 아는 경지를 일컫습니다. 안보고도 알 수 있으면 더욱 깊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죠.
청호는 차 잎이 다호(다관)에서 우려질 때 그 소리를 듣고 아는 경지입니다. 다호 안의 상태와 차를 우리는 사람의 마음이 상응하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청호를 알면 이 차가 어느 정도 우려졌는지 직감적으로 압니다. 최적의 타이밍에 차를 찻잔에 따를 수 있는 거죠.
청신은 차가 내 몸에서 폐를 돕는가, 간을 보강하는지를 아는 경지입니다. 즉 차 한잔이 오장육부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꿰뚫는 단계죠.
청심은 차를 마시면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즉 슬퍼지는가, 기뻐지는가, 화평해지는가 등을 인식하는 경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청호가 4가지 차원 중 가장 깊은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차를 마실 때는 청호라는 단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지금도 어렴풋하게 짐작할 뿐이죠. 청호가 다구(찻주전자) 속에서 차가 우려지는 소리를 듣는 경지라는 것은 제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제가 체험해보니 그런 것 같았어요. 몇 년 전 중국에서 나이 지긋한 품명가를 한 분 만났습니다. 청호가 어떤 경지인가에 대해서 토론이 오갔습니다. 제가 청호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니까 그 사람이 제게 극상품의 차를 한 봉지 선물하더군요. 공감했다는 표시였죠.”
손씨는 이 4단계의 바탕이 ‘관(觀)’이라고 주장한다. 관이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관의 의미다. 즉 관조(觀照)가 그 핵심이라는 것. 무슨 말인가. 차의 깊은 경지는 관조라는 뜻이다. 자세히 풀어보면 이렇다. 차의 맛을 느끼려면 우선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요동치면 미세한 차의 맛이 혀로 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카드 빚에 쫓기는 사람이 어떻게 벽라춘의 무심하게 퍼지는 미묘한 맛을 감지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바쁘거나 출렁거리는 사람은 차의 맛을 느낄 수 없다.
그 다음에는 자기를 비워야 한다. 에고(ego)를 없애야 차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자기 주장이 강하면 상대의 이야기를 100% 수긍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를 비워야 차 자체에 몰두할 수 있다. 이처럼 한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 자기를 비우는 작업으로 전환되면 그것이 바로 관이 된다. 관이 깊어지면 그 차를 덖었던 사람의 공부상태 또는 심리상태까지 역추적할 수 있다고 한다.
같은 차라도 어느 찻잔에 담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다. 손씨는 1200。C 이상에서 구워낸 다구가 좋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성구씨의 차 철학을 들으며 ‘현대인은 차 맛을 제대로 알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사는 게 정신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차를 알겠는가. 차를 알기 위해서는 백수건달이라도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건달이 되면 극품의 차를 구입할 돈이 없을 게 아닌가. 돈 있는 사람은 바빠서 차 맛을 알 수 없고, 건달은 차 맛은 알지만 돈이 없어서 차를 살 수 없으니 어쩌면 이다지도 세상살이는 진리와 반비례하는 것인지.
손씨는 1982년 처음 차와 인연을 맺었다. 고려대 중문과 1학년 때 우연히 대만으로 유학간 선배들이 선물로 놓고 간 중국차를 마시게 됐다. 이때부터 처음 5년 동안 그는 무턱대고 차를 마셨다고 한다. 단지 ‘차가 맛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음 10년은 차를 쫓아다녔다. 좋은 차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디든 가보았다. 이 시기 처음 몸이 열렸다고 한다. 몸의 경락이 열리면서 각각의 차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운이 몸으로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 다음 5년은 차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는 시기였다. 이론의 핵심은 차는 몸에도 좋고 수행에도 좋다는 것. 아울러 차의 역사를 공부하고 유적지도 답사했다. 특히 초의선사의 행적지를 주로 따라갔다. 그가 머물렀던 곳이면 거의 다 찾아가 어떤 물을 사용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 강진의 다산초당, 지리산 칠불사 등이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다산 선생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우연한 계기로 다산 선생의 생가가 있던 경기도 양수리 마재마을에서 5년간 거주한 적이 있다.
차를 좋아했던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를 따르던 제자 18명이 차를 매개로 신의를 다지자는 취지로 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계의 이름은 ‘다신계(茶信契)’. 다신계 회원들은 돈을 모아 전남 강진에 차밭을 구입했다. 강진에서 차를 수확하면 회원들은 이 차를 마재마을로 가져와 마시곤 했다. 추사가 초의에게 “왜 차를 안 보내느냐”고 독촉했던 배경을 추측해보면, 추사도 다신계의 멤버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산의 친동생 정약종과 영조의 사위 홍현주도 다신계 회원이었다.
다신계 회원들이 주로 회동하던 장소가 바로 마재마을. 어떻게 보면 한국 차의 성지인 셈이다. 그런 마재마을에서 5년간 살 수 있었던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손씨는 “전생에 다신계 멤버 아니었겠냐”며 허허 웃었다.
중국 베이징대에서 유학했고 회사 생활도 몇 년 해봤지만 결국 그는 프로 품명가의 길에 들어섰다. 본인 말처럼 전생에 다신계 멤버였다면 납득이 가지만 어쨌든 매우 독특한 팔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누가 시킨다고 가는 인생행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고지대에서 자란 차가 명품
어떤 차가 명차(名茶)인가. 손씨가 말하는 명차의 조건과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산지대에서 자란 차가 품질이 좋다. 높은 곳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데다가 안개가 많이 낀다. 안개는 차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차에는 수분이 필요한데 안개가 은은하게 수분을 보충해주기 때문. 우리나라 지리산의 화개차가 품질이 우수한 것도 안개 덕분이다.
또 고산 지대의 차 잎이 알차다. 기온이 낮으면 차 잎의 밀도가 촘촘해지기 때문. 차 나무가 서식할 수 있는 고도는 보통 해발 2500m라고 하는데,고도가 높은 곳에서 자란 차일수록 명품으로 친다. 히말라야의 ‘설차(雪茶)’는 매화처럼 눈 속에서 자라다가 3개월이라는 짧은 봄 동안 설산의 모든 기운을 머금고 생산된다.
두 번째 조건은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제조과정에서 명인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재료라도 누가 만들었느냐가 중요하다. 차는 섬세한 물건이라 어떤 사람이 덖느냐에 따라서 품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중국의 10대 명차는 서호용정(西湖龍井), 안계철관음(安溪鐵觀音), 몽정차(蒙頂茶), 벽라춘(碧螺春), 황산모봉(黃山毛峰), 백호은침(白毫銀針), 동정오룡(凍頂烏龍), 군산은침(君山銀針), 기문홍차(祁門紅茶), 운남보이차(雲南普햔茶)이다. 이 선별은 대만의 차학과 진문회(陳文懷) 교수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차만 좋으면 되는가. 아니다. 물도 좋아야 한다. 어떤 경우는 물맛이 차 맛을 좌우하기도 한다. 아무리 하품 차라도 물이 좋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깊은 차 맛을 느끼려면 일품의 물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손씨는 자동차에 항상 5∼6개의 20ℓ짜리 물통을 가지고 다닌다. 물이 좋은 곳이 있으면 꼭 1통씩 떠와 차를 우려 시식해본다. 이렇게 10년 동안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물맛을 보았다. 이젠 물맛만 보고도 찻물에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어느 곳의 물이 좋습니까?
“제 경험에 의하면 경기도 양주군 운길산 수종사(水鍾寺)의 석간수, 지리산칠불사(七佛寺) 물, 경남 창원의 우곡사(牛谷寺) 물, 강진 다산초당 옆의 샘물, 전주 송광사(松廣寺) 물이 좋았습니다. 전주 송광사 물은 ‘영천(靈泉)’이라고 해서 아주 좋았는데, 누가 수맥을 건드렸는지 근래에 물이 안 좋아졌어요. 수종사의 물은 석간수인데 참 좋습니다. 다산 선생 생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데, 다산 선생을 비롯한 다신계 회원들이 이 물을 사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다만 수량이 적은 것이 흠이죠. 그에 비해서 칠불사나 우곡사의 물은 콸콸 솟아나므로 수량이 풍부합니다. 저는 요즘 주로 칠불사의 물을 사용합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20ℓ짜리 물통 20개 정도를 가지고 칠불사에 갑니다. 그 물을 옹기 항아리에 넣어두면 한 달이 지나도 상하지 않아요.”
좋은 물과 좋은 찻물은 달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약수와 차에 좋은 물은 같습니까.
“약간 다릅니다. 차를 우리기에 가장 좋은 물은 자기의 성질을 드러내지 않는 물입니다. 개성이 강한 물은 차 잎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향기와 맛을 훼손할 수 있어요. 자기 색깔이 없어야 차의 개성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죠. 이런 점에서 볼 때 수종사 물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좋은 물입니다. 칠불사나 우곡사 물도 그런 편이고요. 태백의 검용소 물도 찻물로 괜찮습니다.
반대로 개성이 강한 물은 오대산의 방아다리 약수입니다. 철분이 많아서 약간 누렇게 보입니다. 이런 물은 찻물로 절대 금물입니다.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물도 사람 몸에는 좋은 약수지만 찻물로는 좋지 않아요.
지리산에서 최고의 물로 불리는 유천수(乳泉水)도 찻물로는 별로입니다. 좋은 물은 물의 분자구조가 아주 작아요. 그래야 몸에서 흡수가 잘 되거든요. 그런데 유천수는 분자구조가 아주 작아서 입에 들어가면 가슴부위를 지나는 도중 모두 흡수되어버립니다. 아랫배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흡수되어버리는 거죠. 유천수는 물로는 최고지만 찻물로는 적합하지 않아요. 차의 성분을 모조리 끄집어내니까요. 찻물로는 전부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적당히 끄집어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몇 번을 우려먹을 수 있죠. 한번에 몽땅 끄집어내면 재탕이나 삼탕일 때 맛이 확 떨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유천수 같은 물은 한약재를 다릴 때는 아주 좋습니다. 한약재에 함축되어 있는 약성분을 모조리 끄집어내기 때문이죠.
차와 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극품의 차는 물의 구조를 바꾸기도 합니다. 반대로 물이 좋으면 차가 떨어지더라도 차 맛을 올려줍니다.
그리고 물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물이 지하에서 흐르다가 강한 자력 기운이 있는 곳을 통과하면 에너지가 생기는데 물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어요. 그래서 명혈(名穴)에는 수맥이 감싸고 있죠. 명당에 물이 있어야 하는 이치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이 있어야 명당의 기운을 바깥으로 흩어지지 못하게 감싸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광주산맥 줄기에서 나오는 물들이 찻물로 좋습니다. 나옹대사가 머물렀던 회암사(檜岩寺)도, 광주산맥 끝자락에 있는 운길산 수종사도 이 줄기에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운길산 앞의 강 너머는 물맛이 다르다는 겁니다. 강 하나 사이지만 물맛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어요. 산맥이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은 이처럼 미묘한 것입니다.”
손씨는 차와 음식 사이에 궁합이 있다고 설명했다. 회를 먹을 때는 약(弱)발효 우롱차가 맞는다고 한다. 우롱차는 따뜻한 성질이 있고 회는 찬 음식이므로 서로 중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불고기를 비롯한 육류는 보이차나 홍차, 중(中)발효 우롱차가 좋다. 소화를 도와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무이산(武夷山) 암차류(岩茶類)에 속하는 대홍포나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녹차도 육류에 좋다.
녹차는 이상단백질을 해독시키는 작용을 한다. 한국의 녹차는 중국의 최고품 녹차와 대등할 만큼 품질이 좋다. 된장, 김치와 같은 짙은 냄새가 나는 음식을 먹은 후에는 화차(花茶)가 좋다. 자스민 차가 화차에 속한다. 화차는 진한 향기가 있어서 음식냄새를 중화시켜준다.
필자와 손씨가 다담(茶談)을 나눈 곳은 서울 한가운데 있는 12평짜리 오피스텔이었다. 왠지 격조 있는 다담이 너무 세속적인 곳에서 이루어진 감이 있다. 지리산 칠선계곡의 그윽한 어느 산방(山房)에서 물소리를 들으면서, 아니면 쑤저우(蘇州)의 어느 사대부 원림(園林)에서 석산(石山)을 보며 나누어야 할 이야기를 오피스텔이라는 지극히 드라이한 공간에서 주고받았다는.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이 또한 21세기 서울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대은(大隱 : 크게 숨는 일)은 시은(市隱 : 시장에 숨는다)’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필자는 6∼7시간 동안 그가 선보이는 중국의 다양한 명품 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대략 100여잔을 마신 것 같다. 봉황단총(鳳凰單叢)에서 송종단총(宋種單叢)을 거쳐 벽라춘, 철관음, 황산모봉을 두루 섭렵했다. 봉황단총은 맛과 향이 화려해서 귀족의 기품이 연상됐다.
반대로 송종단총은 시골처녀와 같이 소박하고 수수했다. 화려함이 내면으로 들어간 맛이다. 철관음을 먹으니 그 향기에 취해 산과 계곡에 들어온 것 같다. 황산모봉은 양기가 아주 강하다. 입안이 화끈거리는 것 같다. 도가의 양생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황산모봉을 좋아했다고 한다.
극품 차를 먹고 나니 한참 후에도 뒷맛이 계속 유지됐다. 식은 차를 먹어도 맛이 있었다. 좋은 차는 식어도 맛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차를 마시면서 어느 찻잔에 마시느냐에 따라 차 맛이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찻잔에 따라 같은 차라도 맛이 변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손씨의 설명에 의하면 다구(茶具)는 1200℃가 넘는 온도에서 구워내야 제대로 된 것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야 흙에 들어 있는 화합물이 모두 녹기 때문. 그렇지 않으면 찻잔의 불순물이 차에 녹아나와 몸에 해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찻잔은 무엇이 다른가. 손씨는 “정확하게 중심이 잡혀 있는 점이 일반 찻잔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일본 무사들이 다완(찻잔)을 생명처럼 여긴 이유는 다완을 손에 들고 있으면 다완 내에 중심이 생기고 단전에 힘이 집중되기 때문이었다. 다완을 두 손으로 잡아서 힘을 주어보면 단전으로 집중되는 잔이 있고 분산되는 잔이 있다. 일본의 무사들은 단전의 힘을 중시했다. 칼싸움을 할 때 힘이 단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좋은 다완을 가지고 있으면 평소에도 단전으로 힘을 모으는 훈련을 하는 셈이 된다. 이번에는 다식(茶食)에 대해 물어보았다.
차 속에도 우주가 있다
-왜 다식을 하는 겁니까.
“옛날 차는 9증9포를 했습니다. 9번 덖었다가 말리는 과정에서 차의 독성을 빼낸 거죠. 그래야 영약이 됩니다. 하지만 웬만한 차는 9증9포 도중 부서지거나 타버립니다. 야생의 차 잎이라야 9번을 견딥니다. 재배한 차는 못 견디죠. 요즘에는 9증9포가 드물어요. 하지만 2∼3번 정도만 덖으면 차독이 남습니다. 그 차독을 빼내기 위해 다식을 먹는 겁니다. 돼지고기를 먹고 난 후 새우젓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새우젓이 바로 다식이죠. 다식으로는 연근과 밤이 좋습니다. 위를 보호하는 작용을 해요.”
차 도사 손성구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 속에도 우주가 있음을 알게 됐다. 선승으로 알려진 조주선사는 누가 진리에 대해서 물어보면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차나 한잔 하고 가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손씨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의미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시간 그와 다담을 나눈 뒤 혜어질 무렵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하나 날렸다.
-항산(恒産)에 항심(恒心)이라고 합니다. 항산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직(恒職)은 있어야 항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품명가라는 명함을 가지고 서울에서 먹고 살 수 있습니까.
“욕심만 내지 않으면 그럭저럭 먹고삽니다. ‘둠벙(물웅덩이) 파놓으면 개구리 뛰어든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요즘 조그만 둠벙을 하나 파 놓았습니다. ‘중국차 즐기기(www.teancha.com)’라는 사이트가 바로 그 둠벙입니다. 어떻게 되겠지요, 뭐!”
하긴 항산은 무엇이고 항직은 무엇인가. 그것이 인간이 항심을 지키고 사는데 꼭 필수적인 것일까. 항심을 지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손씨는 행복해 보였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강남대로의 인파 속을 헤집고 나오는데, 입 속에는 남들이 모르는 철관음의 향기가 어금니까지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