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벽안(碧眼)의 아내를 뒀다. 유럽에서 온 영부인은 남편과 아들을 하늘 받들 듯했고, 콩비지를 즐겨 만들었다. 한복을 즐겨 입던 그의 말년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 할머니였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뜰히 가꿔온 이화장에서 며느리 조혜자 여사를 만났다.
방문 당일 이화장의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역사 기념물이니 일반에게 공개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문 앞에서 조 여사에게 연락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 여사가 문밖까지 나와 반가이 맞았다. 이화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조 여사에게 이화장 문이 닫혀 있는 이유를 물었다.
“20년 가까이 문을 열고 살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문화재 방화나 약탈 사건이 많아서 문을 닫고 살아요. 신원을 확인한 뒤에야 들어오게 해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역사의 현장을 공개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조 여사는 인터뷰를 제대로 하려면 우선 이화장을 관람해야 한다며 곳곳을 안내했다.
이화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던 사저(私邸)다. 이 전 대통령 내외는 광복 후 귀국해 1947년 겨울부터 이화장에 머물렀다. 이승만 박사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화장을 떠났다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다시 돌아와 1960년 4월28일부터 5월29일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생활했다. 이화장은 1982년 12월28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됐다. 건평 230㎡ 규모로 안팎의 본관,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組閣)을 발표했던 조각정(組閣亭), 유족들의 거처인 생활관으로 이뤄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화장 정문 앞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고 한다. 뒤에 대군의 저택은 장생전(長生殿)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 전 대통령이 조각을 발표할 당시에는 그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조 여사는 이화장의 연혁을 간단히 설명한 후 본관으로 안내했다. 본관에는 이 전 대통령 내외의 유물이 진열돼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쓰던 몽당연필, 스크랩북, 안경집, 모자, 옷을 비롯해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기워 입힌 손자들의 내복, 종이박스로 된 옷장, 부엌의 낡은 찬장과 놋그릇 등 이 전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또한 1919년 6월 세계 각국에 우리의 독립을 통보한 외교문서, 김규식에게 내린 지령문, 이 전 대통령의 활동사진 등 대한민국 건국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역사자료도 가득했다.
대통령의 양자
본관 안내를 마치고 뜰로 나오며 조 여사는 이화장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화장은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고, 근검절약의 교육장이에요. 탈북자들이 이화장에 오면 편안함을 느낀대요. 옛날에 중앙정보부에서 많이 데리고 왔는데, 우리 집에 기운 내의며 고쳐 쓴 냄비 같은 게 많다 보니 자기네들이 살던 처지와 비슷해 친근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50년 전의 모습에서 고향을 느끼는 거죠. 우리 동포 모두가 고향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화장이에요.”
이화장에 대한 조 여사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또 그만큼 안타까움도 크다고 했다.
“이화장은 서울시기념물로 등록돼 있지만 관리비 같은 게 전혀 나오지 않아요. 시어머님 생전에는 시어머님 앞으로 나오는 연금과 제 남편 월급 대부분을 이화장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데 써야 했습니다.”
돈보다 나라의 무관심이 더 딱해 보였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만이 무너져 내린 지붕을 보수하라며 돈을 보냈을 뿐이라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 후 이화장을 찾았지만, 영부인 중에는 어느 누구도 찾아온 사람이 없다.
40분 남짓 이화장을 둘러보고 본관 한켠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풀벌레 소리를 벗한 자연 속에서 조 여사는 지난 세월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주 바빠요. 남편 비서 일부터 주방장에다 운전기사 노릇까지 해요. 보시다시피 우리 집은 생활범위가 무척 넓지만, 일하는 사람 없이 제가 다 해요. 5월11일에는 주한 외국 대사 부인들을 초청해 이화장을 보여주고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열었어요. 다들 아주 좋아하더군요. 그런 행사 준비도 하고, 봐야 할 책도 많고, 시아버님, 시어머니 기사 나오면 스크랩도 해야 하고…. 외국에서 오시는 손님도 많아요.”
-곧 외국에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와이에 가요.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의 근거지인 한인기독교회에 갑니다. 광화문을 본뜬 건물로 헌당식을 한다고 해서요. 닷새쯤 머물 예정이에요. 헌당식은 하와이 시간으로 6월3일 오후 5시에 하고요.”
-부군인 이인수 박사는 1961년 전주 이씨 종친회 추천으로 양자로 입적되신 걸로 압니다. 그때 이야기를 좀 자세하게 해주시죠.
“당시 하와이에서 지내시던 시아버님께서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양자를 원하셨죠. 이순용씨라고 내무부 장관을 지낸 분이 계셨어요.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고 전주 이씨예요. 시아버님께서 그분을 하와이에서 우리나라로 보내 전주 이씨 중에서 시아버님 조카뻘 되는 사람을 양자로 물색케 하셨어요. 제 남편은 양녕대군 17대손이고 시아버님은 16대손이셨어요.”
-대통령의 양자가 되는 만큼 조건도 까다로웠을 것 같은데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우선 집안을 운영할 만한 나이가 되는지 봤지요. 학력도 보셨어요. 제 남편은 고려대 경영대학과 대학원을 나왔고 영어도 좀 하셨죠. 그리고 생가 시아버님이 양주 교육감이셨어요. 어느 정도 좋은 집안이라야 했거든요. 또 한 가지, 제일 중요한 조건은 장가를 안 간 총각이어야 했어요. 그래야 며느리를 고를 수 있으니까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 머물던 1961년,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종친회는 이인수 박사를 추천했고, 이 박사는 그해 하와이로 건너가 이 전 대통령 내외에게 인사를 올렸다.
“세금도 못 낸다는 이화장에 시집갈래?”
이화장에 전시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물들.
-이 박사와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저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에 스위스에 갔어요. 그곳에서 페스탈로치 아동촌 교사 겸 중앙일보 스위스 통신원으로 활동했죠. 그때 제네바 대사이던 한표욱 대사를 알게 됐는데, 그분은 시아버님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주미공사도 지내셨어요. 시아버님의 심복이셨던 셈이죠. 그분의 중매로 1966년 국내에 들어와서 남편을 만나게 됐어요. 결혼은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3년상(喪)이 끝나고 했어요. 1968년에 했죠.”
-대통령 며느리가 된다고 하니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친정어머님이 좀 꺼리셨어요. 당시 이화장은 세금도 못 낸다고 하고, 조각당이 무너졌다고 했으니까요. 좋지 않은 말이 많이 나도니까 고생할까봐요. 그리고 어깨의 짐도 무겁고, 시어머님이 외국 분이셔서 모시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셨던 거죠.”
-대통령 며느리로서의 삶은 어땠습니까.
“솔직히 편안한 삶은 아니죠. 늘 조심하면서 살았어요. 하지만 보람 있는 삶이었어요. 국내외의 훌륭한 분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오스트리아의 오토 합스부르크 황태자 내외분이라든가 김옥길 총장님, 김활란 박사님 등 우리나라 여성 지도자들이며, 이범석 장군 내외분, 우리나라 심장병 어린이들을 많이 도와주고 가신 하지스 내외분, 연세대를 세운 언더우드가(家) 분들, 청량리 위생병원의 로고 박사님, 그밖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도왔던 분들, 건국기 유엔대표로 와서 도움을 주신 분들…. 본받을 만한 분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대통령 며느리로 살면서 힘들었던 점이라면.
“아무래도 여느 며느리보다야 고달프죠. 대통령 영부인을 시어머님으로 모시며 이 큰 살림을 꾸려야 했으니까요.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은 못 됐어요. 우리 남편이 대학 학장까지 지내셨지만 여유 있는 편이 못 돼요. 저희 집안의 가훈이 안빈낙업(安貧樂業)이에요. 왕족의 후예로서 선비 정신과 지조를 지키며 사는 걸 미덕으로 삼죠.”
프란체스카(Francesca Rhee·1900 ~92) 여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이다. 한국 이름은 이부란(李富蘭). 오스트리아에서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스코틀랜드에 유학해 국제통역사와 속기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1933년 2월 독립운동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한 이 전 대통령을 레만 호반의 호텔 ‘드 라 뤼시’ 식당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7월 빈에서 청혼을 받은 후 다음해 10월8일 뉴욕 몬트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뒤 망명생활을 하는 남편을 12년 동안 뒷바라지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한국에 왔다. 1948년 이후 영부인으로 6·25 전쟁과 4·19 혁명 등 격동기를 겪었고, 이 전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길에 동행해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병상을 지켰다. 사별 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겨가 살다가 1970년 한국에 영구 귀국해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일국의 영부인이었지만 사회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는 대통령에게 집착하며 ‘인의 장막’을 쳐 국정운영을 그르치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영부인의 역할 유형을 6가지로 나눈 고려대 함성득 교수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베갯속 내조형’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평판에 대해 조 여사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반박했다.
“시어머님께서 국회 부의장을 지낸 임철호 비서관에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다 시아버님께서 흥분하면 혈압이 높아질까 걱정했던 거죠. 그 말을 듣고 임 비서관은 비서직에서 물러났어요. 그러자 시아버님께서 다시 임 비서관을 경무대로 불렀죠. 시아버님이 아내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아내 때문에 나간 사람을 다시 불러오셨을 리 없죠. 저희 시어머님은 절대 시아버님 일에 참견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곁에서 조용히 돕기만 했습니다.”
조 여사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한국의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 한국적’이라고 추억했다.
-1970년부터 1992년 3월19일 별세할 때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사셨죠. 프란체스카 여사의 평소 생활은 어땠습니까.
“시어머님은 늘 기도를 열심히 하셨어요. 우리나라의 집 없는 서민들이 다 집 갖게 해달라고, 우리 동포들이 배고프지 않게 해달라고…해외에 있을 때부터 늘 기도하셨어요.”
-고부 간의 갈등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저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셨어요. 물론 아들과 손자를 더 사랑하긴 했지만(웃음). 시어머님께는 남아선호사상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님도 딸만 셋인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셨어요. 그래서 당신의 친정아버님이 아들이었으면 하고 바라셨대요. 아들, 손자가 우선이고 며느리는 꼴등이었어요. 하지만 갈등은 없었죠.”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남편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가계부를 썼어요. 10년 동안 보름마다 시어머님께 가계부 검사를 받았어요. 지출을 줄여야 할 항목에는 빨간 줄을 그어주셨죠. 가계부를 매일 쓰라고 하셨는데 그게 좀처럼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검사가 있는 전날 밤에는 밤을 새워가며 정리했죠. 그게 힘들어서 남편이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돌아왔을 때 ‘교섭’을 좀 해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시어머님이 저를 불러 ‘가계부 쓰기 싫다고 했다며?’ 하시길래 ‘예’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럼 앞으로 수도세, 전기세, 기름값은 너희 남편 월급에서 제한다’고 하셨어요. 저는 ‘좋다’고 했어요. 일단 시험 안 보니까 좋잖아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니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전기세, 물세 등이 신경 쓰이더라고요.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정원에 물을 많이 썼는데, 수돗물 절약하라고 잔소리하게 되더군요. 당시 저희 집 자동차가 6기통이었는데 기름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차 쓰는 것 갖고도 잔소리를 했죠.”
-문화적 격차 때문에 어려움을 겪진 않았습니까.
“오히려 시어머님이 저보다 더 한국적이셨어요. 이를테면 시어머님은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남편 앞으로 쓱 밀어놓으세요. 그리고 우리 집은 댓돌에다 신발을 벗어놓는데, 시어머님이 겨울에는 남편 신발을 집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하셨어요. ‘머리는 서늘하게 하고 발은 항상 따뜻하게 해야 한다’면서. 한번은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남편이 사레들려 기침을 마구 했어요. 그랬더니 시어머님께서 ‘네가 이 달에 열일곱 번이나 구두를 안에 들여놓지 않아서 감기가 들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시어머님께서 남편 신발이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正’자를 써가며 확인하셨던 거예요. 시어머니 방에서 내다보면 댓돌이 보이거든요. 아들을 그렇듯 하늘처럼 받들었죠.”
시부모 장수 비결은 이화장 음식
-손자 사랑은 어땠나요.
“남편이 박사학위 받으러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저 혼자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어요. 바깥일은 제가 주로 하고 시어머님은 아이들을 가르치셨죠.
한번은 큰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생일 파티가 있다기에 갔어요. 토마토를 한 쪽씩 나눠주더군요. 그런데 안 먹고 남긴 아이들 토마토를 큰애가 다 먹는 거예요. 그래서 데리고 오면서 왜 남이 남긴 음식을 먹냐며 야단을 쳤어요. 그날 밤 아이가 왜 그랬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시어머님께선 손자들에게 간식을 해주고 먹다 남긴 게 있으면 다 잡수셨어요. 그걸 보며 자란 큰아이가 그대로 한 거예요.
또 언젠가는 학교 대표로 대구 연수원에 합숙을 하러 갔어요. 갔다 오더니 큰애가 아이들이 이상하다고 그래요. 연수원에서 선짓국이 나왔는데, 애들이 숟가락을 놓고 도망가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그걸 다 먹었다는 겁니다.”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화장 음식이 건강식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시아버님은 아흔, 시어머님은 아흔둘에 돌아가셨는데, 장수의 비결은 이화장 음식이죠. 두 분 다 기름기를 멀리하고 콩과 두부를 즐겨 드셨어요. 그리고 물김치, 된장찌개, 콩자반, 산채, 생선구이에 현미, 보리, 콩 등을 섞은 잡곡밥은 건강식으로 더할 나위가 없죠. 한마디로 우리집 음식은 한국적이에요. 우리 토속 음식이 최고의 건강식이죠. 임진우 박사라고 유명한 심장병 전문의가 있는데, 그분이 우리 집 음식이 최고의 건강 장수식이라고 인정했을 정도입니다.”
이화장 음식의 맛을 내는 비결은 새우젓에 있다. 찌개에도 고기 대신 새우젓을 넣어 담백하게 끓여낸다. 이 전 대통령이 새우젓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다 보니 프란체스카 여사도 새우젓을 이용해 음식 맛을 내는 비법을 나름대로 터득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외국 국빈들을 접대할 때도 새우젓 넣은 찌개를 상에 올렸다고 한다.
이화장 요리 중 비지찌개는 빼놓을 수 없는 건강장수식이다. 이화장의 비지찌개는 반드시 두부를 걸러낸 비지로 만든다. 그래야 비지의 제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애호박전, 당근전, 광어살지짐, 냉이나물, 청포묵무침, 콩나물잡채, 닭찜, 닭다리고추장찜, 무구절판, 북어무침과 다시마튀김도 대표적 건강식이다. 특히 죽순, 밤, 잣, 은행, 표고, 대추를 넣은 닭찜은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또 제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 무시래기 나물, 시래기 된장국, 추어탕, 냉콩국은 계절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건강영양식이다. 여름에는 밀기울과 함께 빻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자주 해 먹는다. 간식으로는 약과와 튀각, 약식을 주로 먹는다.
여러 음식 중 이화장의 백미는 손수 만들어 먹는 두부다. 조 여사는 맛난 손두부 만드는 비법을 살짝 공개했다. 우선 두부콩을 물에 충분히 불려 가정용 맷돌에 곱게 간 후 발이 고운 주머니에 넣고 콩물만 받아낸다. 다음으로 콩물을 불 위에 올려놓고 저으면서 끓인다. 끓어 넘치려 하면 찬물을 끼얹기를 두 번 하고, 세 번째 끓어 넘치려 할 때 불을 끄고 한 김 나가면간수를 넣는다. 끝으로 뭉글뭉글 엉긴 두부를 틀에 넣고 모양을 만든다.
40년 입은 예복, 30년 쓴 양산
-이화장은 음식뿐 아니라 차로도 유명하던데요.
“시어머님은 이화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커피보다는 건강에 좋은 국산차를 내놓으셨어요. 여름에는 시원한 오미자차, 겨울에는 따끈한 모과차와 유자차를 즐겨 마셨죠. 율무를 볶아 율무차를 만들거나 결명자를 콩과 함께 볶아서 차로 만들어 마시기도 했어요. 머리를 많이 쓰시는 시아버님을 위해 밀눈을 살짝 볶아서 밀눈차를 만들어 내놓기도 했대요. 모과차와 유자차는 외국 귀빈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유럽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 어떻게 그렇듯 가장 한국적인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열정 때문이죠. 한국 음식 만드는 방법을 배우려는 열의가 대단하셨어요. 시아버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남궁염씨의 부인 조엔 남궁씨로부터 김치 담그는 법, 콩나물 기르는 법, 찌개와 국 끓이는 법 등 한국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셨어요. 얼마나 열의가 뜨거웠는지, 배운 지 얼마 안 돼 방문객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해 찬사를 받았을 정도였어요.”
-프란체스카 여사 본인이 즐겨 드신 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시루떡을 좋아하셨어요. 무나물도 즐겨 드셨고요. 시어머님은 한국요리 전문가였어요. 다 잘 만들었죠. 그중에서도 특히 떡국을 잘 끓이셨어요. 하와이 망명시절 시어머님이 끓이신 떡국이 너무 맛있어서 시아버님께서 단숨에 두 그릇을 비우셨대요.”
-이화장 안주인으로서 시어머님의 요리비법도 전수하셨겠군요.
“시어머님의 손맛을 그대로 재연할 수는 없지만 이화장 요리비법은 다 배웠죠. 제 남편도 시아버님과 입맛이 똑같아요. 비지찌개나 된장찌개를 좋아해요. 비지찌개 하나면 밥 한 그릇 금방 비우시죠.”
프란체스카 여사는 성품이 검소했고 근검절약이 몸에 뱄다. 서민이 주로 입는 인조견이나 목면 소재의 옷을 즐겨 입었고, 계절마다 입을 옷이 한 벌씩밖에 없어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었다. 평생 옷은 물론 양말과 스타킹도 기워 신었다. 1958년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었으며, 40년간 아껴가며 입은 검정예복은 며느리 조 여사에게 물려줬다. 사랑하는 손자들의 옷도 마찬가지. 체육복은 여러 번이나 깁고 아랫단을 내 형이 입던 것을 동생에게 물려줬을 정도다.
이인수 박사가 양자로 선정된 뒤 하와이에 가면서 선사한 국산 양산은 30년 가까이 썼고, 1946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한국을 방문해 선사한 냉장고는 35년간 사용했다. 1976년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했을 때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력난이 이렇게 심한데 어떻게 에어컨을 쓰겠냐”며 돌려보냈다. 그러자 금성사에서는 작은 선풍기를 다시 보냈는데 그나마 아주 더울 때 한두 번 트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22년 동안 미장원에 한 번도 가지 않고 머리를 길러 쪽을 쪘다.
이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단란한 한때.
-지금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절약정신인데, 시집살이가 여간 힘들지 않았겠군요.
“밥알 한 알, 두부 한 조각, 콩나물 한 가닥도 못 버리게 하셨어요. 세제도 조그마한 티스푼으로 떠서 쓰셨어요. 예전에 우리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도 시어머님의 정신을 본받아 세탁기를 안 쓰고 손빨래를 했어요.
겨울을 따뜻하게 나시지 못하신 걸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시어머님은 기름값을 아끼려고 겨울이면 비좁은 경비실로 옮겨서 지내셨어요. ‘기름을 때는 것은 달러를 태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시면서. 너무 추워서 1985년에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이화장 본관 아래에 이층집을 지었어요. 말년에는 좀 따뜻하게 지내셔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시어머님과 가끔 ‘72도 작전’을 하던 게 기억납니다. 사람 체온이 36℃인데 둘이 합치면 72℃라는 거예요. 둘이 껴안으면 추위도 잊을 수 있고, 모든 게 풀어진다는 뜻이에요. 겨울에 너무 추워서 서로 껴안고 하던 게 서로 감싸안는 포옹으로 발전했죠.”
-프란체스카 여사께서 이화여대에서 주는 박사학위를 사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시어머님은 이승만 박사의 부인이라는 걸 최고의 영예로 여기셨어요. 그래서 이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준다고 했는데도 ‘이 박사의 부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사양하셨죠. 학위는 지금 우리 집에 있어요.”
최고의 헬프메이커
90세를 넘긴 프란체스카 여사의 노환이 심해지자 당시 민자당 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대 병원의 국가원수급 특실을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조 여사는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이사장의 ‘호스피스’란 책을 읽고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시어머님이 이화장에서 편안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도록 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유언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과 시아버님께서 독립운동할 때 사용하던 태극기를 같이 관에 넣어달라고 하셨어요. 참, 틀니도 끼워달라고 하셨죠. 그리고 관뚜껑엔 시아버님께서 쓰신 ‘南北統一’이란 글을 덮어달라고 하셨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손자들이 장가가는 것을 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2년 3월19일 별세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결식은 3월23일 거행됐으며, 그의 바람대로 국립묘지에 잠든 남편 옆에 안장됐다.
“시어머님에겐 여성으로서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위인 옆에는 훌륭한 반려자가 있다고 하는데, 시아버님께 그만한 헬프메이커가 없었을 거예요. 이화장 정원에 시아버님께서 은방울꽃을 심었어요. 시어머님이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그런데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은방울꽃이 안 펴요. 함께 승천했나 봐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아내를 위해 심었다는 은방울꽃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계한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사철 푸르른 관상수가 자라고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 있을 때는 해마다 꽃을 피웠다던 은방울꽃. 그 꽃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람과 꽃은 사라졌지만 그 향기는 지금도 이화장을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