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강영훈 전 국무총리 &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

“겸손하고 진지한 ‘대화의 기술’이 정치인 성장 자양분”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입력2006-11-14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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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 김형오 원내대표는 어디서나 권위적이지 않은 언행 덕분에 높은 점수를 받는다. 기자이던 그가 외교안보연구원과 청와대를 거쳐 정계에 진출하기까지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도움이 컸다. 기자와 취재원으로 처음 인연을 맺어 30여 년간 인생 선후배로 지내온 두 사람을 만나봤다.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정호승, ‘반지의 의미’ 중에서-


    강영훈 전 국무총리 &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
    김형오(金炯旿·59)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추석 무렵 강영훈(姜英勳·84) 전 국무총리 자택을 찾았다. 서울 아현동의 아담한 이층집, 푸른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에 강 전 총리의 서재가 있다. 김 대표 눈에는 30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두꺼운 책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고, 집필 중인 원고도 눈에 띄었다.

    강 전 총리와 김 대표의 인연은 참 특별하다. 공적으로는 외교안보연구원과 국무총리실에서 2번이나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인연을 맺었고, 사적으로는 30여 년간 인생 선후배로 소중한 인연을 이어왔다.

    김 대표와 강 전 총리의 첫 만남은 1978년, 김 대표의 ‘신동아’ 기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외 한국학자들의 현주소’라는 기획물을 맡은 김 대표는 해외 유학파들의 도움을 받아 취재를 했다. 취재원 중에 당시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장이던 강 전 총리도 들어 있었다.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 인터뷰로 대신했으니 김 대표와 강 전 총리는 목소리만으로 처음 만난 셈이다.

    군인 출신 같지 않은 자상함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대표는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이던 김세진 박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외교안보연구원장이 ‘신동아’에 실린 ‘해외 한국학자들의 현주소’ 기사를 읽고, “이 기사를 쓴 김형오 같은 사람이 여기 와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런데 그 외교안보연구원장이 바로 강 전 총리였다. 김 대표는 김세진 박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강 전 총리가 한국외국어대에서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을 알았다.

    누구에게나 이직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김 대표는 외교안보연구원의 제안을 받고 동료기자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다수가 반대했다. 그러나 김 대표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제 자신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어요. 1974년 광고탄압 등 ‘동아 사태’를 정점으로 언론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거든요.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갖고 제대로 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직장을 옮기기로 마음을 굳히고 강영훈 원장을 만났어요. 저를 인정해준다니 고맙기도 했고요. 그전에도 통일원 등 몇몇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인연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일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김 대표는 강 전 총리와의 첫 대면에서 군인 출신 같지 않은 강 전 총리의 자상한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김 대표가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일하겠다고 말하자 강 전 총리가 웃으며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기자들은 월급 외에 취재비 등을 받는 것으로 아는데, 여기는 월급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내 판공비에서 매달 5만원씩 주겠다”고 한 것을 잊지 못한다.

    30여 년 전, 5만원이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은 액수도 아니다.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에서는 외무부 차관급이던 원장에게만 판공비가 나왔던 것을 감안하면, 금액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강 전 총리의 세심한 배려를 읽을 수 있는 일화다. 결국 김 대표는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 3급 갑 별정직인 원장 비서로 발령받았다.

    국무총리실에서 재회

    1978년 무렵 외무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원은 박사급 연구원을 많이 확보해 질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릴 목적으로 분주했다. 당시 외무부에선 수시로 연구원에 특정 사안에 대한 분석을 요청했는데, 그럴 때면 박사급 연구원들이 20∼30쪽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해 외무부 담당자들은 물론 외교안보연구원장이던 강 전 총리까지 난감하게 했다. 그러던 중 강 전 총리 눈에 김 대표의 기사가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김 대표는 원장 비서로 발령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연구원들이 만든 보고서를 2∼3쪽 분량으로 간추려 강 전 총리와 외무부 담당자들에게 보고하는 일을 주로 했다.

    강 전 총리와 김 대표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 차가 난다. 아버지와 아들 같은 나이 차다 보니 강 전 총리는 부하직원인 김 대표를 아들처럼 대했다. 집으로 초대해 대화하기를 즐겼다. “미스터 김, 내일 저녁에 내가 미국에서 도움을 받은 분들이 오시는데, 시간 나면 우리 집으로 오지” “미스터 김, 오늘 저녁에 뭐해? 별일 없으면 우리 집에 같이 가지” 하며 김 대표를 격의 없이 대했다.

    강 전 총리는 5·16군사정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투옥된 바 있다. 그 후 예편한 뒤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오래 머물렀다. 만학으로 사우스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미국에 머무는 동안 감시의 눈이 두려워 친척들과도 연락을 못하고 지냈다. 김 대표는 “오랜 인고의 세월을 보낸 강 총리가 겉으로는 무척 겸손하고 소탈하며 속은 한없이 넓고 깊다”고 말한다.

    1981년 강 전 총리가 영국 주재 대사로 임명되면서, 김 대표는 강 전 총리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강 전 총리가 외국에 머무는 동안 김 대표의 신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1982년 대통령비서실로 자리를 옮긴 것. 그리고 4년 뒤인 1986년부터는 국무총리정무비서관으로 근무했다.

    1987년 어느 날, 총리실에 느닷없이 영국풍의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강 전 총리가 들어섰다. 주 영국대사와 주 로마교황청대사를 역임하고 귀국한 강 전 총리는 그렇게 종종 김 대표를 만나기 위해 총리실을 방문했다고 한다.

    “일하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면 강 총리께서 저를 향해 손짓, 몸짓을 하고 계신 거예요. 오시기 10분 전에라도 연락을 주시면 마중을 나가겠다고 몇 번이나 당부를 드려도 매번 그렇게 나타나곤 하셨어요. 대사까지 지내신 분이 그렇게 소탈하셨죠.”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1989년 강 전 총리가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국무총리실 정무비서관으로 있던 김 대표와 공식적으로 다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재미난 인연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할 겨를도 없었다. 당시 13대 국회가 처음으로 여소야대(與小野大)이던 때라 국무총리가 국회에 불려 나가면 야 3당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곤 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0년 1월에 3당이 통합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이 두 번째로 많은 원내 의석을 가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3당인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든 것. 이로써 최대 야당이던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을 고립시키고, 국회를 여대야소로 전환했다.

    ‘세 가지 조건’에 꿈을 접다

    이런 정치 상황이 현실 정치 참여를 꿈꿔온 김형오 대표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마침 부산 영도에 민자당 출신 국회의원이 없었다. 3당 통합 때 통일민주당 소속 부산 국회의원 대부분이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경남중·고등학교를 다닌 김 대표에게 영도는 고향이나 진배없었다.

    김 대표는 2년 후에 있을 국회의원선거 때 영도에서 민자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 뒤로는 토요일 근무가 끝나자마자 부산으로 내려가 월요일 새벽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했다. 정치 신인이 부산에서 입지를 다지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강 전 총리와 충분히 의견을 교환한 뒤의 일이다.

    그 와중에 김 대표는 당시 최창윤 정무수석비서관으로부터 다시 청와대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최 수석은 1982년 김 대표가 대통령비서실에 근무할 때 직장상사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김 대표는 이미 고인이 된 최 수석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더듬었다.

    “최 박사와는 아주 중요한 일을 참 재미있게 했어요. 대통령 단임제가 실현되도록 일을 진행시켰고, ‘학원안정법’을 정무비서관이던 최 박사와 비서인 제가 무산시켰지요. 그땐 정말 비장했어요. 사표를 써서 가슴에 품고 다녔을 정도였으니.”

    강영훈 전 국무총리 &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

    오랜 친구처럼, 때론 아버지와 아들처럼 다정한 강영훈 전 국무총리와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

    그렇게 남다른 인연을 맺은 최 수석의 제안을 선뜻 뿌리칠 수 없었다. 김 대표는 한 달 넘게 고민했다. 촌놈이 청와대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준 최 박사가 고맙다가도 비서생활만 하다 인생 끝나는 것 아닌지, 강 총리를 모시지 않고 청와대로 가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결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김 대표는 최 수석에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함께 일하겠다고 전했다.

    첫째, 국무총리실에서 청와대로 옮기는 것을 강 총리가 허락해야 하는데, 그 건을 최 수석이 강 총리에게 직접 말할 것. 둘째, 1년 이상 근무를 보장할 것.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기 때문이다. 셋째, 6개월 동안 일을 못해도 야단치지 말고 기다려줄 것. 부산 영도 곳곳을 누비며 정치활동을 준비한 터라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 수석은 김 대표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강 총리도 “청와대에서 필요하다면 데려가라”며 선뜻 김 대표의 이직을 수용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 김 대표는 부산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는 꿈을 접고,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됐다.

    “유능한 신인을 키워보시오”

    청와대 생활 4개월째로 접어든 1990년 8월 말,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청와대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연유인즉 김 대표가 민자당 부산 영도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민자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민자당 김영삼 최고위원이 조찬 간담회를 열고 민자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10여 명을 확정했다. 이 자리에서 YS가 영도지구당 위원장으로 김 대표를 적극 추천했고, 노 대통령은 자신의 비서를 YS가 적극 추천하는 데 반대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길 형편도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임명장을 수여할 때 잠깐 얼굴을 본 게 다여서 김 대표를 기억하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강 전 총리의 물밑작업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강 전 총리가 YS에게 정치지망생인 김 대표를 부탁했던 것. 김 대표와 YS가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동문이니 이게 보통 인연이냐며 젊고 유능한 신인을 정치판에서 키워보라고 적극 밀었다고 한다.

    YS를 만나고 온 강 전 총리는 김 대표에게 바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막 청와대에 자리잡은 때라 김 대표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덜컥 민자당 영도지구당 위원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러나 김 대표의 정계 입성은 순탄치 않았다. 민자당 내 노태우 대통령 진영에서 김 대표가 YS와 노 대통령 사이에 양다리를 걸쳤다고 오해한 것. 청와대 비서관이 그만둘 때면 으레 대통령과 커피타임을 갖는데, 김 대표는 그것도 못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그 후 2년 동안 오해를 풀 방법이 없어 당 공천에서도 떨어질 뻔한 시련을 겪었다. 이때에 그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낸 이도 다름 아닌 강 전 총리와 최창윤 박사다. 결국 김 대표는 민자당 공천을 받아 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지금까지 4선을 이어왔다.

    김 대표는 1993년 이동통신 기술방식으로 CDMA방식을 채택하자고 주장해 오늘날 우리나라가 휴대전화 강국이 되는 밑거름을 마련했으며, 1998년부터 3년간 도·감청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 ‘통신비밀보호법’을 전면 개정했다. 2001년엔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으로 국회 디지털화를 주장, 국회의원에 대한 인터넷 교육을 이끌었다. 그는 특히 국정감사 때마다 동원되는 두툼한 종이자료 보따리를 노트북과 CD롬으로 대체해 이른바 ‘종이 없는 국감’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진지하며 겸손한 대화법

    김 대표는 강 전 총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중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대화의 기술’을 꼽았다. 강 전 총리는 질문하기를 즐긴다. 뉴스를 보다가도 수시로 가볍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미스터 김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 “미스터 김, 이번 사태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아?” 그러면 김 대표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해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빠르게 판단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 출신다운 대응이었다. 그러면 강 전 총리는 곧이어 “이런 뜻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소크라테스 관점으로 접근하면 말이야…” 하고 한참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김 대표는 강 전 총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답을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강영훈 전 총리 미니 인터뷰

    “정치판에선 강직한 젊은이가 할 일이 많지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김형오 대표와 함께 강영훈 전 국무총리 자택을 방문했다. 강 전 총리는 고령이지만 몸도 마음도 건강해 보였다. 다음은 김 대표와의 인연에 대한 일문일답.

    ▼ 1978년 당시 ‘신동아’ 기자이던 김형오 대표를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스카우트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연구원에서 박사 연구원들의 연구 보고서를 일목요연하게 다듬고, 요약할 글솜씨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김 대표가 쓴 기사를 읽고 스카우트했지요.”

    ▼ 젊은 날의 김형오 대표는 어땠습니까.

    “똑똑하고 겸손했어요. 외국 대학 출신 박사들의 글을 다듬을 정도의 실력이면, ‘에이, 박사들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런 내색을 안 했어요. 맑은 눈빛을 가진, 유능한 젊은이였지요.”

    ▼ 1990년, YS에게 추천할 정도로 김 대표에게서 정치 재능이 엿보이던가요.

    “물론이죠. 강직한 젊은 정치인이 기성 정치세계에 들어가 할 일이 많아요. YS에게 김 대표를 추천하는 건, 정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어떻게 보면 좀 뻔뻔스러운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지요.”

    ▼ 현 정치상황에서 김 대표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나라당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아요. 특히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는 참으로 안타까워요. 1980년 10월10일 북한 노동당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이 기조연설에서 ‘고려민주연방제’에 대해 말한 뒤 사흘 만에 남한을 공산화해서 통일하자고 명문화했어요. 그러자면 미군을 내쫓는 것이 급선무지요. 그것을 우리 정부가 이어받으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김 대표가 야당 원내대표로서 책임 있게 시국을 이끌어주길 바랍니다. 나는 대통령의 잘못도 지적하는 사람이지만 칭찬하는 데는 아주 인색한 편이에요. 하지만 김 대표가 있어 아직 정치에 희망을 건다고 말합니다.”


    “강 총리는 내공이 대단한 분이에요. 지적으로도 상당히 깊이가 있고요. 한마디로 지(智)와 덕(德)을 고루 갖춘 분이지요. 몰라서 질문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과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지요.”

    정치란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다. 정치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마음을 다치지 않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김 대표는 강 전 총리에게서 상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진지하며 겸손한 대화법을 전수받았다.

    의원회관에 있으면 대개 두 부류의 민원인이 찾아온다. 한 부류는 청탁하러 오는 경우이고, 다른 한 부류는 억울한 일을 겪고 잔뜩 화가 나서 오는 경우다. 민원인은 대체로 보좌관이 만나지만, 김 대표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경우 그는 차분히 이야기를 듣고, 대화한다. 때로는 단지 들어주는 것만으로 일이 해결되기도 한다. 대화하기를 즐기고, 대화를 잘 이끌어가는 것은 김 대표가 민주적이고 부드러운 정치인 이미지를 갖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마음이 부자면 된다”

    김 대표가 강 전 총리에게 배운 또 한 가지는 소박한 생활 태도다. 반평생 허름한 동네 이발소에 다니는 강 전 총리의 소탈함은 김 대표를 감동케 했다. 흔히 “정치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김 대표가 민자당 영도지구당 위원장이 됐을 때 “신선하다”는 반응과 함께 “너무 젊다” “돈이 없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주위에 많았다. 하지만 김 대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駐)영국대사를 지낸 강 총리도 담 높은 고급주택에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 전 총리의 모습에서 그는 마음이 부자면 된다고 확신했다.

    4선의 김형오 대표는 어느 자리에서건 권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 자신은 “권위는 있으되 그 권위를 함부로 남용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김 대표가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민주적으로 대화하는 소탈한 정치인,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강 전 총리처럼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멘토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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