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선수 연애 상담까지 도맡는 ‘어머니형 리더십’의 창시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06-20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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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목 부상으로 실업팀 입단 1년 만에 농구를 접은 선수가 있었다. 이후 지도자가 아닌 구단 주무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 관리, 숙소 및 식당 예약, 감독과 코치 수발, 홍보까지 안 해본 업무가 없을 정도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10년 프런트 생활 끝에 지도자로 변신했지만 주위의 평가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는 정규시즌 1위 네 차례, 챔프전 우승 세 차례 등의 성과를 거두며 그 어떤 스타 선수보다 화려한 농구 인생을 살고 있다. 부산 KT 전창진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전창진(49) 부산 KT 소닉붐 감독은 프로농구계의 대표적인 명장(名將)이다. 정규시즌 1위 네 차례, 챔프전 우승 세 차례(통합우승 2회)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고, 플레이오프 최다승인 38승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2009년 원주 동부 프로미에서 부산 KT 소닉붐 사령탑으로 옮긴 후 세 시즌 동안 112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전 감독은 올해 초 KT와 3년 재계약을 했고, 프로농구 감독 중 최고 몸값인 4억5000만 원의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전창진 감독의 성공 시대를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상 때문에 그가 불과 1년여의 짧은 선수 생활을 한 데다 그 기간의 성적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선수 생활을 접은 후에도 엘리트 선수들이 코치로 직행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프런트 말단 직원, 즉 주무 출신으로 지도자 인생의 첫발을 디뎠다. 당연히 그가 처음 감독이 됐을 때 “주무 출신이 무슨 감독을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적지 않았다.

    전 감독이 처음 감독 지휘봉을 잡은 2002~03년 시즌에 보란 듯 우승컵을 거머쥐었을 때도 “김주성 같은 S급 선수를 데리고 있으면 누가 감독이 되건 우승을 못하겠느냐”는 식의 폄훼가 이어졌다. 당시 정규 리그 3위 팀이 시즌 챔피언에 등극한 유일무이한 사례였지만, 세간의 평가는 인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전 감독은 이후 꾸준히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실력을 입증했다. 이제는 아무도 그에게 ‘선수 덕분에 잘나가는 감독’이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한 감독이 단일 농구팀과 6년 계약을 맺은 건 프로농구 역사상 그가 최초다.

    전 감독은 오랜 프런트 생활을 통해 선수단은 물론 언론, 트레이너, 구단 직원, 찬모나 운전기사에 이르기까지 농구단 안팎으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선수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식사와 술 외에도 연애 상담, 전화, 문자, 채팅, 목욕탕 대화 등 갖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선수단의 밥을 해주는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화장품 세트를 선물하고, 구단 운전기사를 깎듯이 ‘형님’으로 모시며, 한 줄짜리 기사를 위해 밤늦게 언론사에 간식거리를 사 들고 찾아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행동 자체가 한 권의 인맥 관리 교본이다. ‘좋은 지도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라는 그의 지도자론 또한 여기에서 탄생했다.



    전창진은 누구인가

    전 감독은 서울 상명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3년 처음 농구공을 만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또래보다 덩치가 컸던 그를 눈여겨본 상명초등학교 농구팀 감독이 조회 시간에 그를 찾아와 대뜸 “농구 한번 해보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평소 농구부 유니폼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소년 전창진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전 감독은 몰랐지만 그의 아버지는 중앙대 재학 때까지 농구선수 생활을 한 경력이 있었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농구 유전자가 내재돼 있었던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농구 명문인 용산중에 스카우트됐다.

    중3 때 그의 농구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전 감독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춘계연맹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했다. 오른쪽 발목이 부러져 깁스만 6개월을 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운동선수의 재활 치료에 관한 개념이 전무했던 터라 그는 변변한 재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결국 이때 입은 발목 부상은 두고두고 농구선수 전창진의 인생을 가로막는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극도로 나빠졌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있었고, 차비를 아끼려고 먼 길을 걸어 다녀야만 했다. 당연히 운동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당시 그는 부모에게 “농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했다. 하지만 전직 농구선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이제껏 힘들게 운동을 했는데 지금 그만둔다는 게 말이 되느냐. 최소한 대학교 졸업은 해라. 그때도 결심이 달라지지 않으면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2학년 때 주전이 됐고 한일 대학대회 등에 국가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졸업을 앞두고 이번에는 왼쪽 발목까지 다치고 만 것. 졸업 후 운 좋게 삼성전자 실업 농구팀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발목 부상이 다시 문제가 됐다. 두 시즌 동안 사실상 벤치만 지키던 그는 견디지 못하고 1988년 은퇴를 선언했다.

    불과 25세의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은 전 감독의 앞길은 그야말로 막막했다. 방황하던 그에게 이인표 당시 삼성전자 단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단장은 그에게 다짜고짜 선수단 매니저 역할을 맡겼다. 주 업무는 선수 스카우트였다.

    “농구를 몇 년이나 했는데 스카우트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는 그의 생각과 달리 프런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프런트 인력의 전문화, 분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터라 그는 선수 스카우트는 기본이고 구단 홍보, 물품 관리, 선수단 관리 및 뒷바라지까지 도맡아야 했다.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이 제대로 자는지 밤마다 방을 돌며 이불을 덮어주고 문단속을 해야 했다. 고참 선수들에게는 밖에 나가 술 먹고 사고 치지 말라고 일부러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숙소에 넣어주고 문을 닫았다. 심지어 선수들의 빨래거리를 챙겨야 할 때도 있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말이 있듯 위계질서와 위기관리를 중시하는 대기업의 조직문화 또한 만만치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1분 1초 쉴 틈도 없었고 퇴근은 꿈도 못 꿨다. 하지만 이때의 생활은 전창진 감독의 리더십을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선수단을 속속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엘리트 선수들은 지도자가 된 후 구단 및 언론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쉽게 말해 ‘갑(甲)’이 아니라 ‘을(乙)’의 처지가 되어 본 적이 별로 없는 탓이다.

    하지만 전창진 감독은 10년간의 매니저 생활을 통해 ‘을’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했고, 다른 사람들이 조직의 리더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빨리빨리 파악하는 능력을 터득해냈다. 당시를 기억하는 삼성 관계자들은 프런트 전창진을 이렇게 평가한다. “어떤 일도 철저하게 했다. 허드렛일을 시켜도 싫은 내색 없이 묵묵히 일했다. 최고의 구단 프런트였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다

    1998년 전창진 감독의 초중고 선배인 최형길 당시 원주 TG 사무국장이 그에게 수비코치를 제의하면서 그의 인생은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코치로 선수들을 잘 다독이며 지도자의 자질을 보이던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2001~02년 시즌 도중. 최종규 당시 원주 TG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중도하차하면서 구단은 그에게 감독대행을 제의했다. 부담도 되고 겁도 났지만 도전할 기회가 마침내 왔다는 생각에 그는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가 감독이 되자 “원주 TG 프런트에 용산고 선후배가 많아 주무 출신인 그를 발탁했다” “용산고 마피아들이 다 해먹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농구코트에서 선수들과 땀을 흘렸다. 결국 감독 첫 시즌인 2002~03년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주무 출신 주제에 김주성 같은 좋은 선수를 만난 덕에 거저 우승 했다”는 비아냥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이는 당시 원주 TG의 사정을 잘 모르는 타인들의 시샘일 뿐이었다. 당시 삼성, LG 등 쟁쟁한 모기업을 둔 다른 농구단이 연간 50억~60억 원의 예산을 쓸 때 원주 TG는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30억 원 미만의 예산을 써야했다. 남들이 다 가는 해외 전지훈련은 꿈도 못 꿨고 외상 밥값이 너무 밀려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걸핏하면 농구단이 해체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초보 감독과 선수들의 의욕은 대단했다. 전 감독은 “우승을 못하면 곧바로 팀이 해체된다’는 말이 나돌았던 게 오히려 선수들의 의욕을 자극했다”고 평가한다.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처지에 몰린 선수들은 당연히 죽을 각오로 뛰었고 코치진도 열과 성을 다했다. 첫해 깜짝 우승을 차지한 전 감독은 다음해인 2003~04년 시즌에도 준우승을 차지해 그의 능력이 일회성이 아님을 입증했다. 원주 TG는 2004~05년 시즌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005년에는 모기업이 TG에서 동부로 바뀌었다. 든든한 스폰서를 구하긴 했지만 모기업의 기대치도 높았다. 전 감독은 2007~08년 시즌에 팀을 세 번째 정상에 올려놓으며 구단의 기대에 부응했다.

    부산 KT로 이적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전 감독은 원주에서 지내는 7년 동안 다른 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수없이 받았다. 다른 농구단보다 적은 돈을 쓰면서 더 우수한 성과를 내는 그를 탐내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의리를 위해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이 때문에 그가 2009년 부산 KT로 이적한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다. 당시 부산 KT는 만년 꼴찌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적이 나빴기에 놀라움은 더 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이 전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 KT 본사에서는 농구단을 없애거나 명장을 영입해 팀의 체질을 확 바꿔놓거나 둘 중 하나를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에게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냈다. 전 감독 역시 “하위 팀을 상위 팀으로 만들어 지도자의 능력을 추가로 입증해보이겠다”는 도전의식에 불탔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동부에는 스타 선수가 많았다. 김주성, 신기성, 양경민 등은 물론 한국 농구계가 낳은 최대 스타인 허재 KCC 감독이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한 곳도 바로 동부다. 기본기가 탄탄하고 선수들도 기초 훈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 그의 운영 방식을 잘 따라왔다. 하지만 KT는 달랐다. 전 감독은 부임 초기 KT 선수들이 기본적인 패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명색이 프로라는 선수들이 이렇게 기본이 안 돼 있나, 감독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라는 게 그의 회고다.

    전 감독은 새 감독을 어려워하는 선수와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위해 다양한 작전을 썼다. 술자리는 물론 고스톱을 같이 치고, 목욕탕에 함께 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농구선수가 하는 기초 훈련도 다시 실시하며 이 훈련을 왜 해야 하는지 상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선수들은 곧 그를 따라왔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서도 스스로 훈련을 자청했고, 훈련 결과가 실제 연승으로 이어지니 선수단의 자신감도 배가됐다. 스타 선수 없는 팀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강한 조직력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감독 전창진의 비전을 선수단이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부산 KT는 신흥 강호로 급부상했다. 결국 2009~10년 시즌 정규리그 2위, 2010~11년 시즌 41승으로 정규리그 최다승을 거두며 1위를 차지했다.

    아쉽게도 두 번 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우승하지 못했지만 KT는 올해 초 전 감독에게 3년 재계약과 최고 연봉을 제시하며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최근에는 국보급 센터 서장훈까지 영입했다. 전 감독은 지난 3년간 이루지 못했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전 감독의 리더십이 주는 교훈

    1)리더는 어머니다

    엄부자모(嚴父慈母·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 동양권에서는 조직의 리더에게 주로 ‘아버지형 리더십’을 기대한다. 실제 ‘야구의 신’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 등 명장으로 이름난 많은 스포츠 리더는 선수들과 식사도 함께 하지 않는 등 일정 거리를 두는 아버지형 리더십을 선보인다.

    하지만 전 감독은 다르다. 불성실한 플레이를 보이는 선수에게 거친 언행으로 자극을 주는 등 괄괄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 감독은 선수들과의 스킨십을 강조하고, 세심한 사후관리를 아끼지 않는 전형적인 ‘어머니형 리더십’을 선보인다. 이 역시 오랫동안의 프런트 생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 감독은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하지만, 선수들과 술자리를 자주 하며 고민 상담을 마다하지 않는다. 고민 상담의 주제는 주로 연애일 때가 많다. 한 번은 좋은 성적을 기대했던 모 선수가 너무 이상해 독대를 했더니 여자 문제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내가 해결할 테니 운동에만 전념하라”고 그 선수를 안심시켰고 실제 그 문제를 해결해줬다. 그 선수가 펄펄 날았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여자 문제로 고민하는 선수 때문에 문서 위조 비슷한 일까지 해봤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전 감독은 2009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운동선수들은 단순해서 여자에게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를 못한다. ‘오빠, 오늘 날씨도 좋은데 놀러가자. 왜 오빠는 나한테 전화도 안 해?’라고 하는 여자친구들이 꼭 사고를 쳐서 남자친구의 선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시시각각 선수들의 여자 고민을 파악하고 어떤 일이 있는지 체크해야 경기력에 문제가 없다.”

    선수 부인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매일 합숙 생활을 하다 보면 부인과 여자친구가 얼마나 그립겠나. 이때 감독이 안사람을 챙겨주면 선수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른다. 선수 가족이 경기장에 와도 쳐다보지도 않는 감독도 있지만, 나는 선수 부인이 경기장에 오면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고 남편 칭찬을 해준다. 감독이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칭찬해주면 여자들이 더 좋아하며 선수 뒷바라지에 열과 성을 쏟는다.”

    그는 기자들에게도 선수 이상의 정성과 관심을 쏟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프런트 시절 기자들과 10분 얘기하기 위해 서너 시간 분량의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고, 기사가 나오면 꼭 전화로 “좋은 기사였다. 고맙다”고 몇 번씩 말했다. 자신의 팀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 바로 언론사에 찾아가 “이번 신문 내가 몇 부 사겠다”고 한다. 전 감독은 “사실 전화 한 통, 빵 몇 개, 신문 몇 부 사는 게 뭐 어렵겠느냐. 하지만 이후 언론이 나나 우리 팀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더라. 결국 선수건 미디어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프런트 생활로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 감독은 팀이 경기에서 지면 먼저 선수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한다. “어떻게 매일 이길 수 있겠느냐. 오늘 진 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팀이 오늘의 패배 정도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이런 메시지에 “우리 감독이 나를 이렇게 신경 쓰는구나 싶어 무척 감격하고, 다음 날 경기에서 선수들의 몸놀림부터 달라진다”는 게 전 감독의 얘기다. “문자 보내는 것, 전화 한 통화 하는 것 정말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그 1분을 투자하면 엄청난 돈을 써도 못 얻는 효과를 얻는다.”

    2)‘흙 속의 진주’를 발굴하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전창진 감독이 강원도 태백에서 지옥훈련을 받는 KT 프로농구단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전 감독은 선수를 발굴할 때 의욕 단 하나만 본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고 타고난 신체조건이 좋아도 열정과 승부 근성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도자라면 지금 당장 기량이 조금 모자라도 의욕이 넘치는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하는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대표적인 예가 동부 프로미 감독 시절 라이벌 팀인 KCC로부터 표명일 선수를 데려온 일이다. 당시 표 선수는 테크닉이 많이 부족했지만 투지와 의욕이 매우 강한 선수로 이름이 높았다. 전 감독은 사실 표명일 선수를 싫어했다고 한다.

    “우리 팀 신기성 선수 전담이었는데, 사사건건 신기성 선수를 거칠게 마크해서 미웠다. 트레이드 첫날, 사무실에서 표명일 선수에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농구 선수가 표명일인데, 너랑 농구를 같이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실 전 감독은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대부분의 선수는 트레이드 첫날 서먹서먹하고 주눅이 든 마음 때문에 새로운 팀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 전 감독은 “감독이 그 말 한마디를 했다고 삐딱하게 나오면 좋은 선수가 아닌 거다. 하지만 표명일 선수가 호탕하게 웃더라. 그 모습을 보니 이 선수 잘되겠구나 싶어 안심이 됐다”고 했다. 전 감독은 표 선수에게 “과거에는 내가 너를 제일 싫어했지만, 이제부터 너를 많이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모든 것 잊어버리고 새롭게 해보자”고 제안했고 결국 표명일 선수는 2007~08년 시즌 원주 동부가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할 때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다.

    전 감독이 승부 근성을 중요시하는 특별한 이유는 기초 훈련이 중요하고, 다른 팀보다 많은 훈련량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재능을 자신하는 선수들은 우리 팀에 오면 패스나 드리블 같은 기초 훈련을 참아내지 못한다. 불성실한 태도로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은 절대로 용납 안 한다. 농구는 팀 스포츠다. 아무리 성적이 좋은 스타 선수라 해도 그 선수 하나가 돌출 행동을 하면 팀 전체의 기강이 무너진다.”

    3)코치에게는 철저히 권한을 분배해야 한다

    전창진 부산 KT 소닉붐 감독


    전 감독은 스타 코치들을 잘 다루는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원주 동부에서 초보 감독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허재 선수가 플레잉 코치였고, 이후에는 현 강동희 원주 동부 감독이 그의 밑에서 코치로 일했다. 두 사람 모두 선수 시절에는 전 감독보다 훨씬 유명한 스타여서 그 비결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대해 전 감독은 “코치들을 무조건 믿고 맡긴다. 감독 권한의 상당 부분을 코치들에게 분배해야 코치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KT에서나 동부에서나 그의 팀은 많은 훈련량으로 유명하다. 전 감독은 체력 훈련과 체육관 훈련은 철저히 담당 코치들에게 맡기고 전술 훈련만 자신이 담당하는 식으로 팀을 운영한다. 감독이 일일이 스트레칭부터 간섭하면 좋은 훈련이 이뤄질 리 만무하며, 시시콜콜 간섭하면 코치들도 주인 의식이 없어져 연구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코치들의 성과가 100% 성에 안 찰 때도 있다. 그럴 때 전 감독은 이렇게 행동한다. “체력 훈련이 부족하다 싶으면, 훈련이 다 끝나고 선수들이 물러간 후 코치와 1대 1로 만나 살짝 말한다. ‘이건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훈련 좀 더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이때 핵심은 ‘내가 잘 몰라서 물어본다’는 표현이다. 그 상황에서 감독이 코치에게 ‘훈련 왜 이 모양이야, 똑바로 못 시켜?’라고 하면 코치가 감독을 믿고 따라오겠나.”

    세심한 사람 관리는 코치라고 다르지 않다. 2004~05년 시즌 종료 후 당시 LG 코치였던 강동희 감독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동부의 전신인 TG 삼보는 경영난으로 농구단 매각을 추진하고 있었고 코치진이 6개월간 급여도 못 받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그룹이 망한 상황에서 농구단 분위기도 뒤숭숭했고, 농구장은 원주에 있는데 전 감독이 서울에 회의하러 갈 일도 잦았다. 그는 본인이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스타 코치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다.

    “강 감독이 미국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일단 무조건 만나자고 했다. ‘사실, 당장 너한테 월급도 못 준다. 하지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고, 좋은 팀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만 했다. 그 자리에서 흔쾌히 ‘오케이’라고 하더라. 강 감독은 학연이나 지연으로 얽힌 사이가 전혀 아니다. 월급도 못 받는 상황에서 나를 믿고 와준다니 너무 고마웠다.”

    전 감독은 선수들보다 코치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가족들이 캐나다에 있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는 그는 코치들과 농구장 밖에서나 안에서나 시간을 같이한다. 농구 시즌이 끝나면 여행도 같이 다닐 정도다. 훌륭한 코치진의 도움이 없으면 감독이 절대 자신의 역량을 100% 발휘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신조다.

    4)배울 점이 있으면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고개를 숙인다

    전 감독은 농구계에서 소문난 마당발이지만 다른 스포츠 종목의 지도자들과 교분을 나누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야구계의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및 김기태 LG 트윈스 감독, 배구계의 신치용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 등이다. 다른 명장들의 리더십을 탐구하면서 자신의 리더십에서 부족한 면을 보완하겠다는 열정 때문이다.

    전 감독은 최근 고양 원더스의 홈구장이 있는 경기도 일산까지 직접 찾아가 김성근 감독이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한국 최고의 2루수로 거듭나게 만들어준 정근우 선수와의 일화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정근우 선수가 수비에서 실책을 저지르고 타격에서도 무안타로 부진하자 김 감독께서 무려 배팅 1000회를 지시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정근우의 훈련이 김성근 감독님의 예상보다 일찍 끝나자 추가로 배팅 1000회를 다시 지시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국가대표 선수인데 한번 훈련을 시킬 때는 혹독하게 다뤄 그 선수를 그 분야의 최고로 만들었다는 것 아닌가.”

    김기태 LG 트윈스 감독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고, 별다른 친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팬을 자처할 정도다. 잘 알려진 대로 LG 트윈스는 지난해 초반 시즌 1위를 달리다가 6위로 처진 데다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핵심 투수 박현준 김성현 등이 사상 초유의 승부조작에 가담해 퇴출되는 바람에 많은 야구 전문가는 올해 LG 트윈스가 꼴찌를 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올해 초 새로 LG 트윈스의 수장이 된 김기태 감독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팀을 잘 추슬러 팀을 상위권에 올려놨다.

    전 감독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LG 트윈스를 의연하게 이끌어가는 김 감독의 리더십에 감명을 받았다. 내가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말한다.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보다 지도자 경험이 훨씬 적은 사람에게도 먼저 다가가고 몸을 낮추는 이런 태도야 말로 전 감독을 농구계 명장으로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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