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친, 친일·분단정권 저지 위해 이승만과 맞짱
- ‘정치사상은 민족 초월해 있을 수 없다’ 유언 새겨
- 박정희 “아버지 생각해서 열심히 하라” 격려
- 박정희-박근혜 부녀 잇달아 보좌
- 최태민 목사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 MBC 지분매각 방안 지시한 적 없어
그동안 언론의 끈질긴 접촉을 계속 피해왔던 최필립 전 이사장을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설득한 끝에 동생 만립 씨의 오피스텔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고령의 최 전 이사장은 선친 이야기를 하다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는 옛날 사진을 들춰보면서 60년도 더 지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이 글에 실린 최능진의 일생은 아들이 들려준 아버지 이야기인 만큼 다소 주관적인 내용이 포함됐을 수도 있다.
◆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
1899년 태어난 일석(一石) 최능진은 형제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형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일석은 ‘아들 한 명은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7년 유학길에 올랐다. 고향 선배인 도산 안창호의 권유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한 일석은 듀크 대학원을 졸업한 후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로 일했다. 흥사단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그의 눈에는 인재양성을 주장한 안창호와 달리, 이승만은 사대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고 독립운동세력 내에서 파벌주의와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승만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계기다.
1929년에 귀국한 최능진은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32년에는 평양축구단을 창설, 경평축구를 정례화하는 등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엔 일제가 조작한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조만식, 조병옥 등과 함께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조만식과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남지부를 만든 일석은 건준 치안부장을 맡아 해방정국의 치안유지와 일제 경찰의 무장해제 업무를 담당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면서 건준이 해체되고 우익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지자 이를 피해 서울로 내려온다.
서울에 온 일석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자들이 경찰 요직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해 이를 바로잡으려고 경찰에 입문한다. 미 군정청과 협력해 경찰관강습소를 창설해 초대 교장이 됐고, 이어 경무부 수사국장에 올랐다. 경무부에서 일석이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은 친일경찰 청산이었다.
하지만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등과 부딪쳤다. 조병옥은 “친일부역자가 모두 Pro-JAP(직업적 친일)은 아니었다. Pro-JOB(생계형 친일)도 있었다”는 논리로, 장택상은 “경찰은 기술직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친일경찰을 두둔했다. 일석은 조병옥과 함께 옥고를 치른 ‘절친’이었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결국 1946년 조병옥에 의해 파면됐고, 이에 일석은 언론을 통해 조병옥 사퇴를 주장하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反이승만’ 선봉에 서다
사형당하기 직전인 1950년 무렵 최능진.
많은 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5·10선거 일정이 확정됐다. 일석은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을 노리던 동대문갑구에 입후보하기로 한 것. 이승만을 떨어뜨려야 친일세력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민족세력이 중심이 된 정부를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북청년회와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지휘를 받는 경찰의 방해로 후보 추천서를 날치기당하는 등 후보 등록과정부터 시련을 겪었지만 일석은 극적으로 후보 등록을 했다. 당시 미군정이 일석을 도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선거가 시작되자 일석은 독립운동 경력, 친일경찰 처벌을 주장했던 사실 등이 부각되며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지지도는 이승만을 상회하거나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에서 작성한 ‘유권자 지지 성향 조사 결과 정보보고서’를 보면 민심이 이승만보다 최능진에게 기울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이승만의 ‘정적(政敵)’으로 부각됐다.
하지만 이승만 계열의 방해공작으로 선거를 이틀 남겨두고 선거관리위원회가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 날인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후보 등록을 무효 처리한다. 만약 일석이 당시 선거에 출마했다면 한국현대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 모른다. 아무튼 이 사건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최능진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일석은 이승만 정권 출범 직후인 1948년 10월 1일 내란음모죄로 체포된다. 혐의는 이른바 ‘인민해방군 사건’이었다.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해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이 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보태졌다. 이 사건은 나중에 김창룡 육군특무대장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일석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
6·25가 터지고 서울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면서 서대문형무소 옥문이 열렸다. 감옥을 나온 최능진은 피난을 가지 못한 민족주의 인사들과 함께 정전·평화운동을 벌였다.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이던 이승엽에게 즉각적인 전쟁 중지와 ‘유엔감시하의 평화통일’을 김일성에게 제안했다. 반공주의자였지만 동족 간 전쟁은 막자는 취지였다.
친일경찰 손에 利敵죄로 처형
김일성은 처음엔 좋다며 이를 촉구하는 대중집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갑자기 말을 바꿔 행사 명칭을 ‘이승만 타도! 김일성 만세!’로 하라고 요구했다. 일석은 이를 거부하고 잠적했다. 9월 28일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면서 조만식, 김규식, 조소앙 등 정치지도자 대부분이 북으로 끌려갔지만 미리 피신한 일석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이승만 정권에서 그를 공산당 부역자로 몰았다. 일석은 이승만, 이기붕, 조병옥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 최대한 돕겠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했지만 일축당했다.
일석은 내란혐의로 구속됐고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군사재판을 받았다. 정전(停戰)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된 사람은 일석 한 명뿐이었다. 당시 일석을 조사한 방첩대(CIC)는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군부 실세로 떠오른 김창룡이 이끌고 있었다. 일석은 친일경찰 청산을 주도했지만 그들의 공작정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리어 친일 출신들의 용공조작에 희생된 것이다.
일석은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동에서 ‘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총살된 지 9년 만인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그의 이름은 다시 햇빛을 보게 됐다.
◆ “내 아버지와 박근혜, 그리고 정수장학회”
광복 전후 최고의 주먹이었던 정복수 선수와 함께. 오른쪽 두 번째가 최능진.
“박 대통령 재임 기간 난 아무것도 안할 거야. 근처에도 안 갈 거야. 이 나이에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런데도 (언론과 야당은) 날 괴롭히더라고. 선거 끝난 후에도 전화하고 찾아오고, 모 방송국에선 아예 집 앞에 ENG카메라를 24시간 세워놓더라고. 내가 숨을 못 쉬겠어.”
▼ ‘신동아’를 통해 ‘이제 박근혜 대통령과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선언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 기사가 나가면 더 찾아와. 내가 박 대통령과 조금만 연결되면 걸고넘어지고….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하는 건 옳지 않아. 특히 한명숙이랑 박영숙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나는 거야.”
화제를 다시 일석에 대한 이야기로 돌렸다. 가족 앨범엔 최필립 형제가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선친이 사형당한 후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살림을 다 부수고 책이며 사진을 다 불태워버렸어. 그 바람에 사진이 거의 안 남아 있어.”
▼ 기억 속의 부친은 어떤 분이었나.
“일제 때는 독립운동 하느라 중국에 계셨고, 독립 후에는 민족운동 하느라 바쁘셨지. 가끔 쉴 때면 우리를 유원지에 데리고 가셨던 기억이 나. 평소 일제 통치로 마비된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제대로 된 독립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런 분이셨기에 한민당을 친일세력 소굴로 봤고, 한민당을 이용한 이승만 박사를 마키아벨리스트로 규정해 반(反)한민당, 반(反)이승만 정치활동에 몸을 던지신 거지. 진정한 민족주의는 이념·사상·제도를 초월한다는 정치철학을 가지고 계셨어. 그래서 김구, 김규식 선생과 함께하셨던 거고.”
▼ 부친이 이승만에 맞서 동대문갑구에 출마했을 때 회유도 많았을 텐데.
“당시 이승만 측이 문봉재(서북청년단장)를 통해 아버지를 많이 회유했어. 권총 찬 문봉재가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와 외무장관 시켜준다, 주미대사 시켜준다고 했지만 다 거절하셨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으신 거야.”
▼ 이승만 집권 후 정치탄압을 예상했을 텐데.
“미군정에서는 아버지에게 ‘화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 우리도 계속 권유했지. 그때 여러 명이 미국으로 피했어. 하지만 아버지는 국민과 동지들을 두고 혼자만 피할 수 없다고 거절하셨지.”
과거사위 ‘사실관계 誤認 판결’
▼ 부친을 마지막 본 게 언제였나.
“6·25가 나고 출소하셨을 때 잠깐 뵙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 난 친구 집으로 피신하고 만립이가 아버지 곁을 지켰지. 서울 수복 후 아버지가 이승만, 조병옥, 이기붕에게 ‘나라 재건을 위해 적극 돕겠다’는 편지를 썼는데, 나랑 비서가 그걸 전달하는 일을 했어.”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최능진의 제안에 사형선고로 응답했다.
▼ 시신은 어떻게 찾았나.
“김창룡 밑에 있던 한동섭 소령이라는 아버지 지인이 총살당한 곳을 알고 있었어. 전쟁이 끝난 후 만립이를 조용히 불러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매장한 곳을 알려줬어. 그때까지는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몰랐어. 당시엔 장례식도 못했지. 4·19 후에야 시신을 수습해 경기도 파주로 이장할 수 있었어.”
1993년 유족들은 “부친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해달라”며 국가보훈처에 진정을 냈지만, 이듬해인 1994년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죄) 위반으로 사형을 받은 경력이 있어 현행(당시) 상훈법의 규정상 서훈은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동안 방법을 찾지 못하던 유족은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국방경비법의 위법성을 주장하며 진실규명 신청을 냈다. 2009년 9월 진실화해위원회 위원 15명은 만장일치로 ‘최능진은 이승만에게 맞선 것을 계기로 헌법에 설치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 관할권도 없는 군법회의에서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총살됐다’며 부당한 죽음을 당했다고 결론짓고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을 권고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진실화해위원회가 헌법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법원 판결이 있어야 한다며 서훈을 미뤘다. 결국 2011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재심 신청을 냈다. 그런데 법원에서는 처음 판결한 곳에서 재심을 해야 한다며 대전 고등군사법원으로 넘겼다. 현재 일반법원과 군사법원 중에서 어디서 재심을 다룰 것인지를 검토하고 있는 상태다.
“1960년 4·19 후에 바로 서훈을 신청했더라면 이렇게 복잡하지도, 시간을 끌지도 않았을 거야. 그땐 명예회복이 다 된 줄 알았어. 그동안 우리가 다 바쁘게 사느라 신경을 못 썼지.”
두 사람의 얼굴에 회한의 빛이 가득했다. 늦게나마 아버지의 명예를 바로 세우는 데 여생을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사면이 먼저야. 재판에서 이기면 그 다음에 뭘 할지 형제들과 의견을 모아야지.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선친의 민족사상, 평화통일사상을 기리는 작업도 해야 하고, 아버지 전기나 평전도 만들어야지.”
‘원수 갚을 생각 말라’ 유언
▼ 부친이 처형된 후 남은 가족의 고생이 심했을 텐데.
“어머니가 부산과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노점장사를 하셨어. 형제들은 연탄배달을 했고. 김창룡은 이유도 없이 나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어. 그 부하로 있던 동창이 알려줘서 피할 수 있었지. 전쟁 중에는 아버지와 잘 알던 잭이라는 미 정보기관 한국지부장의 도움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어. 그때 그를 도와 대북침투공작대에서 일했어. 직접 북한에 가서 작전을 벌이기도 했지. 죽는다는 두려움 같은 건 없었어. 아버지를 잃은 후엔 산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졌으니까.”
▼ 미국은 어떻게 가게 됐나.
“전쟁이 끝났지만 수배령이 계속돼 한국에선 살 수 없었어. 잭이 미국으로 유학가라고 했는데, 그러려면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하고, 여권이 나와야 하고, 비자가 나와야 해. 비자는 잭이 도움을 주고, 신원조회도 담당자가 친한 선배라 문제가 없었는데, 여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사인을 해야 나왔어. 내 이름을 보고 여권을 내주겠어? 그래서 여권 발급 실무를 보던 친구가 꾀를 냈지. 여권 발급자 명단을 작성하면서 마지막 한 칸을 비워놨다가 이승만 대통령 사인을 받은 후 거기에 내 이름을 추가로 적어 넣은 거야. 공문서를 위조한 셈이지(웃음). 그렇게 해서 일주일 만에 출국했어. 여의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면서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라 결심했지.”
▼ 그랬는데 왜 다시 돌아왔나.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정착하려는데,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동생이 전화를 했어. 안 돌아오면 의절하겠다고 협박해서 할 수 없이 돌아왔지.”
▼ 그 사이에 아버지를 죽인 나라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건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며 우리에게 유서를 남기셨는데, ‘너희들은 누구에게 조금도 반감을 갖지도 말고, 아버지 원수를 갚을 생각도 말고,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라’는 것이었어. 아버지가 우리 형제를 공부시켜주지는 못했지만 그 이상의 것을 주고 가셨다고 생각해. 나라 사랑하는 마음, 민족 외에는 딴 거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셨으니까.”
▼ 돌아와서 무슨 일을 했나.
“김도연 박사, 장면 박사가 내게 정치입문을 권했는데 전혀 생각이 없었어. 아버지가 정치하다 그렇게 되셨으니 절대 정치는 안 한다고 맹세한 것도 있고,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몇 달 후 장면 박사가 ‘그럼 취직을 하라’고 해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외무부에 가겠다고 했지. 들어가서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일했는데 월급봉투 받아보니까 ‘청부 촉탁직’이라고 되어 있어. 계약직 청소부란 뜻이야. 어이가 없었지.”
▼ 곧바로 5·16이 났는데.
“그만두려고 국장에게 사표를 냈어. 그런데 새 장관 보좌관으로 온 이철희 대령이 부르더니 새 정부에서 함께 일해보자고 하고는 외무부 공보관 대변인에 임명하더라고. 나중엔 의전과장을 맡아 외국 귀빈 의전을 책임졌지. 의전과장은 사고가 많아 보통 6개월을 못 넘기는 자리였는데 나는 2년 넘게 했어. 나중엔 다른 부처나 시도에서도 외국 귀빈 초청 행사를 하면 모두 내게 지시를 받았을 정도였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때는 실무자로 북한에 다녀왔고.”
▼ 청와대는 어떻게 들어갔나.
“조상호 청와대 의전수석이 나를 좋게 봤나봐. 1974년에 부르더라고. 임명장을 받고 대통령께 신고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정말 내 아버지를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생각해서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라고. 뒤에도 한 번 더 그 말씀을 하셨어. 청와대에서는 의전비서관, 공보비서관을 했어.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셈이지.”
▼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하다보니 서거하실 때까지 있게 됐어. 나가라곤 안 했으니까 신임을 받았다고 해야지(웃음).”
“최태민은 김재규 희생양”
최필립 전 이사장(왼쪽)이 동생 최만립 전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선친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기고 있다.
“그건 아니야. 최태민에 대해 세상에 나돌던 소문은 사실이 아니야. 괜찮은 사람이었어. 권력자들이 나쁘게 왜곡한 거야. 당시 아무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비행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못했는데, 오직 큰영애만 했어. 누가 그런 자료를 줬겠어? 최태민이지. 그는 당사자 앞에서도 할 말은 다하는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화가 난 김재규가 뒷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는데, 나오는 게 없으니까 만들어서 집어넣었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최태민을 나쁘게 본 것도 잘못된 중정 기록을 보고 그런 거야.”
▼ 박근혜 대통령과는 어떻게 가까워진 건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을 때는 밤을 새서 지키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 교대로 했을 정도였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는 지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수석비서관도, 장관도 안 와. ‘낙동강 오리알 됐다’는 이야기나 하고 다니고. 자제분들이 스물두 평짜리 신당동 집으로 가는데 불쌍해서 눈물이 나더라고. 내가 아버지 잃었을 때 생각도 나고…. 그래서 나라도 보살펴주려고 했지.”
▼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대통령 서거 후 어느 날 합동수사본부에서 집무실 금고를 조사하겠다고 왔어. 우리는 ‘안 된다, 큰영애에게 허락받으라’고 했지. 큰영애는 ‘열어주라’면서 대신 내게 배석하라고 하더군. 금고에서 얼마가 나왔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합수부에서 그걸 가져가겠다고 해서 내가 막았지. 돈의 성격을 조사해서 정치자금이면 공화당으로 보내고, 개인 돈이면 유족에게 줘야지 왜 당신들이 가져가느냐고 따졌더니 그냥 가더라고. 그러곤 장례식 끝난 후 서빙고(보안사 분실)로 끌려갔어(웃음).
며칠 가두더니 ‘빨리 해외로 나가라’고 하더군. 그래서 바레인 주재 대사로 나가게 됐는데, 큰영애를 만나 ‘정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사표 내고 모시겠다’고 하니까 ‘그러지 마세요’ 하더라고. ‘지금 아버지가 사람을 잘못 써서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하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고.”
박근혜 대통령은 2001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며 최필립 전 이사장을 중앙위원으로 위촉했고, 2005년엔 자신의 후임으로 정수장학회를 맡겼다.
“개인적인 情 때문에…”
▼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도 많이 신뢰했던 것 같다.
“모르지. 그분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도운 건 두 분의 생각이 부친의 생각과 같다고 봤기 때문인가.
“개인적인 정(情) 때문이지. 물론 그분들에게 아버지처럼 나라를 잘 이끌겠다는 신념이 있는 걸 봤으니까 도운 거지. 모두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해. 나는 아버지의 이념은 이상이고, 현실은 좀 다르다고 봐. 아버지도 김구 선생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북한에 갈 때 반대하면서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설득하셨지.”
▼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지난해 12월 19일은 어떻게 보냈나.
“10시에 투표하고 오후에 베트남행 비행기를 탔어.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후 뭘 바라고 한 게 아니니까…. 난 그날까지만 이사장 하고 그만둔다고 전부터 말했어.”
대선 전, 야당과 좌파진영의 사퇴 압력에도 “이사장 그만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사람 아무도 없다”고 버티던 그는 박 대통령의 취임식 날 “박 정부가 들어서며 내 역할을 다했다. 정치에 말려들까봐 자리를 지켰으나 이제 물러나겠다”며 사직서를 냈다.
▼ 박 대통령이 당선되니 기분이 어떻던가.
“비행기 안에서 속보로 나오더라고. 지인들에게 전화도 오고…. 난 처음부터 당선을 확신하고 있었어. 박 대통령이 북한 문제, 통일 문제는 잘 해나갈 거라 생각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고가 깊어. 잘 하겠지 믿으면서도 막상 당선 확정 소식을 들으니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
최 전 이사장은 몇 년 사이에 두 번의 디스크 수술과 무릎 수술을 했다고 한다. 특히 3년 전엔 몸이 너무 안 좋았는데, 줄기세포치료로 호전된 것 같다고 했다.
▼ 3년 전이면 정수장학회 문제로 시끄러울 때인데, 몸도 안 좋으면서 왜 그만두지 않았나.
“그만둘 수 없었지. 있지도 않은 사실 가지고 거짓말로 몰아붙이는데 그만두면 그걸 인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니까.”
▼ 정수장학회는 어떤 사연으로 맡게 됐나.
“난 박정희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냐. 그럴 위치도 아니었고. 제안을 받았을 때 우리나라에 없던 좋은 사업이니까, 그 뜻을 살려야 하지 않겠나 해서 시작한 거지.”
“연봉 5900만 원 받았다”
1962년 설립된 정수장학회는 지난 50년 동안 3만8000여 명에게 531억 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장학생들은 현재 학계와 법조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에도 대학생 434명과 고등학생 120명, 해외 장학생 107명 등 총 661명에게 30억 원 이상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 임기 중 새롭게 추진한 일이 있다면.
“중국 연변 조선족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어. 국내 대학생 2~3명에게 줄 돈으로 조선족 대학생 42명에게 줄 수 있더라고. 그 생각을 한 게 아버지 덕분이야. 일제 때 만주에 간 조선인은 모두 독립운동을 하거나, 일본놈이 싫어서 이주한 분들이야. 그분들의 애국심을 우리가 잊으면 안 돼.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기에 내가 말했어. 내게 고마워하지 말고 조상들에게 고마워하라고. 우리가 같은 민족임을 잊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 베트남 하노이 대학에도 100여 명씩 장학금을 주고 있어. 고엽제 피해자 2세들에게도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하고. MBC 엄기영 사장 때부터 내가 부탁해서 2억 원을 더 지원받아 하는 사업이야. 베트남전쟁 덕분에 우리 경제가 일어섰다는 걸 잊어선 안 돼. 이제라도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했지.”
▼ 후임인 김삼천 회장에게도 이어가라고 당부했나.
“후임 이사장에게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지. 스스로 판단해서 좋으면 계속하겠지.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이야. 난 그 사람이 적임자라고 생각해. 정수장학금으로 영남대를 졸업했고, 회사를 다니다 창업해 성공한 사업가야.”
▼ 정수장학회 예산은 어느 정도인가.
“연 35억 원 정도인데, 장학금으로 30억 원쯤 사용해. 언론이 왜곡한 게 많아. 내 연봉이 2억 원이 넘는다고 보도했던데, 5900만 원이야. 운전기사, 비서 월급 등을 다 합쳐서 부풀렸더라고. 지금 이사장은 더 줄어서 연 5000만 원 받아.”
MBC 지분 매각의 진실
▼ ‘한겨레’ 기자와 통신보호법 위반혐의로 재판 중인데.
“그 친구는 얌전했어. 다른 기자들은 내 사무실로 불쑥 들어와 이것저것 묻곤 했는데, 그 친구는 밖에서 빙빙 돌며 눈치만 보더라고. 그래서 내가 들어와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했지. 거기서 몇 마디 했는데, 내가 이야기한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걸 짜깁기해서 내가 말한 것처럼 인터뷰 기사를 썼더라고.”
▼ 문제가 된 것은 이진숙 당시 MBC 기획홍보본부장과 MBC의 지분 매각을 논의한 회동이었다.
“그날 전화가 왔기에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 하고 끊었어. 그런데 내 전화기가 잘 안 끊어져. 그래서 보통은 휴대전화를 책상 뒤에 놔두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내 옆에 놓고 이야기를 한 거야. 전화기를 타고 들리는 소리를 몰래 녹음한 모양이야.”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정수장학회가 장학회 소유의 MBC 지분을 매각해 대학생 반값 등록금 재원으로 사용하겠다고 한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며 고발했지만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 MBC 지분 매각 논란의 진실은 뭔가.
“희망사항이긴 했지만 난 지분 매각 방안을 지시한 적이 없어. 정부 허가가 있어야 하고,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그런데 그날 김재철 사장이 방법이 있다며 전화를 해왔어. 이야기나 들어보자 해서 두 사람(이진숙 기획홍보본부장과 이상옥 전략기획부장)이 내 사무실로 왔던 거야. 저 사람들(야당과 진보언론)도 MBC 지분 매각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몰아간 거야.”
검찰이 밝힌 실제 녹음 내용에는 이 본부장이 “저희들이 추진한다면”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본부장이 최 이사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였음을 감안하면 ‘저희들’의 주체가 MBC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부산일보는 내가 매각 처리하려고 했어.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어. 그 기사가 나오던 그달 13일인가, 기자회견을 하고 매각 발표를 하려고 했어. 그런데 기사가 그렇게 나가는 바람에 무산됐지.”
‘한겨레’ 등은 그날 MBC 지분 매각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할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MBC 지분 매각 논의와 관련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과거 민주당이 집권하던 시절엔 그쪽에서 먼저 MBC지분을 매각할 것을 제안했다는 것.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민주당에서 임명한 방송문화진흥원장이었던 여성(이옥경 전 원장을 말하는 듯하다)이 있었는데, 인사차 나를 방문해서는 ‘총 지분이 6000억 원 가치나 되는데 1년에 20억 원 받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자기가 연구했는데 ‘지방 MBC를 다 팔아서 그 지분을 우리가 사겠다. 그게 서로 편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적도 있어.”
야당에서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을 매각하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논의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지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