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인맥, DJ의 총애, 그리고 ‘게이트’…“모두 내 불찰”
- “겸손하소, 나도 손바닥에 ‘겸손’이라 쓰고 다녔네”(1997년 DJ)
- “이건희 회장, 친서 써주며 외자유치 부탁”
- “사우디 왕자는 삼성 투자 원했지만 DJ는 대우만 챙겨”
- “DJ, 박주선 청와대 비서관 통해 해외도피 권유”
- 유아이에너지, 사상 첫 상장폐지 무효 판결 이끌어
상장사의 생사여탈권을 쥔 금융감독원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가 유아이 상폐를 결정한 이유는 ‘완전자본잠식’이었다. 600억 원 횡령 의혹도 제기됐다. 증선위는 유아이와 최규선(53) 대표를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증선위와 검찰은 잇달아 체면을 구겼다. 법원은 최 대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을 두 번이나 기각했다. 6월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유아이가 한국거래소를 상대로 낸 상폐무효소송에서 유아이의 손을 들어줬다. 상폐 결정이 법원에서 뒤집힌 첫 사례다. 유아이와 최 대표는 최근 소액주주 173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법원은 “상폐와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의 책임이 유아이와 최 대표에게 있다고 보기 힘들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거래소가 항소를 제기했지만 판결을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유아이 최 대표는 200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이다. 그 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홍걸 씨가 구속됐다. 지금은 자원 개발에 힘을 쏟는 사업가이지만, 그는 여전히 ‘문제적 인간’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게이트’ 이미지가 늘 그의 곁을 맴돈다.
7월 1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최 대표를 만나 4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최근 나온 법원 판결에 대한 얘기를 듣자고 만든 자리였지만, 화제는 자연스럽게 과거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는 대화 도중 여러 번 “그때는 정말 철이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돼 재임한 1997~2002년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나를 집단 이지메하고 있다. 이젠 모든 걸 극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금감원을 이기다
▼ 상폐무효결정이 나왔죠. 피해 규모가 컸는데.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피해 규모는 상폐 시점으로 보면 500억 원 정도, 주가 폭락 이전으로 치면 3000억 원가량 됩니다. 거래소든 증선위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죠.”
▼ 재상장을 추진하나요.
“당연하죠.”
▼ 이번 사건의 쟁점이 뭡니까.
“유아이는 2007년 쿠르드 정부와 이동식 발전설비(PPS) 납품 계약을 맺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증선위는 2007~2009년 유아이가 이미 쿠르드 정부에서 선수금을 받고도 이를 2011년까지 회계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겁니다. 또 쿠르드 정부와 병원 공사 계약을 한 뒤 선수금을 유아이가 아닌 제 개인회사를 통해 받아 횡령했다는 거죠. 선수금은 부채로 잡히기 때문에 이를 회계에 반영하면 유아이는 완전자본잠식 상태가 된다, 그런 논리입니다.”
▼ 유아이와 최 대표의 입장은.
“PPS의 경우 유아이가 대금을 받은 건 2007~2009년이 아니라 지난해 8월입니다. 제가 검찰 조사를 받게 된 뒤 쿠르드 정부가 이 사실을 확인해주면서 240억 원이 넘는 대금을 보내왔어요. 병원 공사는 계약만 하고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어서 돈을 받을 게 없었고요. 증선위나 검찰이 병원 공사 선수금이라고 주장하는 돈은 제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광업권을 해지하면서 받은 보상금입니다. 유아이는 쿠르드 정부로부터 이런 사실을 확인하는 서류를 받아 검찰과 증선위에 제출했고요.”
최 대표가 공개한 여러 건의 쿠르드 정부 자료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쿠르드 정부 총리와 최 대표가 맺은 계약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유아이는 2007년 2월 쿠르드 정부와 51MW 발전소 시설계약을 체결했으며 (…) 공사대금 지연 등으로 (쿠르드 정부는) 유아이에 많은 손실을 초래케 했다. 현재는 설치가 완료되어 발전기의 시험운전과 일부 토목공사만이 남아 있다. (…) 쿠르드 정부는 유아이에미화 2154만6000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한다. 합의서 체결일로부터 5일 이내에 유아이에 지불될 것이다.”(2012년 8월 6일, 발전소 정산 합의서)
화려한 인맥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조지 소로스에게 보낸 비밀 서한(왼쪽). 오른쪽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최규선 씨를 통해 사우디의 알 왈리드 왕자에게 보낸 친서.
▼ 지난해 8월 발전설비 대금이 들어온 뒤에도 논란은 계속됐죠.
“맞습니다. 증선위는 ‘돈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낙관했죠. 이미 받았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검찰도 돈이 들어오는지 두고 보자면서 수사를 미뤘어요. 그런데 정말 돈이 들어온 겁니다. 그러자 금감원은 부랴부랴 검찰에 ‘아무래도 이 돈은 최 대표의 해외 비자금 같으니 조사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다 슬그머니 이 부분에 대한 의혹을 철회했어요. 자기들 주장이 틀렸다고 인정한 겁니다.”
▼ 그럼 최종적으로 상폐가 결정된 이유는 뭔가요.
“병원 공사 문제였어요. 그런데 법원은 그것도 인정하지 않았죠. 쿠르드 정부에서 ‘병원 사업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라 선수금을 줄 이유가 없었다’고 공문을 보냈거든요. 증선위가 주장한 선수금과 실제 계약서상의 선수금이 맞지도 않았어요.”
최 대표의 ‘글로벌 인맥’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2009년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세계적인 투자가 조지 소로스, 중동의 워런버핏으로 불리는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등이 주요 인맥으로 거론된다. 인맥이 너무 화려한 나머지 오히려 이것이 그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최 대표는 “스승인 스칼라피노 버클리대 교수와 마이클 잭슨의 도움으로 전 세계 유력 인사들과 교유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유아이 홈페이지에는 토니 레이크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폴 렉소 전 미국 상원의원, 제프리 존스 전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소장 등이 고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10년 3월 영국의 한 언론매체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유아이에서 수십만 파운드의 자문료를 받았다고 보도해 화제가 됐다. 이들 고문단은 유아이가 이라크 사업을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 대표는 1997년 초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보좌역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화려한 인맥과 추진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 중 하나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최 대표는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어르신’ ‘선생님’ ‘대통령님’ 등으로 표현했으나 편의상 ‘DJ’로 호칭을 통일한다.
“DJ가 저를 총애하셨죠. 다들 ‘자네처럼 짧은 시간에 선생님(DJ) 혼을 빼버린 사람은 없었네’라고 했죠.”
得寵思辱
▼ DJ의 보좌역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가장 먼저 한 일이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딸 진지 만델라 초청이었어요. 진지 만델라는 만델라가 40년간 찼던 시계를 가져왔고, DJ는 망명생활 동안 들고 다닌 가방을 선물했어요. 이때부터 ‘김대중=한국의 만델라’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죠. 기가 막힌 캠페인이었어요. 그러나 제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97년 대선 직전 외환위기가 터진 뒤부터였어요. 조지 소로스의 투자를 주선했고,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의 투자도 이끌어내면서 DJ의 신임을 받았죠. 대우, 현대가 덕을 많이 봤죠(웃음).”
당시 그는 DJ의 외환위기 탈출 시나리오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 DJ 정부 초기 대통령 경제고문을 맡아 외자유치를 진두지휘한 유종근 전 전북지사는 200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 등의 투자는 최규선 씨가 나서서 이뤄진 것이다. 최 씨가 이들에게 편지도 쓰고 회담도 주선했다.”
▼ 그런데 막상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엔 빛을 못 봤죠. 청와대에도 못 들어갔고.
“좌충우돌하다 (DJ의) 신임도 잃고 역할도 잃었죠. DJ가 제게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자네는 두 가지만 고치면 반드시 대성을 해. 신중함과 겸손함이여’였어요. ‘나도 젊었을 때는 손바닥에다가 겸손이라고 써놓고 다녔네’라고 하시면서. 그때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잘 몰랐어요.”
최 대표는 DJ의 어투를 흉내 내며 상황을 재미있게 설명했다. 호남 출신이라 그런지 말투와 억양이 흡사했다. 그가 다시 ‘성대모사’를 시작했다.
“DJ가 그럽디다. ‘나도 누가 말하면 중간에 잘라버렸어요. 그거 틀렸습니다, 그래버리고. 근데 그게 아니에요. 남의 말을 잘 들어야 됩니다. 마이클 잭슨 방한도 자네가 다 했고, 소로스 투자도 자네가 다 했다고 하면, 그럼 나는 뭐가 되는가, 이 사람아’ 그런 말도 하셨어요. ‘득총사욕(得寵思辱)’이란 말씀도 하신 기억이 납니다.”
▼ 무슨 뜻인가요.
“총애를 받으면 욕 얻어먹을 준비도 해라.”
▼ 마이클 잭슨이나 조지 소로스를 한국에 데려온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어요.
“미친놈이라 그랬죠. 마이클 잭슨이 뭐 하러 오겠느냐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짝퉁 하나 구해 올 거라고.”
▼ 그런데 실제로 왔잖아요.
“DJ의 얼굴 사진이 스포츠신문 1면에까지 깔렸죠. 한마디로 난리가 나부렀지.”
▼ 견제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겠네요.
“대통령 당선 뒤 쓰던 안가가 있었어요, 삼청동에. 거기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저는 무시로 드나들었죠. 그래서 저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당선자 시절 하루는 김옥두 의원이 저를 찾아요. ‘안가로 빨리 오라’고. DJ가 저를 찾는다는 거예요. 정동영, 박지원, 김옥두, 김한길 같은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자리에 앉으니까 DJ가 제게 물어요. ‘어이, 소로스는 서울증권 인수하러 언제 들어오는가?’ 그래서 저는 별생각 없이 ‘당선자님, 그분은 1년 전부터 일정을 정해놓고 움직입니다. 현재 조정 중이니 기다리십시오’라고 말씀드렸죠.”
“이 주먹만한 것이…”
▼ DJ 앞에서 할 말을 다 했네요.
“얘기가 끝나니까 김옥두 의원이 저를 불러요, 안가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주먹을 들더니 ‘이걸 콱~ 이 주먹만한 것이…아주 죽여불랑게’ 그러시는 거예요.”
▼ 왜요?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거죠. ‘우리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라면서 화를 내시더라고요.”
▼ 맞지는 않았어요?
“한길이 형이 말렸어요. 김 의원에게 저를 가리키면서 ‘(DJ의) 양아들, 양아들’이라고 했죠, 참으라는 뜻으로. 그렇게 밉보여서 그런지 게이트가 터졌을 때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이고~, 절대 그렇게 행동 안 하죠. 제일 후회되는 건 역시 언론에도 보도된 것처럼 외자유치 한다면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전용기를 타고 다닌 일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안 나올 일이죠.”
▼ 대선 직후의 일인가요.
“그렇죠. 이건희 회장을 회장님의 자택인 승지원에서 서너 번 뵈었죠. 이학수, 지승림 같은 분들과 만났어요.”
승지원은 이 회장이 주요 인사를 면담할 때 쓰는 영빈관이다.
▼ DJ가 그 일을 보고받은 뒤 최 대표의 청와대 입성이 좌절됐다는 말도 있던데.
“사실일 겁니다. 대통령직인수위 때인 1998년 1월 제가 DJ에게 불려가 작살이 났어요. 그런 다음 1차 청와대 인선에서 빠졌죠. 당시 DJ 정부의 최대 화두가 재벌개혁이었는데, 재벌의 전용기를 타고 다녔으니 혼날 만도 했죠. 게다가 DJ는 삼성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 무슨 얘긴가요.
“DJ는 단 한 번도 삼성에 대해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1997년 12월 한국을 방문했던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가 정말 투자하고 싶어 했던 기업은 삼성전자였는데, DJ는 보고를 받고 ‘대우나 챙겨주게’ 그랬어요. ‘김우중 회장이 곧 전경련 회장이 될 거다’라면서. 의중을 읽었기 때문에 저는 알 왈리드 왕자와 삼성 간에 미팅도 잡아주지 않았어요.”
▼ 그런데 같은 시기에 최 대표는 이 회장 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삼성의 외자유치를 도왔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죠. 결국 알 왈리드 왕자가 삼성전자와 삼성자동차에 2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는데도 DJ 정부가 반대해서 성사되지 않았어요. 이 회장은 사우디 알 왈리드 왕자에게 보내는 친서까지 써주시면서 외자유치에 공을 들였는데.”
이건희 회장의 친서
한복을 입은 세계적인 팝 가수 마이클 잭슨과 최규선 씨. 최 씨가 안고 있는 것은 마이클 잭슨이 생전에 키우던 애완 침팬지 버블스.
‘한국 미래에 대한 왕자님의 자신감과 그에 따른 투자 결정은 대한민국 경제의 회복을 촉진시킬 뿐 아니라 다른 외국 투자자들의 추가 투자 결정을 유도하리라 믿습니다. (…) 왕자님의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고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 드리며 이런 제 뜻을 받아주기시 바랍니다.’(1998년 3월 19일 삼성 회장 이건희)
▼ 이 회장 전용기는 몇 번이나 탔습니까.
“인수위 때도 탔고, 이후에도 탔고…. 사우디에도 가고 브루나이며 다른 데도 가고. 대통령께 박살이 난 다음에도 탔으니까. DJ한테 혼날 때도 저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당선자님, 저는 저대로 할 일이 또 있습니다’ 그랬어요.”
▼ 청와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나요.
“국정상황실을 맡기로 했었죠. DJ가 제게 ‘어느 한 부서에 얽매이지 말고 일을 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 DJ 정부 5년간 어떻게 지냈나요.
“돈도 벌고 정치인으로 성공도 하고 싶었어요. 미국에서는 그런 사람을 많이 봤거든요. 그래서 기업에 외자를 유치해주고 각종 컨설팅을 하면서 지냈죠. 돈도 많이 벌었어요. 권노갑 고문의 특보를 맡기도 했고요.”
▼ 정권 초 기업들로부터 받은 외자유치 커미션, 컨설팅비는 얼마나 됩니까.
“한 70억 원 정도? ‘게이트’로 구속된 이후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 세금을 다 냈는데도 30억~40억 원이 남았어요. 1996년 마이클 잭슨 공연을 성사시키면서 번 돈을 합쳐서 지금의 사업을 시작한 겁니다.”
▼ 1997년 대선을 전후해 주로 어떤 기업인을 만났습니까.
“이건희, 김우중, 이학수, 최태원, 최원석, 이웅렬, 벤처협회장을 맡고 있던 메디슨 이민화 회장 등이었어요. 그때는 대기업 회장들이 저를 만나려고 줄을 섰으니까. 다 외자유치 때문이었죠. 이명박 정부 때 잘나갔다는 박영준도 당시 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걸요?(웃음)”
▼ 기업들에 실제로 도움을 많이 줬나요.
“성사가 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고. 아…정몽헌 회장도 여러 번 만났죠. 정 회장님이 금강산에 카지노 만드는 문제를 상의하셨어요. 그래서 현대그룹 임원들과 같이 라스베이거스에 갔죠. 벨라지오호텔 소유자 스티브 윈과의 자리를 만들어줬어요. 사업이 성사되진 않았지만.”
▼ 커미션은 어떻게 받나요.
“차명 통장을 받는 경우도 있고…, 방법은 많아요. 성공한 경우에만 받죠. 그리고 그때는 사람들을 만나서 어디다 옷만 걸어두면 돈봉투가 꽂혀 있었어요. 물론 그런 푼돈은 안 받았지만.”
▼ 당시 대우와 서울증권 인수 과정에서 상당한 돈을 받은 걸로 알려졌는데.
“대우에서 한 10억, 소로스가 서울증권을 인수하도록 도운 뒤에는 좀 많이 받았죠.”
“차명 통장 받기도…”
▼ 그런데 게이트 당시 검찰 수사에서는 대우나 서울증권에서 받은 돈은 문제가 안 됐죠?
“체육복표, 차병원 관련된 것만 처벌 받았죠. 당시엔 외자를 유치한 사람에 대해서는 좀 관대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검찰에서도 다른 건은 문제 삼지 않았죠.”
▼ 그렇게 돈을 받는 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적게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정상적인 컨설팅 비용이니까.”
▼ 왜 돈을 벌려고 한 겁니까.
“DJ를 보면서 돈이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돈을 번 다음 고향(전남 나주)에서 출마하려고 했어요.”
▼ 5년 내내 DJ 정부 인사들과 갈등이 심했던 걸로 압니다.
“DJ 장남인 김홍일 의원이 저를 미워했죠. 제가 홍걸이를 망친다고 생각하셨어요. 제가 당시 산업은행에서 투자를 받아 알 왈리드 왕자, 홍걸이와 함께 벤처투자사를 만들려고 했거든요. 일단 제가 먼저 회사를 만들고 DJ 정권이 끝나면 홍걸이가 합류하는 식으로. DJ도 허락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김홍일 의원이 그런 저를 너무 안 좋게 보셨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DJ가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오는 날 성남공항에서 DJ를 기다리면서도 같이 있던 권노갑 고문에게 ‘최규선이 이대로 두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 정권 차원의 경고도 많이 받았겠네요.
“박지원 수석, 전윤철 비서실장, 최재승 의원 등이 시그널을 보냈죠. 국정원은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했고요. 하루는 최 의원이 저를 불러서 ‘너 요즘 루이13세 마시고 다닌다며? 여자 연예인 데리고 놀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했더니 ‘너, 그러다 죽는다’ 하시더라고요. ‘그동안 먹은 거 다른 사람들한테 다 나눠주라면서.”
국정원이 최 대표를 도청했다는 사실은 2002년 터진 국정원 도청 사건에서 확인된 바 있다.
▼ 한마디로 ‘나대지 마라’ 그런 거네요.
“그런데 경고를 받고도 달라진 건 없었어요. 오히려 최 의원께는 ‘형님은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고, 저는 제 능력으로 먹고삽니다’ 그랬으니까. ‘이 정권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며 대들었죠. 그때 그분들이 절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오죽하면 DJ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말을 하셨대요. ‘규선이는 지 발로 교도소에 간 놈이다’라고. 인수위 때도 가관이었어요. 개인 운전사 데리고 다니고, 차에 비상등 달고 다니고…신호 안 지키려고요(웃음).”
▼ DJ와 관계가 어땠나요.
“1998년 9월경까지는 괜찮은 편이었어요. 그해 3월 알 왈리드 왕자가 한국에 왔을 때도 청와대 관저에서 대통령을 뵙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9월에 제가 사직동팀에서 조사를 받은 뒤부터 소원해졌죠. 사직동팀 조사가 끝난 직후 DJ가 당시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통해 ‘해외에 6개월 정도 나가 있으라’는 메시지를 전했어요. 조용해지면 다시 들어오라고.”
▼ 떠났나요.
“그때 조용히 떠났어야 했는데, 미국에 가도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일본에 머물던 권노갑 고문을 찾아갔죠. 그리고 그 분 특보가 됐고요.”
▼ ‘최규선 게이트’가 시작되자마자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홍걸 씨에게 돈 준 사실을 자백했죠.
“그렇게 하면 청와대가 저를 보호해줄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불면 아차! 하고 저를 챙길 줄 알았죠. 저 나름대로 계산을 한 겁니다.”
▼ 홍걸 씨에게 돈을 주고 가깝게 지낸 건 정치적으로 재기하기 위해서?
“그렇죠. 일종의 보험이죠. 대통령 아들이니까. 이희호 여사의 친아들이니까.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한 거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전혀 아니던데(웃음)…. 하지만 나중에는 홍걸 씨와 인간적으로 정말 친한 사이가 됐어요.”
▼ ‘게이트’ 이후 홍걸 씨와 만난 적이 있나요.
“2006년쯤 연락이 와서 만났어요. 껴안고 그러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홍걸 씨가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할 때였어요. 제게 유아이 중동지사에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마침 두바이에 저희 지사가 있어서 생각해보자고 그랬어요. 부모님은 자기가 설득하겠다고 했고.”
▼ 어떻게 됐나요.
“당시 제가 신건 전 국정원장을 멘토로 삼고 있었는데, 그분이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너희 둘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다고. 그래서 없었던 일이 됐죠.”
한나라당으로 전직?
2001년 여름, 최 대표는 갑자기 한나라당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던 홍사덕 의원 캠프에 합류한 것. 당시 홍 의원의 캠프가 있던 사무실이 현재 유아이 강남 본사다.
1997년 5월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한 넬슨 만델라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딸 진지 만델라 부부. 당시 이들은 최규선 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전에 잊지 못할 일이 있었어요. 2001년 1월인가, 눈이 아주 많이 오던 날이었어요. 권 고문이 대통령을 뵙고 와서 제게 전화를 했어요. 평창동 집으로 오라고. 그래서 갔더니 홍걸 씨도 와 있어요. 그날 권 고문이 제게 ‘규선이, 이제 자네는 우리와 끝이네’ 그러는 거예요. 홍걸 씨에게도 ‘홍걸이도 잘 들어라. 이제 부모님 괴롭히지 말고 규선이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홍걸 씨가 ‘아저씨, 저희가 뭘 끝냅니까’ 하며 따지니까, 권 고문이 버럭 화를 내면서 ‘더 이상 국정에 부담 주지 마라’고 하시는 거예요. 제게는 국회의원 공천을 줄 생각이 없으니 한나라당 가서 공천을 받든지 무소속으로 나가든지 알아서 하라면서. 저와의 문제 때문에 홍걸 씨가 이희호 여사와 여러 차례 다퉜어요.”
▼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는데, 아마도 김홍일 의원이 난리법석을 떤 것 같아요. 그즈음 김은성 국정원 차장도 저를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자기 사무실로 불러서 ‘최 박사님께서 추진하시는 사업, 우리가 무조건 막을 테니 그렇게 아세요’라고 했고요. 그런데도 저는 ‘이 정권이 설마 나에게 뭘 어떻게 하겠냐’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한나라당을 기웃거린 겁니다. 5, 6월부터 홍사덕, 윤여준을 만나러 다녔죠.”
▼ 그 후로는 동교동 사람들과 접촉한 적이 없나요.
“홍걸 씨 외에는 만난 사람이 거의 없어요.”
▼ 그런데 2008년 공기업 수사 당시 최 대표에게서 뒷돈을 받은 혐의로 김상현·정대철 전 의원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김상현 전 의원은 구속까지 됐잖아요.
“솔직히 그 사건은 정말 억울합니다. 정 전 의원은 무혐의가 나왔죠. 제가 정 전 의원에게 뭔가 대가를 바라고 3000만 원을 줬다는 건데, 사실이 아닙니다. 그 돈은 정 전 의원의 모친인 이태영 박사 기념사업회에 기부한 거예요. 영수증 처리도 다 했고, 그리고 정대철 전 의원은 게이트로 구속됐을 때 구치소에서 만난 ‘빵동기’입니다(웃음).”
▼ 김상현 전 의원은요?
“검찰은 제가 김 전 의원에게 건넨 1억6000만 원이 석유공사의 이라크 바지안 광구 컨소시엄에 참여케 해달라는 청탁으로 건넨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법원도 그렇게 판단했고.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김 전 의원이 제게 ‘아들 사업에 투자를 해달라’고 요청하신 거예요. 그래서 드린 겁니다. 순수하게 그분의 인간미에 반해서. 그리고 그 당시 김 전 의원은 그런 부탁을 처리할 능력도 없는 처지였어요.”
▼ 석유공사 컨소시엄에 참여케 해달라는 청탁을 한 적이 없나요.
“그 사업은 제가 청탁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쿠르드 정부는 제가 참여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어요. 그런 사실은 석유공사 회의록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석유공사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아이의 참여 여부는 석유공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쿠르드 정부가 정한 문제입니다. ‘유아이하고 같이 하면 하고, 안 그러면 마라’라는 정도의 수준에 이르는 어떤 강압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2007년 11월 7일)
▼ 정치하겠다는 꿈은 완전히 접었나요.
“2002년 게이트를 겪은 뒤론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죠. 정치를 포기한 뒤로 해외 네트워크는 더 탄탄해졌습니다.”
“정치 꿈 접었다”
▼ 그런데 유아이는 2007년 이후 줄곧 적자입니다.
“자원개발사업은 단기적인 성과를 바라고 할 수 없어요. 바지안 광구에만 그동안 160억 원 이상의 탐사비용이 들어갔어요. 그동안 손실액을 다 합치면 700억 원쯤 되는데, 저는 이것도 투자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동안 유아이이엔씨 같은 개인 회사를 통해 해외에서 돈을 벌어 유아이에 투자해왔어요. 2005년경부터 제가 지금까지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1500억 원 정도 됩니다. 그중 상당액이 유아이에 투자됐죠. 제가 유아이의 장래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투자했겠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최 대표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게이트를 겪은 뒤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어요. 그러나 성공한 사람의 과거는 비참할수록 더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게이트 최규선’을 극복해내겠습니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