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교 중퇴 학력에 난독증까지 타고났다. 하지만 무모하리만큼 과감한 도전정신,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는 각오가 런던의 작은 음반가게를 40여 년 만에 항공, 통신, 호텔, 레저, 금융 등 400개 계열사를 거느린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나체로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여승무원 복장으로 승객에게 음료수를 나눠주는 등 사업 홍보용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하다.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이야말로 창조경제의 아이콘이 아닐까.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괴짜 경영자’라는 말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경영인이 또 있을까. 버진애틀랜틱, 버진블루, 버진레코드, 버진모바일, 버진콜라 등을 거느린 버진그룹의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63)은 자신의 회사보다 그 자신이 더 유명한 인물이다. 46억 달러의 재산을 지닌, 영국 4위의 대부호인 그의 명성은 단지 재산이나 사업 규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브랜슨 회장은 고교 중퇴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자수성가로 버진그룹을 일군 신화적 인물이며, 그가 창업한 회사는 한결같이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전형적인 벤처 기업이다. 그는 요트와 열기구로 대서양을 횡단하고, 나체나 여장도 서슴지 않으며 그 자신을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은 유명 브랜드로 만들었다. 사업 홍보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그는 아직도 ‘세계적 대기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세계적 대기업을 만들었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회사 이름을 ‘최초’라는 뜻이 담긴 ‘버진’으로 짓고,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서 직원들에게 ‘한계란 없다’고 강조하며, 놀라운 비즈니스 감각으로 성공 신화를 일군 그의 드라마 같은 삶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창의성이 넘치는 경영자로 일컫는다.
이런 점에서 브랜슨 회장은, 애플이라는 한 회사의 창업자가 아니라 세상을 바꾼 위대한 혁신가로 평가받는 스티브 잡스와 비견할 만하다. 누구나 창조경제를 논하지만 아무도 그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지금, 창조경제를 시도하려는 모든 이가 벤치마킹할 만한 인물이 바로 브랜슨이다.
엉뚱한 아들 믿어준 어머니
브랜슨은 1950년 7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대법관, 아버지는 변호사인 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그가 고교 중퇴로 학력을 마감한 이유는 난독증 때문이다. 갖가지 괴짜 행동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외향적일 것으로 여기지만, 실상 그는 수줍음이 많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난독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교육열이 높았던 그의 부모는 아들을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에 보냈지만 당연히 성적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브랜슨은 어릴 때부터 사업적인 감각이 뛰어났다. 16세 때는 ‘스튜던트’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스튜던트’는 그에게 제법 쏠쏠한 돈을 안겨줬다. 잡지에 실은 인기 음반 광고가 대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그의 미래를 우려했다. 브랜슨이 고교를 중퇴할 때 당시 교장이 그의 엉뚱한 행동과 발상을 걱정한 나머지 “넌 교도소에 가거나 백만장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제국의 시초, 버진레코드
이런 브랜슨을 누구보다 격려하고 지지해준 사람은 어머니 이브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네가 좋아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라”며 아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브랜슨이 사업 초기이던 1970년대 초 골치 아픈 법적 문제에 얽혀 자금난으로 고전할 때 가족 저택을 저당 잡혀 빌린 돈으로 아들의 벌금도 대신 내줬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지금껏 브랜슨의 경영철학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
1971년 그는 이때까지 모은 돈을 털어 런던의 번화가 옥스퍼드 거리에 작은 우편주문 전용 음반 판매회사 버진레코드를 세웠다. 이 작은 가게가 40년 후 세계적 대기업의 시초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한 직원이 “우리 회사는 사장이나 직원이나 일하는 사람이 모두 초보자이니 버진이라는 이름을 쓰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1972년 22세의 브랜슨은 직원들과 술집에 앉아 회의를 시작했다. 당시 15세의 음악 천재로 평가받던 마이크 올드필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열다섯 살짜리가 그 모든 악기를 그토록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니 대단하지 않아?” “그런데 음반 회사들은 왜 관심이 없는 걸까.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잖아.” “그럼 우리가 직접 하자. 직접 제작사를 차려서 버진 레코드의 첫 번째 작품으로 마이크의 앨범을 발표하는 거야.”
사실 직원들은 그때 브랜슨이 좀 취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버진레코드는 소규모 우편주문 사업을 하고 있었을 뿐 음반을 직접 제작해 유통하자는 아이디어는 ‘도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올드필드의 앨범 ‘튜블러 벨스’는 5년간 음반 차트에 올라 영국에서만 200만 장 넘게 팔렸다.
브랜슨은 임차료가 싼 시골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제대로 데뷔조차 하지 않은 풋내기 음악가들에게 스튜디오를 빌려줘 연습과 작곡을 하게 했다. 대형 음반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기괴한 음악가들이 주요 타깃이었다. 올드필드의 대성공 이후 1970년대 펑크록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세계 음악계를 뒤흔든 섹스피스톨스, 롤링스톤스, 보이 조지, 필 콜린스, 재닛 잭슨 등과 잇따라 계약하면서 버진레코드는 세계적인 음반사로 발돋움했다. 브랜슨은 버진레코드를 1987년 주식시장에 상장했고 1992년 무려 10억 달러(약 1조1500억 원)를 받고 대형 음반사 EMI에 팔았다.
저비용 항공사 元祖
브랜슨이 본격적으로 세계적 기업을 일구기 시작한 시점은 괴상한 항공회사를 만들면서부터다. 바로 저비용 항공사의 시초로 평가받는 버진애틀랜틱이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자신의 여행 중에 얻었다.
1980년대 초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 가려고 했던 브랜슨은 자신이 타려던 비행기가 취소되자 몇몇 사람과 비행기 한 대를 전세 내기로 했다. 전세 비용은 2000달러(약 230만 원). 당시 이 비행기를 타려던 사람의 숫자로 1인당 비용을 나눠보니 39달러가 나왔다. 우리 돈 약 5만 원에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은 비행기 여행이 지금처럼 대중화하지 않은 당시엔 파격 그 자체였다.
브랜슨은 그 자리에서 항공사 설립을 결정했다. 주변 사람들이 “음반회사가 무슨 항공회사를 만든다는 거냐, 반드시 실패한다”고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집념과 고집이 1984년 버진애틀랜틱을 탄생시켰다.
사업 초기엔 당연히 어려움이 뒤따랐다. 영국의 국영 항공사 브리티시항공이 워낙 대형 경쟁자인 탓에 비행기 1대로 출발한 버진애틀랜틱은 도저히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많았다. 신규 진입자에 대한 브리티시항공의 방해 공작도 드셌다.
하지만 브랜슨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기존 항공사의 기내 서비스가 엉망이어서 불쾌했던 경험에 착안해 서비스를 대폭 개선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의심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비디오, 음악, 게임, 목욕, 미용, 안마까지 기내 서비스로 제공했다. 지금은 대다수 항공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지만 1980년대만 해도 혁신적인 구상이었다.
여객기에 비치한 물품도 최고급이었다. 승객들이 멋진 디자인의 소금통과 후추통을 자꾸 가져가자 브랜슨은 아예 이양념통 바닥에 ‘버진애틀랜틱에서 슬쩍해온 것’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승객의 도난 행위를 익살스러운 홍보 문구로 바꿔버린 셈이다. 즐거움과 유머, 도전정신으로 사업을 벌이는 그의 인생관이 집약된 행위다.
우주관광으로 눈길
이후 버진애틀랜틱은 승승장구해 세계적 항공사로 거듭났다. 자신감을 얻은 브랜슨은 2000년 호주에서 버진블루(現 버진오스트레일리아)를 만들어 또다시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유로벨지안항공, SN브뤼셀항공 등과의 합병으로 버진애틀랜틱의 덩치를 더욱 키워낸 브랜슨은 이제 우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올해 3월 브랜슨은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우주여행사 버진갤럭틱의 민간 관광우주선 ‘스페이스십2’가 자체 로켓 엔진으로 첫 우주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스페이스십2는 대형 운반기 화이트나이트2에 실려 고도 1만5000m까지 올라간 뒤 분리에 성공했다. 순식간에 초음속을 돌파해 마하 1.2까지 속도가 올라간 이 우주선은 16초 뒤 고도 1만7000m에 도달했다. 이후 서서히 고도를 낮추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의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브랜슨은 1969년 TV로 지켜본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장면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자신과 가족의 우주여행을 오랫동안 꿈꿔왔다. 2004년 9월 그는 단순히 자신과 가족의 모험 정도가 아닌 대대적인 우주관광사업 구상을 밝히고 버진갤럭틱을 설립했다. 20여 년 전 버진애틀랜틱을 설립할 때처럼 많은 사람이 황당한 발상이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브랜슨은 보란 듯이 9년 만에 일반인 우주여행의 꿈을 실현 직전 단계까지 성공시켜 자신을 비판하던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고공에서 우주선 로켓에 점화해 초음속 비행을 한 민간 항공사는 버진갤랙틱이 처음이다. 비용도 1인당 20만 달러(약 2억2000만 원)로 비교적(?) 저렴하다. 기존의 우주비행은 수천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로켓을 지상에서 쏘아 올리는 방식으로 시도됐다. 우주선이 지상에서부터 올라가니 엄청난 비용이 든다. 하지만 브랜슨은 우주관광선을 운반용 항공기에 실어 고도 1만5000m까지 올려보낸 뒤 로켓에 점화해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지상 100㎞ 고도의 우주 경계까지 다시 올리는 방식을 채택해 비용을 크게 낮췄다.
스페이스십2는 한 번에 2명의 조종사와 6명의 승객을 싣고 우주 경계에서의 6분간 무중력 상태 경험을 포함한 3시간 비행에 나설 계획이다. 러시아의 우주관광처럼 엄청난 체력 조건과 장기간의 훈련은 필요 없다. 20만 달러의 요금 역시 러시아에서 수개월에 걸친 우주인 훈련을 포함해 받는 우주관광비의 100분의 1 수준이다. 이미 560여 명의 예약자가 2만 달러의 계약금을 내고 예약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부부, 애시튼 커처, 톰 행크스 등이 예약자 명단에 포함됐다.
이번 시험비행 성공으로 브랜슨은 내년 상반기 첫 상업 우주관광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우주관광사업이 활성화하면 브랜슨은 세상에 없던 사업을 새롭게 창조해 거대 시장으로 키운 공로자이자 혁신가로 거듭날 것이다.
女裝, 대포, 열기구 횡단…
브랜슨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던져 회사 홍보에 나섰다. 스스로 화제를 몰고 다니며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하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면서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든 셈이다. 화제의 인물이 되기 위해 그만큼 노력하는 부호도 찾기 힘들다.
브랜슨은 1985년 ‘버진애틀랜틱 챌린저 2호’라는 요트를 타고 세계기록을 2시간 줄여 대서양을 횡단했다. 이듬해부터는 ‘버진애틀랜틱 플라이어’라는 이름의 대형 열기구를 타고 대서양을 수시로 횡단했다. 1991년 1월에는 태평양 횡단에도 성공했다. 일본에서 캐나다 북부 북극지역까지 1만800km를 열기구를 타고 비행한 적도 있다. 2004년 3월에는 수륙양용 차량을 이용해 1시간 40분 6초의 기록으로 도버해협을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브랜슨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이끄는 버진그룹을 동시에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음료회사 버진콜라를 설립했을 때는 강력한 경쟁자 코카콜라에 맞서 무명 브랜드 버진을 알리기 위해 미국 뉴욕 한복판에 탱크를 몰고 들어가 맨해튼 번화가 타임스퀘어의 대형 광고 간판에 있는 코카콜라 광고에 가짜 대포를 쏘는 장면을 연출했다. 또 버진의 이름이 담긴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리도록 하기 위해 직접 금발가발에 웨딩드레스까지 입고 타임스퀘어에 여장(女裝)을 하고 나타났다.
1998년 자서전을 낼 때도 기행(奇行) 마케팅을 극대화했다. 그의 자서전 이름은 ‘내 동정을 잃으며(Losing My Virginity)’다. 버진그룹의 버진이라는 단어를 패러디한 셈이지만 처녀성 상실을 의미하는 듯한 이상야릇한 책 이름 때문에 자서전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지난 5월에는 호주 퍼스에서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로 향하는 저비용 항공사 에어아시아 비행기에 섹시한 빨간색 여승무원 유니폼을 입고 탑승했다. 스타킹을 신기 위해 다리털을 밀고 곱게 화장까지 한 그는 승객들에게 음료를 서비스하고 화장실도 청소했다.
그의 깜짝 변신이 벌칙 수행에서 비롯됐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브랜슨은 2010년 자동차 경주 포뮬러원(F1) 경기에서 영국 프리미어리그 퀸즈파크 레인저스의 구단주 토니 페르난데즈 회장과 순위 내기를 하다 패했다. 페르난데즈 회장은 브랜슨에게 벌칙으로 자신의 항공사 에어아시아에서 승무원 노릇을 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두말없이 따랐다. 브랜슨은 “승무원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하이힐 신기를 연습했다”며 활짝 웃었다. 비록 벌칙이었으나 덕분에 그는 더 유명해졌다.
전과자도 OK…독특한 채용 전략
괴짜 CEO 브랜슨은 채용 전략 또한 독특하다. 브랜슨은 2011년부터 버진 계열사에 전과자를 채용했다. 브랜슨은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다”며 입사 지원서 항목에서 범죄 관련 기록란을 없앴다. 입사지원서에 전과 기록이 있는 사람은 면접 기회를 얻기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바꿔보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브랜슨은 전과자의 채용을 늘리라고 세계 각국 채용 담당자들을 직접 독려했고, 전과자에게 허드렛일을 주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그는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자리를 얻은 사람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기엔 개인적 경험도 작용했다. 소년시절 그는 난독증이 있는데도 학생잡지 ‘스튜던트’를 창간했다. 그는 누가 봐도 버거워 보이는 일에서 보란 듯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고 이 잡지는 30년 후 버진이라는 대그룹의 모태가 됐다. 우연히 얻은 기회가 자신을 세계적인 사업가로 성장시켰듯 전과자들도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든지 숨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브랜슨이 10대 때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던 것도 전과자 채용 전략의 배경이 됐다. 브랜슨은 인터뷰에서 “그때 내가 실수를 저질러 전과자가 되고 그 때문에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면 지금 버진그룹에서 일하는 6만여 명은 직업을 갖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브랜슨은 2009년 출소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민간단체 코믹릴리스의 초청으로 호주 멜버른의 한 교도소에서 일일 죄수 체험을 했다. 그곳에서 “과거 돈 한푼 없이 교도소를 나선 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지내다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으로 돌아왔다”는 죄수의 말을 듣고 전과자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범죄의 유혹에 빠지는 악순환을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의 갖가지 기행 때문에 일각에선 전과자 채용 또한 버진그룹 홍보를 위한 ‘쇼’가 아니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브랜슨은 “이윤을 최대화하는 것이 더 이상 기업의 목표는 아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제도일 뿐이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람과 지구를 돌보는 일”이라고 이를 반박했다.
실제로 그는 환경문제 해결에 앞장선 공로로 2008년 유엔에 의해 올해의 시민으로 선정됐다. 지구온난화 문제 해결에 관심이 많은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도 ‘절친’이다. 그는 2006년에 이미 “향후 10년간 버진항공과 버진철도가 벌어들이는 이익의 상당액을 지구온난화를 해결하는 데 쓰겠다”고 약속했다.
브랜슨은 버진그룹의 전과자 고용 비율을 향후 전체 직원의 10%까지 높이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최근에는 전과자 채용 문제를 사회 캠페인으로 확산하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브랜슨은 막스앤스펜서의 마크 볼랜드 최고경영자 등 7명의 영국 기업인과 함께 더 많은 기업이 전과자 채용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기고문을 신문에 싣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창조경제가 화두다. 보통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행을 거듭하지만 실적이 탁월하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경영자, 지식과 학벌이 아닌 적극적인 태도와 열정을 중시하는 경영자, 직원에게 돈을 많이 주는 회사가 아니라 즐거움을 안겨주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경영자 브랜슨이야말로 진정한 창조경제의 아이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