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전도하는 마음으로 미술사 연구…외롭지 않아”

미술평론가 유홍준

  •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kimhoki@yonsei.ac.kr

    입력2015-03-19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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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 잡지에서 글쓰기 배워
    • 어디든 세 번 이상 다녀온 후 글 쓴다
    • 저술이든 강연이든 대중과 함께
    “전도하는 마음으로 미술사 연구…외롭지 않아”
    유홍준(66) 명지대 석좌교수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필가 중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업적은 세 가지다. 첫째, 이제까지 350만 권 정도 팔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 대중적 저술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둘째, ‘화인열전’ 등 전문적 연구를 통해 인물사로서의 한국 미술사를 체계화해왔다. 셋째, 문화재청장을 맡아 문화 행정을 혁신했고, 숱한 강연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활성화했다. 미술사가이자 평론가인 그를 만나 우리 미술과 문화의 선 자리 및 갈 길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2월 26일 명지대 한국문화유산자료실에서 진행됐다.

    김호기 1949년에 태어나셨습니다. 광복 70년과 삶의 궤를 같이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유홍준 광복 70년이 뚜렷한 실체로 다가오는 것은 별로 없어요. 예를 들어 4·19가 60년이 됐다고 하면 다가오는 게 있겠지요.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광복은 내게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생활 체험으로서의 감회는 없고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거리로 들어와요. 역사적인 거리가 있다고 해서 물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일제강점기 식민 잔재 청산을 해결하지 못해 지금까지 문제가 되는 것들을 이제는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학 시절과 글쓰기 체험

    김호기 연보를 보니 서울에서 태어나 청운초등, 경복중, 중동고, 서울대 미학과를 다니셨는데요.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무엇이 먼저 생각나시는지요.



    유홍준 우리가 낭만적인 아카데미 분위기에서 대학을 다닌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어요.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의 미라보 다리’라고 하는 개천가, 학림다방이 떠오르고, 마로니에 그늘 아래 벤치에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 책도 함께 보고 토론하던 게 기억나요. 1969년 3선 개헌 때는 데모하다 끌려가고 무기정학을 받았어요. 낭만적인 세대였지요.

    대학 4년 동안 교수들한테 영향 받은 건 별로 없었고, 선배와 친구들로부터 배웠어요. 김윤수 교수가 유일하게 학생들과 소통하던 선생님이었는데,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정릉에 있는 선생님 댁에 자주 찾아갔어요. 당시 문리대에서 발간한 ‘형성’이라는 잡지에 안병욱, 최재현, 하영선 등 훗날 대학에서 활동하게 된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지성이 살아 있는 분위기였죠.

    김호기 우리 사회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문필가 중 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글쓰기는 언제 처음 하셨는지요.

    유홍준 훈련을 따로 한 적은 없고, 두 가지가 중요했어요. 하나는 대학 다닐 적에 선언문을 많이 쓴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잡지 ‘공간’과 ‘계간미술’에서 일한 체험이에요. 잡지의 장점은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만나는 지역이라는 점이에요. 아카데미즘이 가진 체계성과 저널리즘이 가진 현실성을 결합하는 방법을 배웠지요.

    개인적으로는 ‘문장’에 실린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글을 좋아했어요. 지금도 복간된 19권을 다 갖고 있어요. 특히 이태준의 글은 참 명쾌했어요. 이 사람들의 글에 모더니즘, 민족주의, 진보주의가 절묘하게 깔렸다는 것을 느꼈어요. 김용준, 백낙청, 염무웅, 리영희의 글도 좋아했어요. 훈련을 따로 한 것은 아니고 우리 시대에 적합한 어법이랄까, 그런 것을 찾았던 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같은 책을 쓰게 한 것 같아요.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

    김호기 그동안 선생의 학문적, 대중적 활동을 돌아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듯합니다. 한국 미술사 연구가 한 축이라면, 문화유산을 포함한 전통의 재발견이 다른 한 축을 이뤘습니다. 미술사 연구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유홍준 미술평론가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한 게 1984년이었어요. 당시 미술대학에 현대미술, 서양미술사, 동양미술사는 정규 과목으로 있는데, 한국미술사는 과목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1984년 서울대, 홍익대, 이화여대 미술대학에 포스터를 한 장씩 붙여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라는 공개강좌를 한다’고 광고했어요. 신촌의 한 대안문화 공간에서 시작했지요. 그 강좌를 해마다 거르지 않고 1990년대까지 했어요.

    문화사를 쓰려면 미술사가 70~80%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부르크하르트, 하우저, 곰브리치 등 최고의 문화사가들은 미술사가들이기도 하지요. 인문학의 꽃이 문화사라면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라고 생각했고, 한국미술사를 올바로 쓰는 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 역사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라고 일찍이 생각했던 셈이에요.

    김호기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도 거의 절반은 문학이고 나머지 절반은 주로 미술입니다. 문학보다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에 이르는 미술에 관한 내용이 제겐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양 친구들에게 예술은 곧 미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홍준 그렇게 중요한 장르를 그동안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었던 거죠. 나는 미술사를 통해서 우리 문화사를 이야기할 적에 온 국민이 올바른 미술관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미술사를 연구하고 발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학문적인 목표예요. ‘100만인을 위한 수학’이라는 책이 있듯이 ‘100만인을 위한 한국 미술사’라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갖고 있어요.

    한국인이 그 책만 읽으면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 말이에요.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역사를 기억할 때는 유물과 함께 기억해라, 그러면 시대상이 보이는 법이지요. 미술사가 문화사와 생활사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고 공부해온 게 문화유산 답사기로 나온 것이지요.

    “전도하는 마음으로 미술사 연구…외롭지 않아”
    김호기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홍준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입니다. 1권만 150만 권이 나가고 7권까지 나온 시리즈 전체가 350만 권 정도 판매됐습니다. 답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요.

    유홍준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의를 시작하면서 수강생들과 함께 다녔어요. 성심여대(현 가톨릭대) 국사학과에 강의를 나갈 때도 학생들과 같이 갔고요. 현장에 가서 좋아하는 학생들을 보면 감동적이었어요. 영남대 교수가 돼서 남도 답사 1번지를 쓸 수 있게 됐다는 게 가장 큰 복이었어요. 영남 출신 학생들을 이끌고 호남 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했어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장수하게 된 비결의 하나는 시리즈로 쓰면서 수준을 높였다는 점에 있어요. 1권보다 2권, 2권보다 3권의 이야기 수준이 높았던 거죠.

    다산 초당과 감은사지

    김호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1권 표지가 감은사지 석탑입니다. 감은사지에서 문무왕 대왕암으로 걸어가는 길을 저는 내심 우리나라 제일의 길로 꼽아왔습니다. 한 칼럼에서 그 내용을 쓰기도 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문화유적으로는 어떤 것을 꼽으시는지요.

    유홍준 다산 초당과 감은사지죠. 그래서 책의 시작은 다산 초당으로 하고 표지는 감은사로 했죠. 둘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달라요. 감은사지에서는 우리 고대국가의 기상과 자신감 넘치는 문화 창조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요. 다산 초당에서는 어떤 어려움 속에도 꿋꿋이 자기를 지켜간 지식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고요.

    김호기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경주에 가면 대왕암부터 찾아가야 한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감은사지와 대왕암은 당당하면서도 고결한 민족문화유산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북한 문화유산 답사도 하고, 최근에는 ‘일본 문화유산 답사기’를 발표했는데, 중국 문화유산 답사 계획은 없는지요.

    유홍준 중국이든 서양이든 답사를 안 해서 못 쓰는 곳은 없어요. 독자들은 알겠지만 한 번 갔던 인상을 가지고 쓴 글은 없어요. 5번, 10번 다녀온 다음에 쓰거든요. 아무것도 모르고 갔을 때, 공부하고 갔을 때, 소화하고 나서 갔을 때를 포함해 최소 3번은 가야 쓸 수 있는 거죠. 문화사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중요한 지역은 모두 3번 이상 갔다 왔어요. 로마, 피렌체, 베이징, 상하이, 난징, 시안 등을 다녀왔어요.

    중국 문화유산 답사에는 세 가지가 중요해요. 고조선·고구려·발해 유적 답사, 진시왕릉·용문석굴 등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답사, 그리고 조선 시대의 연행 사신들이 갔던 길의 답사예요.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세 번째예요. 조선시대에 중요한 질문의 하나는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였어요.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중국을 어떻게 보고 이해했는지는 연행 사신들의 길에 많이 나와요. 담원 홍대용,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등의 연행 이야기를 답사기 형식으로 쓰면서 오늘의 의미를 묻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전통이란 무엇인가

    김호기 우리에게 조선시대에 중국은 무엇인가, 20세기 전반에 일본은 무엇이고, 20세기 후반에 미국은 무엇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한 쌍을 이룹니다. 그 경계를 분명히 나누기 어렵지만 전통과 현대는 상반된 가치이자 영역입니다. 사회학에서 전통은 ‘전통문화(traditional culture)’와 ‘문화전통(cultural tradition)’으로 구별되는데, 전통문화가 과거 전통사회의 문화를 말한다면, 문화전통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축적된 문화양식으로서 현재 사회환경 속에도 유지되는 문화를 의미합니다. 전통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유홍준 전통이 가진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 번째는 계속 이어간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뀐다는 것이에요. 고착된 전통은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여성 한복은 계속 입어 온 덕에 예쁜 개량한복이 나오는데 남성 한복은 안 나오잖아요. 허리띠, 대님, 이거 얼마나 불편해요. 위창 오세창의 사진을 보면,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고름이 없어요. 단추를 호크 식으로 달았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입었으면 시대에 맞는 한복이 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거죠. 계속 입어온 여성 한복은 전통으로 살아남고, 남성 한복은 옛날에 그랬다고 하는 것으로 끝나버린 인습이 된 거죠. 전통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 점이 중요해요.

    “전도하는 마음으로 미술사 연구…외롭지 않아”
    김호기 오늘날 사회변동을 이끄는 것은 세계화입니다. 세계화 시대에 전통을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지요.

    유홍준 대학에 입학한 다음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한국의 미학, 즉 한국의 미는 무엇인가, 우리 미의 특질은 무엇인가였어요. 앞서 고유섭이나 야나기 무네요시 등 여러 사람이 연구했어요. 구수한 큰 맛, 비(非)정제성, 자연주의 등이 우리 전통문화에 있다는 견해에 대해 공부했고, 얻은 바도 컸어요.

    그런데 저로서는 거기에 대해 회의도 품게 됐어요. 이러한 견해들은 한국의 미를 너무나 좁혀놓아버린 거예요. 한국의 미가 소박한 것이라면 소박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는 문제에 부딪친 거지요. 후학인 제가 보기에 우리가 식민지를 겪고 제3세계적인 후발주자가 되면서 문화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게 이런 한국미의 특질을 연구하게 만들었던 거예요.

    제가 도달한 결론은 이런 거예요. 우리는 중국, 일본, 베트남, 몽고, 티베트와 함께 19세기까지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해왔는데, 당당한 지분율을 가진 문화적 주주 국가라는 점이에요. 동아시아 문화의 보편성에다 우리가 가진 특수성을 이야기해야 우리 정체성이 나오는 겁니다. 유럽의 경우 이탈리아에서 시작해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으로 간 게 르네상스예요. 그때 유럽 르네상스에서 네덜란드가 가진 지분율이 20~30%였다면, 우리가 가진 문화적 지분율이 그 정도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김호기 서양미술사를 보면 처음부터 국제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국제 고딕 양식의 경우에도 국경을 넘어 존재했습니다. 예술에서 국민국가란 인위적인 구분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한류 열풍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완벽주의자의 욕심

    유홍준 우리가 외국에 문화적 영향을 끼친 역사적 경험이 별로 없어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간 경우도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문화를 전달한 거죠. 그런데 단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가 생산한 문화가 우리나라 바깥으로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퍼져나가는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된 거예요. 드라마고 음악이고 상품이고 잘 만들었어요. 품질이 높고,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한류는 문화가 휴대전화, 텔레비전, 화장품 등 상품과 같이 묶여서 가는 것이기도 해요. 정부가 한류 제작자는 물론 그곳 유학생들의 유치, 문화원 설립 등 다각도로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김호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보다 ‘화인열전’을 먼저 준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홍준 그렇죠. ‘역사비평’에 먼저 연재했으니까요. 제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회화사였고, 죽기 전에 우리나라 역대 화가 스무 명의 전기는 써보고 싶은 게 제 소망이에요.

    김호기 다른 학문에서도 전기 연구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론이든 분석이든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지요.

    유홍준 그동안 인간 없이 물체만 가지고 얘기했던 거죠. 미술의 역사를 보면 문화사·형식사·정신사·사회사·도상학 등이 있지만, 이것보다 훨씬 먼저 있었던 미술사는 인물사로서의 미술사죠.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 같은 선구적인 업적도 있고, 편년사로서의 미술사가 존재했어요. 인물사와 편년사를 하지 않고 본격적인 분석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중요한 인프라가 빠져버린 거예요. 고흐라는 사람의 일생 없이 작품을 해석할 수 없고, 일생이 있었기 때문에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지요.

    ‘역사비평’에 발표한 것을 바로 책으로 내지 않았던 까닭은 새로운 자료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에요. 10년 지난 다음 먼저 쓴 것을 버리고 새로 쓴 거예요. 제 완벽주의 내지는 욕심이었던 거죠. 그 바람에 이 책이 죽지 않고 지금도 읽히는 거죠. 조만간 보완할 생각이에요.

    김호기 ‘화인열전’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관아재 조영석입니다. 화첩을 만들면서 “남에게 보이지 마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경고문을 남겼는데, 양반 출신 화가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조선 시대 양반 출신 화가와 화원 출신 화가들의 역할은 달랐다고 볼 수 있는지요.

    유홍준 달랐죠. 영·정조 시대에 진경산수, 문인화, 풍속화 등의 미술을 주도한 사람들은 사대부 출신이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문인화가와 직업화가가 있었는데, 직업화가는 새로운 장르를 못 만들었어요. 지식층이 새로운 장르를 만드니까 정조 시대에 가서 단원 김홍도, 해원 신윤복 등 뛰어난 테크니션들이 나타나 더욱 발전시킨 거지요. 앞선 영조 시대에 진보적이고 참신한 지식인들이 새로운 문화를 제시했다면 그다음 정조 시대에는 테크노크라트들이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확산시켰던 셈이지요.

    뮤지엄 액티비티

    김호기 ‘화인열전’의 현대판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이상범, 변관식을 위시한 현대화가와 신학철, 임옥상 등을 포함한 민중화가에 대해 선생님이 쓴 글들을 더러 봤습니다.

    유홍준 동시대 비평가로서 어떤 화가가 어떤 계기로 그런 그림을 그렸고 당시 사람들은 그 그림을 어떻게 봤는지를 기록에 남기는 것은 중요한 학문적 활동이자 연구입니다. 이미 조선시대 화가 중 쓸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썼고, 우리 미술을 이끌어온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이응노 등을 쓰고 나면, 동시대 사람들, 예를 들어 신학철, 임옥상, 강요배, 이종구 등의 민중화가들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김호기 현재 한국 미술의 핵심 문제는 뭐라고 볼 수 있을까요. 미술이 삶과 밀접히 연관돼 있는 것임에도 우리 사회에서 미술은 삶과 생활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술을 포함한 문화는 삶 안에 놓여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타자화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유홍준 소통 구조가 큰 문제예요. 작가의 역량이나 생산이 문제가 아니라, 박물관이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이지요. 미국이나 독일의 경험을 보면 ‘뮤지엄 액티비티(museum activity)’가 도시마다 얼마나 흥미진진한가요. 문화의 중심이죠. 예를 들면 콘서트부터 심포지엄까지 모두 박물관에서 이루어지잖아요. 뉴욕에 가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현대미술관(MoMA)에만 들러도 과거와 현재의 문화를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하드웨어는 다 지었는데, 서양의 뮤지엄 액티비티에 대해선 못 배운 거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하고 돈이 필요한데, 주로 건물 짓는 데 투자하고 사람과 돈에는 인색하니 활발한 뮤지엄 액티비티가 없어요. 음악이나 미술 같은 경우는 문학과 달리 장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볼 방법이 없어요. 그것을 우리가 소홀히 해요. 이 점에서 우리 작가들이 좀 불행하다고 볼 수도 있어요. 이런 소통 구조를 개선해야만 한국 미술이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호기 최근 역설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인문학 위기와 열풍의 공존입니다. 대학 안에서 학생들은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데,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에 대한 열기가 뜨겁습니다. 인문학자로서 보기에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전도하는 마음으로 미술사 연구…외롭지 않아”


    “전도하는 마음으로 미술사 연구…외롭지 않아”
    대중과 더불어

    유홍준 그 문제에 대해 내가 말할 좋은 위치에 있지 않지만, 잘못된 교수업적 평가 방식이 악영향을 끼친다 생각해요. 예를 들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교수 업적평가에 몇 점 받을까요. 빵점이에요.

    교수가 할 수 있는 건 세 가지라고 봐요.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강의를 잘하는 거예요. 다음으로 연구를 많이 해서 좋은 논문을 많이 쓰는 것이고요. 마지막은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는 거죠. 이 사회활동에는 저술활동도 들어갈 수 있어요. 교수 사회는 이렇게 다양해야 하는데, 논문 하나만 가지고 업적을 평가하니까 많은 교수가 정년퇴직하면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고 하는데 그때는 이미 늦죠. 승진과 업적 평가에 얽매이다보니 정작 해야 할 일은 놔두고 있다는 점을 고민해야 할 거예요.

    김호기 많은 인문학자가 선생님 의견에 공감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학문이든 대중과의 소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삶과 인간을 다루는 인문학은 특히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많은 집 서가에 꽂혔을 텐데, 이런 훌륭한 저작이 당사자의 업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요즘 100세 시대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선생께는 아직 34년 정도 남았는데,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지요.

    “전도하는 마음으로 미술사 연구…외롭지 않아”


    유홍준 우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경우 올해 남한강 편을 내고, 내년에 서울 편을 쓸 계획이에요. 그다음에 독도를 포함한 섬 이야기를 발표하면 10권이 돼요. 우리 국토의 반은 쓰게 되는 것 같아요.

    ‘화인열전’은 이제까지 추사를 포함해 아홉 사람에 대해 썼어요. 여기에 조선시대 화가 서너 명, 근대 네 명, 현대 네 명 정도 추가해 3·4권을 쓰고 싶어요. ‘한국 미술사 강의’의 경우 세 권을 썼는데 이제 4권을 써야 해요. 4권에는 근·현대 미술을 다룰 예정이에요. 이런 작업을 하다보면 75세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사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매년 조계사에서 한국 미술사에 대해 공개강좌를 해왔어요. 올 가을에도 할 예정이에요. 이 강의는 미술사를 통해 우리 문화사를 알고 싶어 하는 교사, 직장인 등 300명 정도의 시민이 듣는데, 그들과 함께하는 게 좋아요. 저술이든 강연이든 대중을 떠나지 않고 살 거예요.

    김호기 루신의 소설 ‘고향’에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미술사를 통한 문화사라는 길을 일생 내내 걸어오셨습니다. 그동안 선생께서 외롭게 걸어갔지만 이제 적지 않은 후학이 그 길을 따라 걸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유홍준 외롭지도 않았어요. 끌고 다녔으니까요.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내가 하는 말이 있어요. 전도하는 마음으로 한다고 했어요. 한국 미술사를 전도한다는 마음으로 하니까 힘들지 않았어요. 전도사는 안 믿겠다는 사람을 믿게 하는 게 일인데, 믿겠다는 사람들을 데리고 답사하면서 강의하는 게 뭐가 힘들겠어요. 힘들지 않고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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