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냉전 체제가 해체되던 1990년대 초반, 한반도에서도 변화하는 세계안보환경에 대응해 남북한간에 불가침협정을 논의한 바 있다. 1992년 2월 발효되었던 남북기본합의서 중 불가침에 관한 장절(章節)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북핵문제 우선해결방침에 부딪쳐 이행되지 못했고 1993년 북한이 이를 사실상 효력정지시킨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년이 지난 2003년, 북핵문제는 다시 세계적으로 가장 위험한 안보문제로 대두됐으며 현재 어렵사리 마련된 6자회담에서 이 사안을 논의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된다면 그 해결과정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과 대결을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다각적으로 논의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한편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군사부문에서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우선 인계철선을 근거로 한 주한미군의 전진배치 방어전략이 바뀌어 50년 이상 전방에 배치되었던 주한미군이 후방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규모가 감축될 가능성도 있다. 주한미군의 후방이전과 관련해 북한은 미국이 핵문제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자 선제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북핵문제가 3년 이내에 풀려야 하는 사안인데 비해 그때까지 주한미군 재조정의 핵심 조치들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주한미군 재조정 등으로 인한 안보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이른바 ‘자주국방’을 추진하고 있다. 자주적 방위능력의 확충은 상당한 규모의 군사비 증가를 요구한다. 주변환경의 급속한 변동은 남한으로 하여금 자주적인 방위력의 증강과 북한과의 협상을 통한 군사적 위협 감소를 동시에 추구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케 하고 있다.
그러나 북쪽을 보면 군비통제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북한은 체제위기에도 선군(先軍)정치에 근거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허약한 정전협정에 기댄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고, 남북한간, 미-북한간에 상호불신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군비경쟁과 적대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6자회담에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폐기될 전기가 마련된다면 남는 것은 남북한간 재래식 군사위협을 감소하는 문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남북한 관계에서 비군사분야뿐만 아니라 군사분야의 관계를 개선·발전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전략과 비전은 무엇인가. 기존 접근법이 가진 한계는 무엇이고 또 그 대안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평화체제관련 쟁점들과 그 해결방안을 제시함으로써 6자회담의 진전 이후 한반도의 재래식 군비통제 방안을 모색해 본다.
평화체제의 주요 장애물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건설을 가로막는 첫번째 요소가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 남한과 미국 사이에 조성된 안보불안과 불신이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미양국은 북한의 위협에 불안감을 갖고 있으며 북한은 한미양국의 위협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 안보불안에서 초래되는 상호불신뿐 아니라 역사적, 현실적 차원의 상호불신도 만만치 않다. 또한 대(對)북한 관계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한미양국 사이에도 상호불신이 있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하나의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먼저 남한이 느끼는 안보불안 요소를 살펴보면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크다. 북한은 기습공격전략을 변경하지 않고 있으며 전방에 과도하게 배치한 공세적 전력도 요지부동이다. 근래에는 북한의 비대칭 위협, 즉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장사정포 등도 불안요소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