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 파견부대 규모는 3000명 이내로 함.나. 임무는 이라크내 일정 책임지역에 대한 평화정착과 재건지원 등을 수행함.다. 파견기간은 2004년 4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로 함.라. 부대의 위치는 미국 또는 다국적군 통합지휘부와 협의하여 이라크 및 주변국가로 하되, 부대안전 및 임무수행의 용이성을 고려함.마. 파견부대는 우리 합동참모의장이 지휘하며, 작전운용은 현지 사령관이 통제함.바. 국군부대의 파견경비는 우리 정부의 부담으로 함.
국민 여론을 반으로 가르며 진통에 진통을 거듭한 파병동의안은 결국 2월9일 국회 국방위원회 심의를 거쳐 나흘 뒤 본회의를 통과, 확정되었다. 헌법 60조 2항에 따라 국군의 해외파견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 ‘일정 책임지역’을 담당한다는 내용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파견부대가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는다는 내용 또한 상당부분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약속은 도대체 어디서, 왜 금가기 시작한 것일까. 과연 정부는 이를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혹은 알고도 숨긴 것일까. 이라크에 파견될 평화재건사단 ‘자이툰’ 부대(사단장 황의돈 소장)는 당초 국민에게 설명했던 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지난해 9월4일 미국의 공식요청 이후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라크 추가파병 논란’의 진실게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로 하자.
“미군이 키르쿠크 지역을 떠나지 않으려 해 협의가 원만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몇몇 정부 관계자로부터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것은 지난 2월 말이었다. 2월25일 황의돈 사단장을 단장으로 하는 국방부 현지협조단 14명이 이라크로 출국해 바그다드 소재 연합합동군사령부(CJTF-7)와 키르쿠크 주둔 미군부대, 카타르의 미 중부사령부를 방문하고 파병문제를 최종 조율하는 와중이었다.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3월3일 귀국한 황 사단장의 발표를 기다렸지만, 당초 5일로 예정돼 있던 협의내용 브리핑은 열리지 않았다. 의혹이 증폭되던 3월7일 저녁 ‘한겨레’ 이튿날자 가판신문은 ‘미, 키르쿠크 공동주둔 요구’ 제하 기사를 1면에 실어 ‘한국군 전담지역으로 약속됐던 키르쿠크 지역에 미군 일부부대가 잔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미군과 한국군이 같은 지역에 주둔하게 됨에 따라 자이툰부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이 지역에 대한 작전지휘권도 어느 쪽이 맡을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깨진 약속, 흔들리는 지휘권
국방부는 발칵 뒤집혔다. 대변인실이 급히 언론사에 배포한 보도자료는 ‘공식적인 요구는 없었지만 실무차원에서 미군 주둔 필요성을 제기한 바는 있다’는 내용. 사실상의 시인이었다. 다음날 김장수 합참 작전본부장은 직접 기자간담회에 나서 “우리의 독자적인 작전 수행에 제한을 받는다면 미군의 어떠한 제의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2월13일 조영길 국방장관은 “일부 조정해야 할 문제가 있어 실무적으로 조정하고 있다”며 파병 연기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미군에 대한 이라크 현지 주민들의 반감은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9월 이후 불거진 추가파병 논의과정에서 정부가 미군과는 완전히 분리된 독자적인 지휘권과 지역관할권을 갖기로 한 것도, 1차적으로는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침략군’으로 인식되고 있는 미군과 함께 행동할 경우 한국군도 같은 취급을 받아 저항세력의 심각한 테러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에 의한 것이었다. 소요가 거의 없는 남부 사마와 지역에 주둔하는 일본 자위대의 경우는 연합군 지휘체계 안에 있어도 큰 무리가 없지만, 분위기가 사뭇 다른 키르쿠크에 주둔할 한국군은 독자지휘권을 가져야 안전하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애초 약속과 달리 미군은 지난 2월말 키르쿠크 지역에 주둔중이던 173공정여단을 철수시키고 하와이에 주둔하던 25사단 2여단을 투입했다. 그리고는 같은 시기 사령부를 방문한 우리측 현지협조단에게 앞으로도 비행장 경비 등을 위해 미군 1개 대대 또는 감편된 여단이 이 지역에 계속 주둔하는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더욱이 미군측이 제안한 연락체계도 CJTF-7 예하부대와 같은 형식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조율이나 협조체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애초 합의했던 한국군의 독자지휘권 행사와는 거리가 있는 형식이었다는 전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