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휴전회담에서 포로송환 문제가 거론될 무렵 경북 영천 소재 반공포로수용소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북한의 무력침공을 자력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한국은 자국의 생존을 미국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유엔의 이름을 내걸고 한국전에 참전하자 곧 한국 육·해·공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은 여타 참전국과 함께 단일한 지휘체계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쟁을 수행하게 됐다. 한마디로 한국과 미국은 ‘반공’이라는 공동이익을 위해 동맹관계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반공 인식에는 차이점이 존재했다. 미국의 반공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한다는 현상유지적인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한국의 반공은 궁극적으로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현상타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제거돼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바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초기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북의 남침으로 38선이 무의미해졌으며 이 기회를 이용해 ‘암적 존재인’ 공산주의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상유지와 북진통일의 대립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반격을 개시함에 따라 이 대통령이 바라던 대로 북진통일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중국의 참전으로 유엔군과 공산군이 38선을 중심으로 대치하게 되자 미국은 분단이라는 현상을 유지하는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런 현상유지 정책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정책과 갈등을 빚었다.
1951년 7월 마침내 유엔군과 공산군측 사이에 휴전회담이 시작됐고 이후 10개월간 협상을 통해 양측은 전쟁포로 문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안건에 대해 합의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 같은 휴전회담의 진전에도 아랑곳없이 북진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하며 확고한 반(反)휴전 태도를 견지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좌익 세력과 중도 세력이 남한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렸고 대다수의 남한 주민이 이미 북한군의 만행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상당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휴전반대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통일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반(反)휴전 데모를 장려했다.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는 단독 북진을 감행할 수도 있음을 천명했다. 예컨대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