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후보로 나선 아이젠하워 장군(왼쪽)이 1952년 12월2일 한국을 방문해 일선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권과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이는 남북분단이 고정되는 것을 뜻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이승만은 남북관계의 현상변경, 즉 북진통일을 추구했다. 이는 또 한 번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미국의 큰 골칫거리였다. 1953년 휴전과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을 전후해 미국은 이승만의 북침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은 휴전 이후 공산진영의 전쟁 재개뿐 아니라 한국의 전쟁 개시 가능성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비롯하여 다각적인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이중봉쇄’ 정책을 수립했다. 미국은 남북관계에서는 현상유지를 추구하면서도 한국 국내정치에 대해서는 현상변경을 요구했다. 한국군 병력감축과 경제건설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압박했다. 한국의 국내정치 안정을 위해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가진 정당을 선호했다.
이승만은 국내상황과 관련해서는 반공과 반일(反日)을 두 축으로 삼아 현상유지를 추구했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거부했다. 야당을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적대시했다. 6·25전쟁과 한미동맹을 통해 맺어진 혈맹이건만 남북관계와 국내정치를 둘러싸고 1950년대 내내 한미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이승만과 아이젠하워의 시각차
휴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은 봉쇄와 롤백(rollback) 사이를 오갔다. 1953년 초부터 1960년 말까지 미국은 뉴룩(New Look)전략에 따라 대한정책을 재조정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가장 염려한 것은 6·25전쟁을 계기로 한 미국의 군비팽창이었다. 건전한 경제가 국가 안전보장의 기반이라는 신념을 지닌 그는 미국이 직면한 위기를 ‘이중적인 위기’로 파악했다. 즉 세계 공산주의라는 외부의 도전과, 미국경제의 약화라는 내부의 위험이 그것이다. 군사비 과잉지출과 민간경제 파탄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냉전에서 미국이 지켜야 할 가치가 개인의 자유, 민주정부, 사기업 주도의 자유시장경제 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적 생활양식 그 자체라고 보았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군사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결과적으로 병영국가가 출현하게 되고, 국가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이젠하워 정권의 특징은 건전한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국가 안전보장의 기본으로 삼아 ‘지속가능한 국가안보’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6·25전쟁을 계기로 동북아에서 확고한 냉전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한 한국의 이승만 정권은 아이젠하워 정권과 상이한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분단을 ‘적색(赤色) 제국주의(帝國主義)’가 북한을 강점해 생긴 문제로 보고, 북한 해방 차원에서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 양 진영의 공존은 불가능하고 궁극적으로 전면전쟁이 불가피하므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예방전쟁(preventive war)’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북진통일론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