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군3사관학교 여생도들의 각개전투 훈련.(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여군 세계는 좁다. 10여 년 전만 해도 여군 장교는 사단에 한두 명 있을 정도로 희귀했다. 워낙 소수인 만큼 사회에 나와서도 끈끈한 인연을 이어간다. 현역 후배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예비역 선배가 발 벗고 나선다. Q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네 집 수저가 몇 개인지까지 알 정도로 서로를 잘 안다. 이런 여건에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걸 감수하고 언론에 증언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군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상당수 남성 군인은 볼멘소리를 한다. 남성은 무조건 치한이고 여성은 무조건 피해자라는 시각에 대한 불만이다. 여군이 귀하던 시절에 군생활을 했던 예비역들은 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여자한테 문제가 있으니 사고가 나는 것 아니냐’는.
Q씨는 ‘여군=피해자’라는 단선적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군내 성폭력 문제를 진단했다. 이 인터뷰 기사는 Q씨의 동의를 얻어 작성됐다. 그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기사에 정확한 계급과 직책을 밝히지 않는다. 그가 언급한 ‘성추행·불륜 장교’ 중엔 이름이 꽤 알려진 전·현직 장성이 여럿 있다. 군과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도 포함됐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그들의 실명도 가린다.
가슴에 꽂힌 10만 원 수표
Q씨는 20여 년간 군복무를 했다. 그가 여군병과 장교로 임관한 것은 1980년대. 대학 졸업 후 여군 장교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여군 ROTC 및 학사장교의 전신에 해당하는 여군병과는 1989년 폐지됐다. 이후 여군도 전투병과에 배치됐다.
1980년대 Q씨가 소속된 여군단은 육군본부(육본) 직할부대였다. 간호장교를 빼면 전군 통틀어 여군 장교가 70명이 채 안 됐다. 여군 부사관은 1000명가량 됐다. 대부분이 육군본부, 군사령부, 특전사령부 내 여군부대에서 근무했다. 여성성을 필요로 하는 비서 업무와 타자 업무 종사자가 많았다. 이들을 관리하는 게 여군 장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여군 장교는 군의 꽃이었다. 주로 남성이 수행하기 힘든 섬세하고 상징적인 보직을 맡았다. 장관이나 참모총장, 군사령관 등 군 고위직 비서실에 많이 배치됐다. 또 각군 본부와 특전사령부, 정보사령부 등에서 정책과 행사 업무를 봤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육군본부를 지원하는 여군대대엔 장교, 부사관 합해 300명가량이 근무했다. 장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하사는 대체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미혼여성이었다. 영관급 장교는 출산을 금지한 당시 규정 때문에 대부분 노처녀였다. 이들은 모두 한 생활관에서 거주했다. 가운데 통로 하나를 두고 양쪽으로 깔아놓은 침대에서 잤다.
Q씨가 처음 성추행을 겪은 것은 임관 직후였다. 어느 날 여군 선배(대위)가 호출했다. 행사가 있으니 따라오라는 지시였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따라나섰다. 일과 후였기에 가능한 복장이었다. 야외 개고기 식당이었다. 육군본부 실력자 A장군이 주관하는 회식이었다. 여기저기서 ‘별’이 반짝거렸다.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었다.
그야말로 홍일점이 아니라 홍이점이었다. 두 여군 장교는 A장군 좌우에 배치됐다. A장군은 강단 있고 군내 신망이 두터운 유능한 군인이었다.
“선배 대위 얼굴이 예뻤다. A장군은 선배를 한 팔로 껴안고 술을 마셨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내 가슴에 뭔가를 찔러 넣었다. 10만 원짜리 수표였다. ‘팁’을 준 것이다. 그 무렵 소위 월급이 20만 원이 안 됐다. 다들 장군의 행동을 못 본 척했다. 그게 일상이었다. 별들이 죽 앉아 있는데 소위가 감히 뭐라 하겠나. 노래 안 한 게 다행이지.”
군내 성추행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여군에겐 인권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건지 모른다. 이어진 Q씨의 얘기가 반전이다.
“웃기는 건, 그 자리에 선발돼 가는 나를 부러워하는 여군들이 있었다는 거다. 당시 여군들의 진급 경쟁이 치열했다. 일단 예쁘고 사교적이면 유리했다. 진급하려면 힘 있는 남성 장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