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모(18)군은 태연하게 말했다. ‘땅콩’은 그들끼리 러미나를 일컫는 말이다. 김군은 열네 살부터 마약의 일종인 러미나와 S정을 복용했다고 한다. 러미나는 기침을 멈추게 하는 진해거담제이고 S정은 근골격계 질환 치료제다. 하지만 한꺼번에 여러 알을 먹으면 환각 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대용 마약으로 남용돼왔다. 처방전이 필요한 의약품이지만 서울역 근처 보따리상에게서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한때 서울역 앞의 모 빌딩 근처에 가면 약에 취해 괴성을 지르거나 벤치에 쓰러져 있는 앳된 청소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러미나와 S정이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돼 더 이상 유사 마약이 아니라 마약으로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됐다. 그래서 서울역 부근에서 버젓이 러미나와 S정을 팔던 보따리상들도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군은 “지금도 살 수 있다”며 코웃음을 쳤다.
김군을 따라 한때 러미나와 S정의 ‘메카’였던 서울역 앞 모 빌딩 뒷골목으로 갔다. 대놓고 약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40∼60대 여인 몇이서 이른바 ‘여관바리(여관에서 하는 매춘)’ 호객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약 판매책 노릇도 겸한다고 한다.
“저 같은 ‘단골’은 아줌마들이 얼굴을 알아봐요. 단속 때문에 직접 팔지는 못하고 대신 명함을 주는 거죠.”
김군의 귀띔이다.
“안 해본 아이가 없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담배와 술을 입에 댔다는 김군은 중학교에 들어간 후 본드와 부탄가스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혼한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는데, “돈도 없고 사랑도 없는 집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고 한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밤새 친구들과 놀고 와서 오전 내내 잠만 자는 생활을 계속했어요. 그때 아는 형들이 ‘러미나 먹으면 뿅간다’고 하더라고요. 형들이 주길래 호기심에 먹어봤죠. 40분쯤 지나니까 몸이 가벼워지면서 슬슬 약 기운이 나타났어요. ‘바이킹을 타고 싶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정말 바이킹을 타고 있었어요. 그러다 등이 간지러워 긁었는데, 가려움증이 없어지질 않았어요. 1시간 가까이 피가 날 때까지 긁었죠. 꽥꽥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를 돌아다녔어요.”
그런 다음날이면 몸에 힘이 빠지고 구토를 하기도 했다. 속이 텅 빈 듯한 느낌에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팠다. 몸이 마비돼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저녁이면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약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한번에 25알을 먹었는데 내성이 생기자 50알은 먹어야 효과가 나타났다. 1주일 내내 먹은 적도 있다. 지금까지 먹은 걸 모두 합치면 수천 알은 될 거라고 한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면 한 달에 체중이 15kg 넘게 빠지기도 했다.
“제 친구들 중에 안해본 아이가 없어요. 여자친구들도 다 한 걸요. 하지만 저는 넉 달 전부터 끊었어요. 몸도 안 좋고, 무엇보다 힘든 공사 일 하면서 저를 키우신 아버지께 죄송해서요. 다음달엔 고입 검정고시도 볼 생각이에요.”
하지만 김군은 “당장 누군가가 제게 약을 건넨다면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숨기만 했지, 줄진 않았다”
지속적인 단속과 캠페인에도 청소년들의 약물 남용이 여전히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흡연과 음주는 물론 마약류에 속하는 환각물질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것. 주머니가 가벼운 청소년들은 대개 필로폰(메스암페타민) 같은 고가의 마약은 손대지 못하지만 러미나, S정, 엑스터시 등 상대적으로 저렴한 마약이나 본드, 부탄가스 등 환각을 일으키는 유해물질에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10대 청소년들의 마약류 사용은 신체적, 정신적 성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중독될 가능성이 크며 범죄와 연결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된다. 마약치료 재활공동체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 신용원 대표는 “소년범의 80% 이상이 마약 등 약물 문제를 갖고 있고, 성인 마약 중독자의 대다수가 10대 때 마약 또는 준(準)마약을 접했다”고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