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미자, 경자자 등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들과 ‘진달래꽃’ ‘님의침묵’ 초판본 등 옛 문학서, 때묻은 지도와 사진 등 여승구 대표가 수집한 고서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내가 지난 수십 년간 애지중지하며 수집한 고서를 모아 ‘고서·책 박물관’을 건립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 특히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200여년 앞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直指心經)을 가졌을 정도로 찬란했던 우리 인쇄출판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23년째 고서를 수집하고 있는 나를 두고 주변 친구들은 종종 지독하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서 수집이라는 한 길을 걸어오는 동안 그나마 모아놓은 재산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제법 값이 나가는 책에서부터 영화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내가 모은 고서는 10만여점이 넘는다. 어떤 사람들은 고서를 팔면 한 밑천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고서를 팔 생각이 전혀 없다. 고서는 내 마음의 고향이고 나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간 고서가 뿜어내는 향내에 취해 얼마나 발품을 팔았고 또 마음을 졸였던가. 곧 개관할 책 박물관 서가에 하나씩 꽂혀지는 고서를 볼 때마다 그 책을 구하느라 애간장을 녹이고 환희에 젖었던 지난 세월이 떠올라 가슴이 묵직해지곤 한다.
내가 고서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건 1982년이다. 하지만 고서와의 첫 인연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남도 담양이 고향인 나는 고교 졸업 후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 올라온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서울에 남고 싶었다. 우선 먹고 자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해서 고종사촌형이 운영하는 고서점인 ‘광명서림’에 들어갔다. 고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귀동냥, 눈동냥으로 고서적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그후 어렵사리 중앙대 정외과에 들어갔지만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중퇴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서적무역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3년 ‘팬아메리칸 서비스’를 차려 외국의 학술잡지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중학시절부터 시인의 꿈을 가지고 교과서나 참고서보다는 시집을 읽고 달달 외웠던 나였기에 사업을 하더라도 책과 관련된 일을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수입해서 판매한 책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사세가 확장됐고 책에 대한 욕심으로 ‘월간 독서’란 잡지도 발행하는 등 왕성한 출판활동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책을 잘 파는 성공한 책장사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버전의 춘향전 300여점 모아
1982년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국내 최초로 국제 규모의 도서박람회인 ‘서울 북페어’를 개최했다. 이것이 내가 고서수집이라는 평생의 업(業)을 지게 된 인연의 단초이다. 출판사상 최초로 열린 북페어였던 터라 ‘서울 북페어’는 당시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자 유명 학원 국어 강사였던 윤석창씨가 나를 찾아왔다. ‘님의 침묵’ 등 현대시나 소설 초판본 200여권을 북페어에서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책들을 몽땅 사들였다. 그리고 북페어 안에 ‘한국문학작품 초판본’ 소전시회를 개최했다. 처음부터 고서수집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북페어가 끝나면 경매에 부치려고 했다. 북페어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 계획대로 이 책들을 경매에 내놓았고 모 대학에서 구입의사를 밝혀왔다.
경매가 성사될 무렵 우연히 언론사 문화부장들과 식사를 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경매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여 사장, 그것을 왜 팝니까? 이 기회에 고서수집을 시작해 나중에 박물관 하나 만드시죠”라며 한마디씩 했다. 그들이야 지나가는 말로 한 거였겠지만 나는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책 박물관’은 듣기만 해도 감격스런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언론사 문화부장들이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나는 감격을 했고 그때부터 고서와의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내가 본격적으로 고서수집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당시 을유문화사 편집주필이었던 안충근씨였다. 그때 이미 그는 고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제법 굵직한 고서들을 소장하고 있던 고서 애호가 겸 마니아였다. 나는 회사 일이 끝나면 그와 함께 인사동 고서점을 찾아 곰팡내 나는 고서들을 뒤적였고 청계천 헌 책방을 샅샅이 뒤졌다. 공치는 날도 많았지만 어쩌다 ‘물건’을 만나면 그야말로 열락에 들뜨는 기분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블랙홀’에 빠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내 의식은 고서에 빠져들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몸은 늘 고서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내가 소장한 고서 중에서 단일품목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춘향전이다. 옥중화, 옥중가인, 춘몽록, 춘향가, 성춘향전, 열녀 춘향 수절가, 현대식으로 코믹하게 각색한 1950년대 나이론 춘향전, 춘향의 재판 과정을 법률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법률춘향전 등 수많은 버전의 춘향전 300여점이 내 서고를 빽빽이 채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국문학자들이 직접 찾아와 연구자료로 참고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