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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오름 풍수’로 통일신라 수호한 문무대왕

‘용오름 풍수’로 통일신라 수호한 문무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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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무대왕 김법민은 ‘용(龍) 풍수’의 주역이다.
  • 아버지 무열왕은 황룡사 9층목탑에 쏟아져 내려오는 천기(天氣)를 황룡(黃龍)으로 상징화해 풍수 권력으로 활용했고, 아들 문무왕은 감은사 앞바다 대왕암에서 솟구쳐 오르는 용오름을 해룡(海龍)으로 승화해 호국 풍수를 추구했다.
‘용오름 풍수’로 통일신라 수호한 문무대왕

문무왕이 조성한 풍수 조형물인 안압지. 동쪽 호안(사진 왼쪽 가운데)의 지형이 동해구를 재현한 형상이다.

신화나 설화에 등장하는 용(龍)과 풍수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나라 지명엔 ‘용’ 자가 들어간 산이나 마을이 적지 않다. 여기엔 신성한 존재인 용을 지명에 부여함으로써 그 산과 마을의 품격을 높이려는 상징적 의도도 있겠지만, 풍수적으로는 더 중요한 비밀 코드가 숨어 있다. 대체로 그런 곳에선 풍수에서 말하는 땅의 생명력, 즉 생기(生氣·지기(地氣)라고도 함)가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기는 산의 맥[龍脈]을 따라 땅속에서 동(動·움직임)하거나 정(靜·멈춤)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지기가 강하게 응축된 곳에선 땅속을 뚫고 분출하는 경우도 적잖다. 심지어 솟구친 지기는 다른 지역으로 공중 점프를 해 움직이기도 한다. 지기가 솟구치는 대표적 현상 중 하나로 용오름을 꼽을 수 있다. 필자는 용오름 현상을 관찰하려고 현장을 자주 찾는 편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의 풍수 고전 ‘청오경’에서 율법처럼 제시하는 다음 구절을 암송하면서 말이다.

“음양이 들어맞고 천지가 서로 통하면 드러나지 않은 기는 생명력을 싹트게 하고 드러난 기는 형태를 갖추게 한다. 안팎이 서로 어우러지면 풍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니, 안목으로 잘 살피고 마음을 모아 이를 깨닫는다면 천하를 거침없이 다닐 것이다(陰陽符合, 天地交通, 內氣萌生, 外氣成形. 內外相乘, 風水自成. 察以眼界, 會以性情, 若能悟此, 天下橫行.).”

문무왕의 풍수 안목

드러나지 않은 기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즉 안팎의 기가 교호하는 순간을 안계(眼界)로 잡아내기 위해 필자가 자주 찾는 곳 중 하나가 계룡산 기슭(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일대)이다. 이곳의 특정 지점은 지기가 강렬하게 분출한다. 명상 기도처로 유명한 미국 애리조나 주 세도나의 볼텍스(vortex· 기가 소용돌이치는 현상) 포인트와도 유사하다. 가끔씩 바람이 불어올 땐 정확히 그 지점에서 회오리 현상이 일어나는데, 폐지나 비닐 등 잡동사니가 휩쓸려 30~40m 상공으로 솟구쳐 올라 눈으로 지기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 농해사의 농해 스님은 “간헐적으로 용오름 현상이 눈에 보이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땅의 기운이 탁해지면 스스로 정화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물론 용오름 현상은 하늘이나 땅의 기운을 전달 혹은 증폭해주는 작용을 하는 물[水精氣]이 있는 곳에선 더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역사상 용오름의 풍수적 작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인물은 아버지 무열왕(재위 654~661)의 뒤를 이어 통일 과업을 완수한 문무왕(재위 661~681)이었던 듯하다. 그는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짐은 죽어서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용에 집착했던 인물이며, 풍수적 안목 또한 높았던 듯하다. 이는 문무왕이 아버지의 유해를 모신 태종무열왕릉에서 일부 엿볼 수 있다.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자락에 자리 잡은 태종무열왕릉은 산과 땅의 모양새를 살펴 길지(吉地) 여부를 가늠하는 형세파(形勢派) 풍수 이론으로 보아도 명당의 격을 갖췄다. 무덤 바로 뒤의 산줄기가 마치 거북이 머리를 빼어 죽 들이민 것처럼 불거져 나온 형상, 즉 전형적인 현무수두(玄武垂頭)의 길지에 왕릉이 똬리를 튼 형상이다.

그러나 이 왕릉의 진정한 명당 기운은 산줄기에서 뻗어 내려온 지기(地氣)가 공중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천기(天氣)와 교합을 이룸으로써 후손의 발복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지기보다는 천기가 더 강하고 아름다운 편이다. 아마도 천기를 읽어내는 이가 쓸 수 있는 자리일 것이다. 무열왕릉 조성 이후 그의 직계 자손으로 8대째 내리 왕위가 계승됐고, 현재까지도 무열왕의 후손인 경주 김씨들이 한국 사회의 중요 씨족으로 자리 잡고 있음에서도 이곳이 풍수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음택(陰宅) 발복의 명당에 있지 않다. 외세 침탈에 대응하고 국가 경영을 기원하는 국도(國都) 풍수와 관련한 문무왕의 풍수적 안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한반도 동남단 외진 곳에 자리했던 신라가 삼국통일 후 250여 년간 황금기를 누린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더 나아가 왜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천년의 역사상 한 번도 그 위치가 바뀌지 않았는가. 왜 신라인은 경주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일까. 황금기 신라에 대한 숱한 학문적 성과가 있었지만 풍수학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여지가 많은 곳이 바로 신라다.

문무왕 풍수의 백미, 안압지

봄기운이 완연한 3월 초, 이 같은 의문을 화두로 삼아 경주를 찾았다. 문무왕이 왕위에 올라 그 첫 작품으로 선보인 풍수 조형물, 안압지(사적 제18호)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야경이 좋기로 소문난 안압지는 경주 시내 한복판에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이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붙여진 것이다. 신라 때 명칭은 월지(月池)였고 태자가 머무는 동궁(東宮)에 부속된 곳으로 보는 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현재 안압지는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공식 변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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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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