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명예·사랑 버리고 조국 택한 女인텔리, 고국에 버림받고 가난으로 죽다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6-05-16 18: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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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과 ‘여성’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1930년대. 26세의 최영숙은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5년간의 스웨덴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5개 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여성에게 고국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장수.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귀국 5개월 만에 숨을 거둔다. 그녀가 죽고 난 뒤 그녀의 뱃속에 인도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 사생아’가 있었음이 알려지면서 구구한 소문이 도는데….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제일선’ 1932년 5월호에 실린 ‘청춘에 요절한 최영숙 애사’와 최영숙의 스톡홀름대학 졸업 사진.

    1926년 10월, 구스타프 아돌프(1882~1973) 스웨덴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했다. 아돌프 황태자는 중국, 그리스, 이탈리아, 키프로스 등지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 참여한 고고학자였다. 열흘 남짓한 일정으로 조선을 방문해서도 경주, 서울, 평양 일대의 고분 발굴 현장과 유적을 돌아보느라 바빴다. 10월9일, 부산항에 도착한 황태자 일행은 곧장 경주로 이동해 다음날부터 고분 발굴 현장을 참관했다.

    교토제국대 고고학과 하마다 주임교수는 황태자 일행을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노서동 제129호 고분으로 안내했다. 아돌프 황태자는 학자적 호기심이 발동, 몸소 연장을 들고 발굴에 참여했다. 얼마 후 그는 허물어진 목관 아래에서 봉황 문양이 장식된 금관을 발굴했다. 금관총금관, 금령총금관에 이어 세 번째로 발견된 신라금관이었다. 하마다 교수는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에 참가한 것을 기념해 금관이 나온 제129호 고분을 ‘서봉총(瑞鳳?)’으로 명명했다. 스웨덴의 음역어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따고, 봉황(鳳凰)에서 ‘봉’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아돌프 황태자는 조선, 일본, 중국의 유적지를 순회하고 고고학과 미술사 관계 자료를 수집해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그는 1950년 제위에 올라 구스타프 6세가 됐다.

    스웨덴의 조선 여성

    아돌프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기 한 달 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소녀티를 갓 벗은 동양 여성 한 명이 나타났다. 사회과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스웨덴을 찾아간 21세의 조선 여성 최영숙이었다. 스웨덴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스웨덴어는 간단한 인사 한마디조차 할 줄 몰랐다. 집안이 유학경비를 대줄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고, 장학금을 대줄 후원자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스톡홀름에 도착했을 때, 최영숙이 가진 것이라고는 사회주의 관련 서적 몇 권과 큼지막한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최영숙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31년 11월,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귀국길에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 베트남 등 세계 20여 개국을 여행했다. 인도에서는 4개월간 머물면서 간디, 나이두 같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최영숙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스웨덴에서 살기가 고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 비하면 스웨덴은 천국이었다. 최영숙은 스웨덴 생활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스웨덴은 나의 제2 고향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외국인 대접을 극진하게 합니다. 더욱이 나는 동양 여자로 처음이었기 때문에 후대를 한몸에 받았더랬어요. 아이들과 여성들이 자유롭고 힘 있게 뻗어나가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특히 연초 전매국이나 성냥공장 같은 데서 노동하는 여공들까지도 정신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겐 일정한 노동시간과 휴가가 있을 뿐 아니라 임금도 넉넉해 생활비를 빼고도 반은 남습니다. 그들은 노동복만 벗어놓으면 유복한 숙녀들입니다. 더욱이 체육을 즐겨 날마다의 사는 재미가 더없이 호강스러워 보였습니다.”(동아일보, 1931년 11월29일자)

    최영숙이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은 사회과학을 공부해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은 까닭이었다. 최영숙은 귀국 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조선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을 때,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져 살아 있는 과학인 경제학을 현실에서 실천해 보려했습니다. 공장 직공이 되어 그들과 같이 노동운동을 할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 보니 형편이 어려워 당장에 취직이 걱정입니다. 스웨덴에 있을 때, 그 나라 신문에 투고하여 조선을 다소 소개도 해보았고, 동무 중에도 신문기자가 많았습니다. 신문기자 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조선의 실정을 아는 데도 제일일까 합니다.”(조선일보, 1931년 12월22일자)

    인도에서 생긴 ‘혼혈 사생아’

    최영숙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곧장 여성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할 수 없었다. 대신 기자가 되어서 집안도 돌보고, 조선 실정도 알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했고, 영어·독일어·스웨덴어·중국어·일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국제감각까지 갖춘 최영숙은 인재가 부족한 조선에 보석 같은 존재였다. 어떤 직장이고 최영숙이 손을 내밀면 잡아줘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직장도 최영숙을 받아주지 않았다.

    “조선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국어 교수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어느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다가 문부성에서 교원면허를 내주지 않아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신문사의 여기자로 입사하려고 운동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낙원동에 있는 여자소비조합을 인계해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장사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배추, 감자, 마른미역줄기,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는 일개 구멍가게로 어떻게 한 집안 생활비가 나오리까. 오직 최영숙 양은 살을 깎는 듯한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지냈을 뿐입니다.”(‘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삼천리’, 1932년 5월)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웨덴에서 5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돌아온 최영숙에게 고국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장수’였다. 그나마 오래 할 수도 없었다.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2년 4월, 임신 중인 최영숙은 태아에 탈이 생겨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다. 인도청년 ‘미스터 로(Mr. Row)’와의 관계가 드러난 것은 그때였다. 산모의 생명이라도 구하고자 낙태수술을 받았지만 병세는 나빠져만 갔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계속했지만 악화되는 병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4월23일 오전 11시, 최영숙은 홍파동 자택에서 2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최영숙이 조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을 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영숙이 홍제원 화장장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 인텔리 여성을 향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단지, 스웨덴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이 무슨 까닭으로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마르크스 걸’의 멀고 먼 유학길

    최영숙은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창엽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일찍이 농사를 정리하고 포목상을 차려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최영숙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총명했다. 일곱 살에 여주보통학교에 입학해 열한 살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당시 보통학교 수학연한은 4년이었다. 중등학교는 14세 이상만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3년을 집에서 보냈다. 14세 되던 해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었다. 최영숙의 부모는 여자가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했다. 최영숙은 매일 예배당에 나가 백일기도를 드리며 완고한 부모를 설득했다. 가까스로 부모의 허락을 얻은 최영숙은 상경하여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3·1운동 직후 이화학당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했다. 학교는 입학식만 치르고 휴교에 들어갔다. 교사와 학생 다수가 투옥됐고, 최영숙의 1년 선배 유관순은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업을 시작한 최영숙은 일찍부터 조선이 처한 현실에 눈떴다. 1923년 이화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최영숙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을 향해 유학길에 올랐다.

    난징(南京)으로 건너간 최영숙은 명덕(明德)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익혔다. 중국어를 배운 지 단 몇 달 만에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어학능력이 탁월했다. 이듬해 난징 회문(?文)여학교에 편입했다. 최영숙은 회문여학교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영어, 독일어 능력은 다른 학생이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이었고, 성악과 피아노 실력이 뛰어났다.

    회문여학교 재학시절 최영숙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공부하는 틈틈이 상하이로 가서 중국에 망명 중이던 여러 인사와 교유했다. 당시 최영숙에게 큰 감화를 준 인물은 도산 안창호였다. 총명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최영숙을 안창호도 남달리 아꼈다.

    회문여학교를 졸업한 최영숙은 스웨덴 유학을 결심했다. 하고많은 나라 중에 유독 스웨덴으로 유학 가고자 한 이유는 그곳에서 엘렌 케이(Ellen Key·1849~1926)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엘렌 케이는 스웨덴 출신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였다. 활동 무대인 서구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조선과 일본, 중국의 여성운동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10~20년대 동아시아의 자유연애와 여성운동은 엘렌 케이의 사상에 뿌리를 뒀다. 이광수가 소설 ‘무정’(1917)의 주인공 이형식의 박식함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타고르의 이름을 알고 엘렌 케이 여사의 전기를 보았다”고 기술할 정도로 엘렌 케이는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의 저명인사였다. 엘렌 케이의 저술 ‘아동의 세기’(1901), ‘연애와 결혼’(1911), ‘연애와 윤리’(1912)는 신여성의 필독서였다.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동광’ 1932년 1월호에 최영숙이 세계 20여 개국을 여행하고 귀국한 감상을 적은 글, ‘대중의 단결’. 사진은 아테네 유적지에 서 있는 최영숙.

    최영숙은 난징에 있는 동안 엘렌 케이의 저서를 탐독하고, 중국 친구들과 어울려 그의 사상과 인격에 대해 토론했다. 회문여학교를 졸업한 지 1년 후인 1926년 7월, 최영숙은 사상이 같고 깊이 신뢰하던 중국인 친구 한 명과 함께 무작정 난징을 떠났다. 여성운동의 선진국 스웨덴으로 가서 평소에 동경하던 엘렌 케이도 만나고 사회과학 공부도 하고 싶었다. 난징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려면 육로로 상하이로 이동해 그곳에서 배를 타고 다롄(大連)으로 간 다음, 다롄에서 만주철도를 타고 하얼빈(哈爾濱)까지 가서, 구아(歐亞)연락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했다. 최영숙의 스웨덴 유학 소식은 ‘동아일보’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졌다.

    “경기도 여주군 태생으로 방년 21세 된 최영숙 양은 지난 7월13일 밤 하얼빈에서 구아연락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을 향하여 떠났다. 최영숙 양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려고 단신으로 만리타국으로 간다고 한다. 지난 9일 기선(汽船)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롄에 상륙했을 때, 최영숙 양은 일본경찰에게 잡혀 큰 고초를 겪었다 한다. 그는 후일 고국에 돌아와 몸과 마음을 오로지 고국에 바치기 위해 이 같은 고생을 무릅쓰고 공부하러 멀리 떠난다 한다. 그는 나이 어린 여자의 몸으로 일어와 중국어, 영어에 정통하고, 매사에 재주가 뛰어나다. 최근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한다 하며, 이번에도 사회주의에 관한 서적을 많이 가지고 가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한다.”(‘동아일보’, 1926년 7월23일자)

    최영숙은 난징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스웨덴에서 최영숙은 엘렌 케이를 만나지 못했다. 엘렌 케이는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출발하기 석 달 전인 1926년 4월, 이미 고인이 됐기 때문이다.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

    최영숙은 엘렌 케이의 돌연한 죽음에 낙담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스웨덴어를 배우고 학비를 벌어 대학에서 공부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최영숙의 부친이 포목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곤 하나 딸의 유학비를 감당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떠나기 직전, 그의 부친은 명태 무역에 손을 댔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부친은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해 여주를 떠나 서울 홍파동 빈민가로 이주했다. 난징 유학 시절 최영숙은 집에서 얼마간 학비를 타 쓰기도 했지만, 스웨덴에서는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영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고, 난징에서 한두 달 버틸 수 있는 돈을 가져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음 스웨덴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어쩔 줄 몰랐습니다. 스웨덴의 풍경은 내가 어릴 때 지리를 배우며 상상하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언어와 풍속이 너무 다르고 아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어찌 외롭고 쓸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한 달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울기만 했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울기만 해서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톡홀름 인근 시골학교를 찾아가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개월 간 스웨덴어를 배워가지고 가을 학기에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서전 대학생 생활’, ‘삼천리’, 1932년 1월)

    최영숙은 시골학교 청강생 신분으로 낮에는 스웨덴어를 공부하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았다. 베갯잇 하나를 수놓으면 5, 6원의 수입이 생겨 그다지 힘들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금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1927년 스톡홀름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1926년 아돌프 황태자가 아시아 곳곳을 돌면서 수집해온 자료의 목록을 작성하고 중요 내용을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면서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아는 최영숙은 학구열이 왕성한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황태자 도서관에서 일한 덕분에 최영숙은 스웨덴 지식인들과 폭넓게 사귈 수 있었다. 1935년 스톡홀름대학 자연과학부 학장 스텐 베르크만 박사가 동식물 표본 수집차 조선을 방문했을 때 ‘미스 최’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베르크만 박사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미스 최’를 안다고 했다. ‘미스 최’는 연전에 스웨덴에서 경제학 학사학위까지 받아가지고 귀국했지만 불우한 날을 보내다가 요절한 최영숙씨를 말한다. 기자가 그는 죽었다고 말하니 대단히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스 최는 스톡홀름 박물관에서 수삼차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를 통해 조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스 최는 황태자 도서실에서 동양 서류 정리 업무를 얼마간 보았는데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선일보’, 1935년 2월23일)

    향수병으로 가슴앓이

    최영숙은 스웨덴에 유학 온 첫 동양인이었다. 스웨덴에서 최영숙이 만난 동양인이라곤 중국 대사와 그의 부인이 전부였다. 대학생활은 풍요롭고 행복했다. 스웨덴 학생들은 처음 보는 동양인 학생을 친절하게 대했다. 최영숙은 동양에 중국과 일본밖에 없는 줄 알던 스웨덴 친구에게 조선의 존재를 가르쳐주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여름이면 수영도 하고, 겨울이면 스키도 타러 다녔다. 쓸쓸하게만 느껴지던 스웨덴의 풍경도 점차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외국에서 느끼는 행복에는 한계가 있었다. 20대 초반 여자의 몸으로 홀로 낯선 땅에서 생활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곤한 일이었다. 외국 생활이 길어지자 최영숙은 심각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사후에 공개된 최영숙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가득했다.

    혈혈단신 20세에 / 시베리아 머나먼 길삼등차에 몸을 싣고 / 밤낮으로 떠나와서서전이란 낯선 땅에 / 고객(孤客)된 지 3년이라3년이란 기나긴 날 / 눈물인들 얼마이며 / 한숨인들 그 얼만가말 모르는 외국 땅에 / 금전까지 없을 때에 / 이 내 마음 어떠하랴가을 하늘 달 밝을 때 / 울고 가는 기러기 떼 / 하염없이 바라보며멀리 계신 부모님과 / 사랑하는 동생들아 / 아- 언제나 만나볼까동편하늘 바라볼 때 / 붉은 햇빛 떠오른다 / 금수산에 비취든 해2천만의 배달민족 / 천재인재(天災人災) 슬피 울면 / 황천이 살피소서

    어젯밤 침상 위에 누어 생각했다. 명년에 집에 가면 무엇을 먼저 할까. 부모님 노쇠(老衰)하고 형제들 약소하니 내 할 일 무엇보다 가정을 정돈할 것. 유일한 나의 오빠 완치될 그날까지 마음을 다 바쳐서 오빠 위해 희생할 것. 그 다음 민족 위해 일할 때에 공민학교 설립하고 노동계급 청년남녀 몸과 정신 수양하여 삶의 길을 찾게 하자.(‘청춘에 요절한 최영숙 애사’, ‘제일선’, 1932년 5월)

    처음 보는 동양 여성에게 호기심 반, 사랑 반 구애하는 스웨덴 청년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최영숙은 한 번도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1928년 8월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S군아 / 네 사랑 아무리 뜨겁다 해도 / 이 몸은 당당한 대한의 여자라 / 몸 바쳐 나라에 사용될 몸이라 / 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1930년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은 최영숙은 스웨덴 생활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듬해 1월, 귀국길에 올랐다. 18세에 난징으로 유학 떠난 지 9년 만의 귀향이었다.

    화물칸의 귀부인

    귀국길에 올랐을 때 최영숙의 수중에는 600원 남짓한 돈이 있었다. 아돌프 황태자 연구를 보조하고 받은 돈과 틈틈이 자수를 놓아 번 돈을 모은 것이었다. 한 달에 100원씩 드는 학비를 대고도 그 정도가 남았다. 600원은 교사 월급이래야 50원 남짓이던 조선에서는 큰돈이었지만, 유럽여행을 하자면 몇 달을 버티기 힘든 금액이었다. 최영숙은 귀국길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시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자라는 돈은 도중에 벌기로 했다. 친부모 못지않게 그를 아끼던 스웨덴 유력인사는 최영숙과 작별하면서 “돈이 떨어지면 언제든 전보를 치라”고 당부했다. 최영숙은 자신이 저금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호의를 완곡히 사절했다. 유력인사는 대신 최영숙에게 여행의 편의를 부탁하는 내용의 소개장을 써주었다.

    최영숙은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를 두루 구경하고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스웨덴 유력인사의 소개장 덕분에 가는 곳마다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집트에서 최영숙은 고대 유적을 답사하고 민족운동 지도자와 회견하는 등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긴 여정에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덥고 건조한 이집트의 기후를 접하자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병석에 누워 요양하는 동안 스웨덴에서 가져온 여비를 거의 다 써버렸다. 호주머니 속에는 인도까지 갈 뱃삯밖에 남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서둘러 인도행 기선을 타려 했으나 부두로 가는 도중 사고가 생겨 배를 놓치고 말았다. 사나흘 더 지체하는 동안 인도까지 갈 삼등실 뱃삯마저 떨어졌다. 스웨덴인 유력인사에게 전보를 쳐서 도움을 청할까 하는 유혹이 마음속에서 일어났지만, 끝내 이겨냈다. 최영숙은 ‘다른 사람에게 구구하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활신조를 갖고 있었다. 최영숙은 ‘인도에 가면 조선이 가까우니 거기서 집에 전보를 치리라’고 결심했다. 남은 돈을 털어 ‘쿨리(인도인 노동자)’들이 타는 화물칸에 간신히 자리 하나를 얻었다.

    귀부인처럼 차려입은 동양 여성이 일등실을 지나쳐 이등실 부근으로 갈 때, 인도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등실을 지나 삼등실 부근으로 가자 이번엔 의아하게 여겼다. 삼등실마저 지나쳐 화물칸으로 가자 놀라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일본인 부랑녀인가?”

    “아니다. 중국인 노동자 부인이다.”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인도청년 ‘미스터 로’와 최영숙. 결혼사진이라고 공개되었지만, 실제로 결혼사진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 차림으로 화물칸이라니….”

    “뭐하는 여잔지 한번 물어나 보자.”

    화물칸의 인도인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 침입한 낯선 이방인 여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최영숙은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가는 긴 여정 동안 주로 갑판에서 지냈다. 밤이면 의자 하나에 의지해 노숙을 하고, 낮에는 자수도 하고, 떨어진 의복도 기웠다.

    선상의 기연(奇緣)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 임효정은 최영숙과 인도 청년이 처음 만난 것이 이때라고 진술했다. 임효정은 최영숙의 이화학당 동창으로 난징 유학 생활을 같이했다. 최영숙의 임종을 지켰고, 홍제원 화장장에서 유골을 수습한 유일한 친구였다. 최영숙이 죽은 후 인도 청년과의 관계에 대해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삼천리’ 1932년 5월호에는 스웨덴에서 보트를 타다 물에 빠진 최영숙을 인도 청년 ‘마하드 젠나’가 구해준 이후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됐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까지 실렸다. 이어지는 내용은 임효정의 진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날마다 화물칸 선상에 앉아 있는 동양 여인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등실 승객이 있었다. 문제의 인도 청년 ‘미스터 로’였다. 미스터 로는 화물칸의 동양 여인이 천한 여자가 아님을 눈치채고 있었다. 며칠 동안 먼발치에서 최영숙의 행동을 관찰하다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실례입니다마는 당신은 영어를 하실 줄 압니까.”

    “네, 압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조선 사람입니다. 스웨덴에 유학 갔다가 귀국하는 길입니다.”

    “네? 당신이 과연 조선 사람이십니까? 저도 조선 사람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인도 사람인 까닭에 얼굴이 순혈 조선 사람보다 다소 검지만 분명 조선 사람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과거 어찌하여 인도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성이 노(盧)씨입니다. 저의 성은 로(Row)이고, 이름은 로이(Roy)입니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계모가 들어왔는데, 그후 아버지마저 죽어 홀로된 계모 손에 자라났습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과 인도를 오가며 무역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향인 봄베이로 가는 길입니다.”

    인도 청년은 자신의 사연을 설명하고 최영숙에게 화물칸에 타게 된 이유를 물었다. 최영숙은 스톡홀름에서 카이로까지 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인도 청년은 크게 동정했다.

    “이렇게 볕은 뜨거워지고 몸은 쇠약한데 무리하지 말고 일등실로 갑시다.”

    청년은 일등실 배표를 사주겠다며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최영숙은 초면에 신세를 질 수 없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니오. 나는 여기가 좋아요.”

    청년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같이 화물칸에 찾아와 최영숙과 대화했다. 그들은 조선과 인도에 대해, 간디와 나이두 여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도 청년은 고결한 인품과 총기를 지녔고, 최영숙과 정치적 견해가 같았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최영숙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청년은 재차 일등실로 옮길 것을 청했다. 최영숙도 화물칸에서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집에서 돈이 오면 신세를 갚기로 하고 일등실로 옮겼다.

    인도 청년 ‘미스터 로’의 아버지가 조선 사람이라는 임효정의 진술은 사실이 아니다. 다음은 인도 청년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 최영숙이 신문에 기고한 글의 일부이다.

    “실상 내가 인도를 찾아간 것이나 인도에서 오래 머물게 된 이유는 간디와 나이두 두 분을 만나고 싶은 까닭이었다. 7월 초순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국민회(國民會) 일로 그 전날 밤 늦게야 간디 씨가 봄베이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나는 나이두 여사의 생질이 되는 이로, 이집트에서부터 우연히 동행했고 그동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친구 로 씨와 함께 국민회 장소로 향했다.”(최영숙, ‘인도 유람’, ‘조선일보’ 1932년 2월4일)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삼천리’ 1932년 5월호에 실린 ‘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인도 청년과 만나게 된 과정은 임효정의 진술과 흡사하지만, 최영숙이 기록한 미스터 로는 나이두 여사의 생질이었다. 나이두(Sarojini Naidu) 여사는 벵골지방 브라만 명문가 태생의 여성 정치가였다. 브라만 집안에 조선인의 피가 섞였을 리 없다. 당시 조선사회는 해외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 인도인 혼혈아를 임신해 돌아온 것을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만큼 개방적이지 않았다. 외국인과 사랑한 것도, 부모 모르게 결혼한 것도, 혼혈아를 임신한 것도 모두 허물이었다. 미스터 로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원통하게 요절한 친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하나라도 덜어주기 위해 임효정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짧은 사랑, 긴 이별

    미스터 로의 도움으로 최영숙은 무사히 인도 봄베이에 도착했다. 미스터 로는 최영숙을 위해 친절하게 숙소까지 잡아줬다. 최영숙은 즉시 집으로 전보를 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집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최영숙은 인도의 뜨거운 기후와 객수(客愁)를 못 이기고 다시 병석에 누웠다. 주머니에는 동전 하나 없었다. 병원비는 미스터 로가 대신 치렀다. 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외조모가 재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더는 돈을 쓸 수 없었다. 숙박비를 장기간 체불하자 여관 주인은 한밤중에 가방을 밖으로 내던지고, 최영숙을 내쫓았다.

    최영숙의 부모는 집을 잡혀서라도 여비를 보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영숙이가 혹시 사고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애타는 마음에 백방으로 뛰어다녀 가까스로 300원을 마련했다. 돈보다 배표가 빨리 간다기에 아무 생각 없이 배표를 사서 보냈다. 그러나 기대했던 돈 대신 배표를 받아든 최영숙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보내준 배표로 배를 탄다 해도 오는 도중에 음식 사먹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낯선 거리를 방황하던 최영숙은 하는 수 없이 미스터 로의 집으로 찾아갔다. 미스터 로는 우선 자기 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했다. 얼마 후 최영숙은 기독교여성청년회에서 일어 교사 자리를 얻었다.

    그러는 동안 최영숙과 미스터 로는 서로 인격을 존경하고 학식을 숭배하는 연인이 됐다. 그들은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하고 정식 결혼신고까지 마쳤다. 사랑의 선물로 뱃속에 아이까지 생겼다. 그러나 최영숙은 영원히 인도에서 살 수는 없었다. 결혼한 지 석 달이 못 된 어떤 날, 최영숙은 남편에게 귀국할 뜻을 전했다.

    “가시오.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공부시킨 뜻을 잊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가 고국을 위해 일하겠다는데 낸들 어찌 말리겠소. 그러면 가시오.”

    노(盧) 씨는 엄숙히 생이별을 고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1년에 한 번씩은 꼭 오세요. 어린애는 고이 가꾸어 큰 일꾼으로 만들 작정이니….”

    그들은 사랑의 애달픈 정을 보다 위대한 열정에 희생하고 작별을 고했다.”(‘경제학사 최영숙 여사와 인도청년의 연애관계 진상’, ‘동광’, 1932년 6월)

    최영숙은 넉 달간의 짧은 인도 생활을 마치고 1931년 11월 귀국했다. 최영숙은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결혼과 임신 사실을 임효정에게만 살짝 귀띔했다.

    “이 아이는 그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다. 이 아이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비범한 인물인 까닭이다.”

    남편을 인도에 두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최영숙은 우선 직업을 얻어 가정부터 정리해놓고, 인도로 돌아가 살든지 아니면 남편을 불러 조선에서 살든지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귀국하고 보니 집안 형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첫째동생 최영선은 여자상업학교를 마치고 출가하고, 둘째동생 최복정이 이화여고보를 마치고 여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부모와 정신병을 앓는 오빠를 부양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스웨덴’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학사학위’까지 받은 최영숙이 귀국만 하면 집안 형편이 한순간에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최영숙 또한 한순간에 모든 것을 해결하진 못한다 해도, 집안에 얼마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나는 돈의 철학을 알았소!”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활이 날로 어려워지자 결혼반지까지 금은방에 내다팔았다. 온 집안의 고무신을 모조리 모아다가 전당포에 잡혀서 끼니 때울 양식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최영숙은 누구에게도 경제적 곤란을 말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가 얼마간 도와주려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다른 사람에게 구구하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활신조 때문이었다.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스톡홀름대학 재학시절 최영숙 사진이 실린 조선일보 기사.

    생활이 이렇듯 어려웠지만, 사회를 위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섰다. 낙원동 여자소비조합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손해를 입을 줄 알면서도 자금을 변통해 인수했다.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가 ‘콩나물장사’에 나선 것은 생계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소비자운동을 위해서였다. 이화학당 시절 은사 김활란이 공민학교를 세울 계획을 말하자 만사를 제쳐두고 공민독본 편찬에 나섰다. 밥을 굶어가며 도서관에 다녔다.

    임신한 몸으로 취직자리 알아보랴, ‘콩나물장사’하랴, ‘공민독본’ 편찬하랴 백방으로 뛰어다니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영양실조, 소화불량, 임신중독이 차례로 찾아왔고 급기야 각기병까지 걸려 두 다리가 부어올랐다. 임효정은 “얘, 임신을 하면 다리가 좀 붓기는 하지만 과로하면 안 된다. 게다가 잘 먹지도 못하잖니. 조금도 염려 말고 우리 집에 와 있어라”며 여러 번 권했다. 그러나 최영숙은 “아니다. 가족들이 굶주리는데 나 혼자만 어떻게 배불리 먹니?”하며 한사코 거절했다.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딸이 번듯한 직장 하나 얻지 못하고 경제적 곤란을 겪는 동안 부모는 끼니를 굶으면서도 딸에게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보냈다.

    부모의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은 최영숙에게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며 5개월을 지내자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 최영숙은 실신해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다. 사랑의 결실을 낙태 수술로 지웠고,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었고,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홍파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4월23일 오전 11시, 최영숙은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집은 빈한하고 당장 매장할 준비조차 없다. 여사의 평생 동지였던 임효정 여사가 장례비 일체를 부담하는 형편이다. 육십 된 노부모가 망극하여 통곡하는 광경은 실로 쓸쓸하다.”(조선일보, 1932년 4월25일)

    4월25일 최영숙은 영면할 묏자리 한 평 구하지 못해 홍제원 화장장에서 재가 되었다. 미스터 로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최영숙은 세상을 달관한 듯 “돈! 돈! 나는 돈의 철학을 알았소이다”고 썼다. 그러나 편지를 부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슴 아픈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영숙이 세상을 떠난 지 며칠 후, 미스터 로로부터 여비를 보내니 인도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왔다.

    조선의 여인, 최영숙

    최영숙과 미스터 로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였는지, 약혼한 사이였는지, 그저 연인 사이였는지 확실치 않다. 미스터 로의 정체 또한 모호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최영숙이 투철한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여성운동가, 노동운동가가 되기를 희망했고, 조국을 위해 쓰이기를 바랐고, 스톡홀름대학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고, 조선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비참하게 죽었고, 죽어서도 손가락질 당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시대를 앞서간 인텔리 여성을 이처럼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따지자면 최영숙에게 잘못이 없지는 않았다. 여자로 태어났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고, 이방인을 사랑했고, 혼혈아를 임신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원하지도 않는 조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全峯寬
    ● 1971년 부산 출생
    ●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등


    최영숙에게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만일 그가 스웨덴에 눌러앉았다면,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한평생 공주처럼 살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인도에 남았다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아름답게 늙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숙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에 돌아왔고, 27세 꽃다운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30년 만에 고국을 찾은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가 “그때 내가 워드 데리고 한국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 놈 거지밖에 안 됐겠지?”라고 말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영숙의 삶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최영숙이 74년이 지난 오늘날 태어났다 하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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