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교수, 나 허정뭅니다. 거기 어디요?”
“김포공항입니다. 제자들과 제주도로 졸업여행 가려고 탑승구에 줄서 있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협회로 오는 건 무리겠네. 알았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기술위원 좀 맡아주시오.”
“전 경기인 출신도 아니고...”
“이봐요 장 교수, 집에 불이 났다고 쳐요. 화재원인이 뭐냐, 피해액이 얼마냐를 따지는 건 나중 일이고, 일단은 불부터 끄고 봐야 하는 것 아니오? 한국 축구는 지금 위기일발이요.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대로 협회에서 만납시다. 시간이 없어요.”
5월18일, 이회택 위원장 체제의 첫 기술위원회가 열렸다. 상견례를 겸해 점심을 함께 했는데, 비장한 분위기가 마치 출전전야의 독립군 작전회의를 연상케 했다. 정말 시간이 없었다. 쿠엘류 감독과 대한축구협회가 합의하에 계약을 종료한 시점은 4월19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한 달이 넘도록 선장을 구하지 못하고 표류했다.
세계 축구시장의 중심은 서유럽이다. 이 지역의 시즌은 매년 8월 중하순에 시작하여 이듬해 5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것이 관례. 시즌의 명칭을 ‘98∼99시즌’ ‘03∼04시즌’ 식으로 표기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3주 동안이 이른바 하이시즌이다. 이 기간에 주요 선수와 감독의 이적 협상이 활발히 논의되고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를 놓치면 협상의 효율성도 떨어지고, 모두 제 갈 길을 찾아간 뒤끝이므로 능력 있는 감독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따라서 대한축구협회에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두 주 남짓. 서둘러 감독 선정 원칙을 정해야 했다. 월드컵 16강 이상 진출 실적이 있는가, 문화적응력이나 선수장악력은 어떤가, 언어 구사력을 포함,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가….
‘밀실행정’에서 ‘투명행정’으로
대한축구협회의 국가대표 감독 선임기준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문제는 선임 과정이었다. 감독 선임이 비밀리에 이뤄진 탓에 결과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분명치 않고 여러 부작용이 생길 여지가 많았던 것이다.
이것이 쿠엘류 하차 후에 터져나온 언론의 지적사항이었다. 그렇다면 공개선임으로 가자. 다수의 지혜를 모아 최고의 선택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감독 공개선임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나 위기상황에서 관례만 고집할 수는 없는 법. 기술위원회는 1차 후보 10명을 선정하고 다섯 시간의 토의를 거쳐 4명의 최종 후보를 발표하기로 했다.
메추(2002년 세네갈 감독, 8강), 스콜라리(2002년 브라질 감독, 현 포르투갈 감독), 멕카시(2002년 아일랜드 감독, 16강), 귀네슈(2002년 터키 감독, 4강)로 접촉 대상을 압축 선정하자 언론에서는 ‘한국 축구 행정이 진일보했음을 보여준 사례’라며 ‘밀실행정에서 투명행정’으로 나아가는 몸짓을 보여줬다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이회택 위원장, 허정무 부위원장, 그리고 필자 3인은 5월21일 오후 8시30분 UAE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럽 출장중이던 가삼현 국제부장 등 축구협회 지원팀은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처음 접촉한 사람은 메추 감독. 22일 오후 5시15분이 ‘작전시간’이었다. 작전은 서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메추의 현직은 UAE리그 소속 알 아인팀의 감독. 알 아인은 당시 UAE리그 선두로 24일 최종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상위 두 팀의 승점이 같을 경우 골 득실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UAE리그의 로컬 룰. 24일 경기에서 알 아인과 2위팀이 모두 승리하면 28일 우승팀 결정전을 치르는 것이 경기 일정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알 아인의 라이벌팀은 최종 경기에서 패배해 24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알 아인 구단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약속 시간과 장소는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우리 쪽에서 결정했다. 알 아인의 경기 일정상 무리한 요구를 상대가 들어준 셈이니 우리 쪽에서도 예의를 갖춰야 했다. 별도의 방을 예약하고, 동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기술위원 일행은 사람이 각각 다른 통로를 이용해 현장에 집결했다.
이윽고 장장 네 시간의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축구철학, 전술특징, 훈련방법, 한국 축구에 대한 이해도, 향후 목표 등에 대한 광범위한 대화가 홍수처럼 오고 갔다. 기술위원회는 메추만이 아니고, 네 명의 감독 후보 모두와 각각 몇 시간에 걸쳐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귀국 후 대화록을 포함한 보고서를 작성, 대한축구협회에 제출하였으니 때가 되면 이들 자료가 공개될 수도 있을 터다.
말이 난 김에 기술위원회 얘기를 잠깐 하고 가자. 기술위원회는 대표팀, 올림픽팀, 청소년팀 등 각급 대표팀의 감독 선임 및 선수 선발,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장기 계획 등을 연구하고 입안하는 기구다. 실로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