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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베를린의 남북첩보전쟁 4반세기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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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가 독일에 발을 디딘 것은 정확하게 이 무렵이었다. 194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서독으로 유학을 왔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 ‘수재형 학자’가 중앙정보부의 레이더에 처음 포착된 것은 1974년 무렵. 은퇴한 옛 중정 대공수사국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독일에 나가 있던 요원으로부터 송두율에 대한 첫 SRI(Special Request Information·특정사안에 대해 긴급한 조사가 필요할 때 사용되는 지시문)가 온 것은 그가 독일에서 결성된 운동단체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이하 민건)’의 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직후였다. 당시의 SRI는 송두율의 대학 재학 중 이적활동 여부를 조사해보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 이후 술렁거리던 서독 교민사회는 1974년 3월1일 3·1절 55주년을 기념해 수도 본의 베토벤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민건을 출범시킨다. ‘동백림 사건’의 관련 인사들을 중심으로 젊은 유학생들이 결합했던 이 단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만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입장이 엇갈리곤 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말이다. 서른의 젊은 나이였던 송두율 교수가 ‘쟁쟁한 선배’들을 놔두고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와 관련이 있었다고 민건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설명한다.

“초기 민건의 오피니언 리더 그룹은 서울대 철학과 출신 유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중정 요원들의 감시가 집중될 것이 뻔한 회장 자리를 선뜻 맡으려 하는 이는 없었다. 송교수는 이 서울대 철학과 출신 그룹의 막내 격이었다. 흔한 말로 ‘총대를 메는’ 식이었다.

한편으로는 민건 내부의 입장 차이 탓도 있었다. 크게 나누면 ‘선 통일 후 민주’와 ‘선 민주 후 통일’의 차이, 한마디로 북한에 대한 입장의 차이였다. 송교수는 비교적 중간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큰 반대 없이 회장이 되었다.”



‘간첩두목’과 ‘영웅’

그러나 최근 국정원 조사에서 확인된 것처럼 송교수는 민건 회장을 맡기 이전인 1973년 이미 평양을 방문해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중앙정보부와 후신인 안기부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주요 조직사건을 터뜨릴 때마다 윤이상과 송두율이 그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고 발표했다. 한 전직 안기부 대공수사요원은 “솔직히 분명한 증거가 없어도 윤이상이나 송두율을 끌어다 붙이는 경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다.

한국 정부가 그를 ‘간첩 두목’으로 지목할수록 북한에서의 그의 위상은 점점 상승했다. 송교수가 ‘김일성 주석과 한 시간 넘게 독대한 인사’였던 까닭에 북한 관계자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분위기였다고 오길남씨는 전한다. 이후 노동당 통일전선부는 그를 ‘유럽에서 북한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창구’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1999년 9월 서울지법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송교수는 1993년 무렵 서울의 모 월간지에서 요청한 주체사상 관련원고 청탁을 황 전 비서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자신이 원고지 100매 분량의 원고를 작성해 송교수에게 건네주었다고 황 전 비서는 증언했다.

그러나 독일 현지 교민들은 “주체사상이나 통일을 주제로 한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제외하면 송교수가 운동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 결성된 ‘재유럽 민족민주운동협의회(이하 유럽민협)’나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등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간혹 강연이나 기고요청에 응하거나, 술자리 등에 마지못해 참석해 충고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며 한국에서의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재독 교민단체의 운동 역시 탄력을 받았다. 특히 1990년 11월 결성된 범민련은 통일운동을 표방하며 공식적으로 북한 인사들과 접촉했다. 또한 1989년 임수경씨의 방북, 1992년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이하 범청학련)의 결성 등이 맞물리면서 운동단체 인사들에게 북한은 더 이상 경계대상이 아니었다.

거꾸로 보면 이 시기는 북한측의 포섭공작 또한 절정에 이른 시점이기도 했다. 이 무렵 북한 이익대표부 공작원들은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교포들을 접촉해 입북을 권유하곤 했다. 또한 교포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공공연히 친북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고 교민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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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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