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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체류 13년, 특파원이 몸으로 쓴 현장 秘話

모스크바 ‘100달러면 안 되는 게 없는 나라’에서 ‘억만장자 수 세계 2위국’으로

  • 김기현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러시아 체류 13년, 특파원이 몸으로 쓴 현장 秘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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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초 세계신문협회(WAN) 총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세계 각국의 신문 발행인과 편집인, 저명한 언론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당시 한국 대표단이 묵은 5성급 호텔의 하루 숙박비는 50만원이 넘었다. 평범한 1인실(single standard)이 그 정도다. 그나마 국가적인 차원에서 준비한 국제행사라 러시아 정부가 나서서 할인해준 가격이었다. 이 기간에 개인적으로 호텔을 예약한 여행객이 같은 수준의 방에서 자려면 70만원이 넘는 돈을 내야 했다.

머서휴먼리소스가 분석한 모스크바의 고물가 원인은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었다. 서울과 비슷하다. 모스크바 시내의 일반적인 신축 아파트의 분양가는 ㎡당 2000달러 정도로, 평당 600만원이 되는 셈이다. 그만하면 싼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러시아의 아파트는 도배도 돼있지 않고 심지어 전등조차 달려 있지 않은 채로 분양되므로 내부는 입주자가 알아서 꾸며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비용을 계산하면 평당 1000만원이 훨씬 넘는다. 요즘 한창 유행인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는 평당 2000만~3000만원대에 달한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서울 강남의 부동산 가격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러니 한국 기준으로 30평형대에 해당하는 아파트의 한 달 임대료는 2000~3000달러, 외국인들이 살 만한 고급 아파트의 월세는 5000달러가 넘는다.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의 주재원들조차 고개를 내젓는다. 더 큰 문제는 모스크바의 물가가 여전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냥 치솟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1993년 처음 모스크바에 유학 왔을 때 한국으로 치면 10평대 원룸에 해당하는 아파트를 구했다.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모스크바 강변에 위치한, 1980년대에 지은 비교적 새 아파트였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기숙사에 살았지만 신혼이던 우리 부부는 방해(?)받기 싫다는 이유로 아파트에서 살았다. 월세는 100달러, 당시 환율로 8만원 정도였다.

그래도 동료 유학생들은 “왜 그렇게 ‘고급’ 아파트에 사느냐”고 면박을 줬다. 방 한 칸짜리 아파트 월세가 50~70달러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요즘 모스크바 시내에서 비슷한 수준의 아파트를 구하려면 월 600~700달러는 족히 든다.



1달러-1루블=1달러?

1992년 가격자유화조치가 단행되기 이전의 러시아 물가는 ‘살인적으로’ 쌌다. 물론 달러 같은 경화(硬貨)를 가진 외국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계획경제라 물가도 환율도 국가가 통제했다. 외국인과 내국인에게 적용하는 물가가 각기 다른 ‘이중가격제’였다.

하지만 공식환전소가 아닌 암달러상(商)에게 루블로 바꾸면 은행 환율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거액의 돈이 생겼다. 다 쓰기 어려울 지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식환율을 억제했지만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 대 루블의 환율이 매일같이 뛰었기 때문에 달러만 있으면 연간 1000%가 넘는 인플레이션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어디서건 100달러만 있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상점에서 거리낌없이 달러로 계산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유행하던 농담 가운데 “1달러와 1루블의 차이는 얼마일까?”라는 것이 있었다. 정답은 1달러다. 1루블은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1달러 빼기 0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루블이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루블을 경화로 만들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이 외국여행을 갈 때 외화로 바꾸지 않고 그냥 루블만 들고 나가면 되게끔 만들겠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어디를 가나 환전이 가능한 ‘경화’로는 달러와 유로, 엔, 파운드가 꼽힌다. 물론 푸틴 대통령의 장담은 과장이 좀 섞인 것이지만, 요즘 루블이 초강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근 5년 동안 고유가로 엄청난 규모의 ‘오일머니’를 벌어들인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는 이미 2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세계 5위 규모다.

1990년대 러시아를 여행한 사람들이 다시 러시아에 놀러와 당시의 경험에 의존하다가 낭패를 보는 일을 간혹 본다. 1990년 한-러 수교 직후 ‘러시아 붐’이 한창일 때 러시아를 다녀간 한국인들은 러시아를 ‘가난하고 지저분한 대국’으로만 알고 돌아갔다. 러시아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한번 가봤더니 별거 아니던데…” 하는 우월감이 자리잡았다. “100달러를 흔들었더니 백계 러시아 미인이…” 하는 천박한 무용담이 경험과 인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한국을 어떻게 인식할까. 처음에는 ‘작지만 친해두면 괜찮을 부자나라’로 생각하고 수교를 맺었는데, 겪어보니 ‘속았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한러 관계의 발전이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서로에 대한 인식이 10여 년 전에서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하고 멈춰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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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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