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는 11월호를 통해 황석영 소설 ‘강남몽’ 4장 ‘개와 늑대의 시간’이 ‘신동아’ 조성식 기자가 저술한 논픽션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를 빼닮았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0월19일자 사설에서 “표절 시비에 답하라”고 황 작가에게 요구했다. 황 작가는 ‘신동아’가 아닌 ‘경향신문’에 답을 보냈다.
“표절에 해당하는가는 더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게 답변 요지다. ‘경향신문’ 10월25일자에 실린 글을 통해 밝힌 대로라면 ‘신동아’와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저자는 “집필에 도움이 되었던 많은 분”에 해당하는데도 조성식 기자, ‘신동아’엔 해명은커녕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신동아’는 황 작가에게 “왜 ‘신동아’가 아닌 경향신문에 반론을 보냈느냐”고 되물으면서 ‘삼국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과 관련한 질문을 장문의 e메일로 보냈다. 황 작가는 ‘신동아’ 12월호 마감 하루 전인 11월14일 밤 질문에 답하는 글을 보내왔다.(133쪽 상자기사 참조)
먼저 ‘경향신문’에 실린 해명을 뜯어 읽어보자.
“저는 지난 9월부터 새 작품 집필 관계로 중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동아’ 송홍근 기자가 수차 연락을 취했다는데 외부와의 연락을 두절하고 작품에만 전념하고자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던 터라 지난 토요일(10월16일) 밤늦게야 국내에 있는 집사람을 통해 메일 내용을 겨우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이미 ‘신동아’는 제작 중이었을 테지요. 이와 관련해 신동아가 발간되자마자 다음날 저의 답이 늦다고 ‘동아일보’가 사설에서까지 거론을 하였는데, 저간의 제 사정이 이와 같았습니다.”
황 작가는 10월10일 중국 쿤밍(昆明)발 인천행 비행기가 탑승객을 실을 때 쿤밍공항에 있었다. 10월16일엔 일산 호수공원을 산책했다. ‘신동아’가 의견을 듣고자 휴대전화, 집 전화, SMS, e메일로 그를 수소문하던 때다. 출판계를 통해 근황도 확인했다. 제주도에 머문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휴대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전원이 꺼져 있거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황 작가도 11월14일 밤 ‘신동아’와의 전화통화에서 제주도에 머물렀다고 밝혔다.
해명엔 거짓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9월부터 새 작품 집필 관계로 중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은 사실에 어긋난다. 해명을 더 읽어보자.
술에 물 타기
“문제로 지적된 4장 부분 또한 ‘신동아’ 2007년 6월호에 실린 인터뷰 내용뿐만 아니라 인터넷상에 떠있는 각종 회상자료와 인터뷰 내용 등을 참조했습니다. 인터뷰를 바탕으로 근대화 기간 동안의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사실을 인용하면서 인물에 따라서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장면’에 조명을 가하여 소설적 윤색을 했던 것이지요.”
조성식 기자는 ‘집필에 도움이 되었던 많은 분’의 하나일 뿐인가.
‘강남몽’에서 서술한 조양은·조창조·김태촌 관련 내용의 상당 부분은 ‘신동아’ 기사와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이외에는 나와 있지 않다. ‘강남몽’ 4장은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와 ‘신동아’ 2008년 9월호 ‘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 1인자 조창조가 털어놓은 주먹과 정치’, ‘신동아’ 2007년 6월호 ‘김태촌·조양은 40년 흥망사’에 기대어 있다.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는 저자가 ‘신동아’에 썼던 기사 내용과 출간을 위해 새로 취재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문제의 두 기사 내용 역시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에 실려 있다.
‘강남몽’을 펴낸 출판사 창비는 황 작가 뜻에 따라 11월15일자로 인쇄한 ‘강남몽’ 18쇄 379쪽에 강남몽에 도움을 준 ‘참고자료’를 명시했다. 18쇄는 서점에 깔린 17쇄를 소진한 후 유통한다고 한다. 황 작가는 참고한 도서로 ‘신동아’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외에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해방 직후의 민족문제와 사회운동’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청산하지 못한 역사’ ‘실록 친일파’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등 15권을 더 언급했다.
참고자료로 명시한 도서의 대부분은 4장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과 관련한 것이다. 1장, 2장, 3장, 5장과 관련해선 표절 시비가 불거지지 않았으며 표절이라고 몰아세울 만한 부분도 없다.
‘강남몽’ 4장 ‘개와 늑대의 시간’은 “강남몽에서 가장 활력 있는 서사를 보여주고 있는”(‘한겨레’ 11월5일자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조립소설과 서사기술자’ 제하 칼럼) 부분이다. 4장의 에피소드들은 살아 숨쉰다. “나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약점을 다 간파하고 그것을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권투하는 놈은 유도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으로 무너뜨렸지요”(‘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 라는 문장을 “그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각 부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상대방이 권투하는 자세로 나오면 유도 식으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이나 태권도로 공략했다”고 바꾼 건 광복 전후 역사를 이해하고자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것과는 결과 켜가 다르다. ‘강남몽’ 4장엔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의 디테일을 가져다 쓴 부분이 숱하다. 디테일을 따와 윤색하거나 문장을 바꾼 것과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를 읽고 역사를 공부한 건 다르다. 4장이 아닌 다른 장에서 말 그대로 참고만 한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다수의 역사 서적을 참고자료 목록에 끼워 넣은 걸 납득하기 어렵다.
‘강남몽’ 18쇄가 명시한 참고자료엔 94쪽 분량의 단행본인 ‘조폭의 계보’라는 저작도 실려 있다. 왜 이 책이 참고자료 목록에 올랐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만 참고한 게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황 작가가 ‘조폭의 계보’를 베꼈다고 의심할 만한 대목을 찾지 못했다. 이 책 또한 표절 시비를 희석하고자 목록에 올렸다는 게 ‘신동아’의 판단이다.
조립소설과 서사기술자
해명은 솔직해야 하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이명원씨가 ‘조립소설과 서사기술자’(‘한겨레’ 11월5일자)라는 칼럼에서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황석영과 같은 중견작가들조차 이런 조립소설을 쓰는 일의 문제성이나 그 파장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어 보인다는 점은 크게 우려스럽다. 표절과 도용, 영향과 모방을 둘러싼 문학이론을 앞세우기 전에, 소설적 인물과 사건을 상상하고 창안하는 창조적 작가의 고된 수고 대신, 자료의 재구성이나 조립에 시종한다면 그것은 서사기술자에 불과하다. 작가는 작품을 쓰고 서사기술자는 서사물을 조립한다. 작품도 질을 따지고 상품도 기능의 우수성을 판단하지만, 창조에서 조립으로 떨어진 서사물이 짝퉁의 혐의까지 받고 있다면, 이건 소설이 아니다.”
황 작가 해명은 이렇게 끝난다.
“이 일로 물의가 빚어진 것은 유감입니다. 이것이 언론의 선정적 행태를 지양하고 창작자의 권한을 존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창작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황 작가인가, 조성식 기자인가. 아니면 브루스 커밍스인가. 선정적 행태라는 구절은 또 뭔가. 표절의혹을 제기한 ‘신동아’를 슬며시 선정적 언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해명은 명쾌해야 한다. ‘공지영과 황석영’이라는 제목이 붙은 10월27일자 ‘동아일보’ 칼럼을 인용한다.
“참고자료 중에서 ‘신동아’는 극히 일부인가. ‘강남몽’ 4장에서 인물의 캐릭터와 대화, 배경을 중심으로 신동아가 비슷하다고 대표적으로 꼽은 부분만 15곳 정도다. 두 저작이 비슷하다고 지적하는 기사, 출처를 소명하라는 사설의 어디가 선정적인가. 선정적이라는 단어를 황씨가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씨는 “깡패들의 이야기를 좀 가져왔기로소니, 뭐 큰일이겠습니까? 그런 대담함이 또한 황석영”이라고 말했다.
11~ ▶ 한편 주유는 승리를 거두고 영채로 돌아와 삼군에 상을 내리고, ……(황본 4권-199쪽)
▶ 한편 주유는 싸움을 이기고 대채로 돌아가자 삼군에 후히 상을 내리는 일변, ……(청년사 3권-85쪽)
[원문] 각설주유득승회채, 호상삼군, ……(却說周瑜得勝回寨, ?賞三軍, ……)”(45회)
[문제점 해설] “호상(?賞)”이란 음식이나 재물을 주어 위로와 함께 상을 내리는 걸 말한다. 승리의 잔치에서 우승 골을 넣은 자에겐 특별상을 줄 것이고 더 많은 숫자의 나머지 조역들에겐 적당한 음식이나 재물로 노고를 치하하는 법이다. 삼군 전체에 똑같이 상을 내린다는 식의 표현은 지나치게 안이한 번역이다.
12~ ▶ “내 생각에는 조조가 비록 두 번이나 우리 계책에 속아 넘어갔으나 아직도 아무런 방비를 안 하고 있소이다.”(황본 4권-226쪽)
▶ “내가 짐작컨대 조조가 나의 그 계책에 두 번이나 속았으면서도 필시 방비를 하지 않고 있을 것인데, …….”(청년사 3권-105쪽)
[원문] “오료조조수양번경아저조계, 연필불위비.(吾料曹操雖兩番經我這條計, 然必不爲備.)”(46회)
[문제점 해설] 두 번역 모두 “연필불위비(然必不爲備)”에 대해 명백한 의미를 제시하지 못하고 동일한 표현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장은 앞뒤의 상황을 세밀히 살펴야 그 숨은 뜻을 파악할 수 있다. 두 번이나 속았지만 “필시 화공만큼은 대비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란 뜻으로 봐야 타당하다.
13~ ▶ “만약 두 사람이 큰 공을 세운다면, 반드시 벼슬이 남의 윗자리에 있을 것이오.”(황본 4권-241쪽)
▶ “만약에 두 분이 능히 대공을 세운다면 후일 작록이 반드시 남보다 위에 있으리다.”(청년사 3권-116쪽)
[원문] “약이인능건대공, 타일수작, 필재제인지상.(若二人能建大功, 他日受爵, 必在諸人之上.)”(47회)
[문제점 해설] “제인지상(諸人之上)”이란 일반적인 “남의 윗자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윗자리” 즉 상당히 높은 직위를 암시한다.
14~ ▶ “바라건대 선생은 강동으로 돌아가 황개와 거사를 정한 후 다시 내게 소식을 전해주어야겠소이다.”(황본 4권-242쪽)
▶ “선생은 수고스러워도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서 황공복과 약속을 정하고 먼저 이리로 소식을 통해주면…….”(청년사 3권-116쪽)
[원문] “번선생재회강동, 여황공복약정, 선통소식과강, …….(煩先生再回江東, 與黃公覆約定, 先通消息過江, …….)”(45회)
[문제점 해설] (1) 황본에서 “재회(再回: 다시 강동으로 돌아가다)”를 “재통(再通: 다시 소식을 전해주다)”으로 오역했다. (2) 약속이나 한 듯 둘 다 “과강(過江: 강을 건넌다는 소식)”을 빼먹고 번역했다.
15~ ▶주유는 즉시 좌우에게 분부한다.
“자익을 서산 암자로 모시고 가 편히 쉬게 하라.”
장간이 입을 열어 한마디 하려 했으나, 주유는 그대로 장막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황본 4권-247쪽)
▶하고 그는 즉시 좌우를 불러서,
“자익을 서산 암자로 모시고 가 편히 쉬게 하라.”
분부하고 다시 장간에게 말하였다.
“내가 조조를 깨뜨린 뒤에 자네를 강 건너에 보내드리겠네. 그래도 늦을 것은 없겠지.”
장간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주유는 벌써 장막 뒤로 들어가 버리고, …………”(청년사 3권-120쪽)
[원문] ……편교좌우: “송자익왕서산암중헐식. 대오파료조조, 나시도니과강미지.(……便敎左右: “送子翼往西山庵中歇息. 待吾破了曹操, 那時渡·#54991;過江未遲.)”
장간재욕개언, 주유이입장후거료.(蔣干再欲開言, 周瑜已入帳後去了.)(47회)
[문제점 해설] 다양하게 산견되는 누락 부분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이다. (1) 황본에는 밑줄친 두 줄이 누락되었다. 즉, 옌볜대본에는 “자익을 서산 암자로 모시고 가 편히 쉬게 하라”는 대화체 뒤에 설명문 한 줄과 대화체 한 줄이 더 이어진다. (2) 그러나 원문에서 확인되듯, “자익을 서산 암자로 모시고 가 편히 쉬게 하라”는 대화체와 “내가 조조를 깨뜨린 뒤에 자네를 강 건너에 보내드리겠네. 그래도 늦을 것은 없겠지”라는 대화체는 하나의 따옴표 안에 연결된 두 문장이며, 이 두 대화체 사이에는 별도의 설명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하나의 대화체를 두 개의 대화체로 분리하고 그 사이에 “분부하고 다시 장간에게 말하였다” 라는 설명문을 첨가한 것은 옌볜대본 번역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자의적 의도이다. (4) 따라서 황본에서 “자익을 서산 암자로 모시고 가 편히 쉬게 하라”는 대화체 뒤가 뚝 끊어지고 나머지 대화체가 이어지지 않는 것은 옌볜대본과 같다.
16~ ▶ “군중에 용한 의원은 있는지요?”
조조가 되묻는다.
“무슨 일로 의원을 찾으십니까?”(황본 4권-250쪽)
▶ “군중에 용한 의원이 있는지요?”
“의원은 무엇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청년사 3권-122쪽)
[원문] “감문군중유양의부?”조문하용.……(“敢問軍中有良醫否?”操問何用.……)(47회)
[문제점 해설] 원문의 “조문하용(操問何用)”을 대화체로 변형했다. 옌볜대본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나, 황본의 처리가 매우 우습다. 설명문을 대화체로 바꾼 상태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다시 설명문을 추가한 것이다.
17~ ▶ 장간은 다가가 가만히 안을 엿보았다. 방안에는 한 사람이 벽에 칼을 걸어놓고 등잔불 아래 단정히 앉아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외우고 있었다. (황본 4권-248쪽)
▶ 장간이 앞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사람이 칼을 걸어놓고 등잔 아래서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외우고 있는 것이다.(청년사 3권-120쪽)
[원문] 간왕규지, 지견일인괘검등전, 송손·오병서.(干往窺之, 只見一人卦劍燈前, 誦孫·吳兵書.)”(47회)
[문제점 해설] “송(誦)”을 어떤 식으로 풀이하든 그것은 번역자의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조용한 암자에서 하필이면 병서를 “외운다(배송:背誦)”는 광경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목청을 가다듬어 소리 내어 읽는 “낭송(朗誦)”이 아무래도 우리식 정서에 부합하는 광경이 아닐까. 특히 “깜깜한 방”이 아니라, “등잔불이 켜진” 환한 방안에서 말이다.
18~ ▶ 조조가 큰 배에 오르는데, 한복판에 수(帥)자기가 펄럭이고 양편에는 수많은 수채가 열을 이루었으며, 선상에는 궁노수 1천여명이 매복하여 삼엄하게 경호한다. (황본 4권-258쪽)
▶ 한 척 큰 배 위에 올라 중앙에다가 ‘수자기’를 세워놓고 양옆 수채 선상에는 궁노수 천명을 깔아놓고서 자기는 그 위에 좌정하였다.(청년사 3권-127쪽)
[원문] 승대선일척어중앙, 상건“수”자기호, 양방개열수채, 선상매복궁노천장. 조거어상. (乘大船一隻於中央, 上建“帥”字旗號, 兩傍皆列水寨, 船上埋伏弓弩千張. 操居於上.)(48회)
[문제점 해설] 원문의 어(於)는 큰 배가 위치한 장소를 지정하는 개사(介詞)이다. 따라서 “중앙(中央)”이란 수없이 늘어선 배들의 중앙에 큰 배가 위치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역본은 약속이나 한 듯 “수”자기의 위치가 큰 배의 중앙에 있다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19~ ▶장남이 창을 들고 뱃머리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하니, 군사들은 비록 수전에는 능숙하지는 못하지만-황씨 첨가어) 배 양편으로 늘어서서 주태와 한당의 배를 향하여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댄다.(황본 4권-269쪽)
▶장남이 창을 꼬나들고 뱃머리에 가 서서 양편의 사수들을 시켜 화살을 어지러이 쏘게 하는데,……(청년사 3권-135쪽)
[원문] 장남정창입어선두, 양변궁시난사(張南挺槍立於船頭, 兩邊弓矢亂射.) (48회)
[문제점 해설] 청년사본에서도 “(아군 측 배) 양편의 사수들을 시켜” 화살을 쏘게 했다 하고, 황본에서도 “군사들을 독려”하여 “주태와 한당의 배”를 향해 “빗발치듯 화살을 쏘아대게 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시킨다”거나 “독려하다”는 등의 사역형 동사가 없다. 즉 여기서 “兩邊”이란 아군 뱃전에 늘어선 양측이 아니라 피아(彼我) 간의 양측이란 뜻이다. 본래의 뜻은 이렇다. “장남이 창을 꼿꼿이 들고 뱃머리에 서자, (아군과 적군의 배) 양측 (배의) 군사들이 (서로) 어지럽게 화살을 쏘아댄다”라는 내용. 이 장면은 주태와 장남의 배가 서로 맞대결하는 긴박한 전투 상황이다.
20~ ▶ “11월 20일 갑자날에 바람을 빌려 22일 병인날에 바람을 그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황본 5권-11쪽)
▶ “십일월 이십 갑자일에 바람을 빌려서 이십이 병인일에 그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청년사 3권-139쪽)
[원문] “십일월이십일갑자제풍, 지이십이일병인풍식, 여하?(十一月二十日甲子祭風, 至二十二日丙寅風息, 如何?)”(49회)
[문제점 해설] “제풍(祭風)”은 “바람에 제사를 지내다” 또는 “바람에 빌다”로 해야 하며, 조기백화(早期白話)를 동원하더라도 “신통력 있는 바람을 사용하다” 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바람을 빌리다”로 본 것은 “차풍(借風)”과 “제풍(祭風)”의 발음상 유사성을 습관적으로 수용하는 중국식 오역이며, 황본에서는 또 그것이 여과 없이 답습돼 있다.
21~ ▶ 조인은 아우 조홍을 이릉으로 보내 지키게 하고, 자기는 남군을 지키며 주유를 방비하기로 했다.(황본 5권-48쪽)
▶ 조인은 조홍을 이릉으로 보내서 지키게 하고 저는 남군을 지켜 주유를 방비하기로 했다.(청년사 3권-166쪽)
[원문] 조인자견조홍거수이릉·남군, 이방주유.(曹仁自遣曹洪据守·#54657;陵·南郡, 以防周瑜.)”(50회)
[문제점 해설] 원문에 준하면 “조홍을 파견하여 이릉·남군을 지키며 주유를 방비토록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옌볜대 팀은 원문을 무시하고 자의대로 번역했고, 황본은 옌볜대 역문과 완전히 같다.
#3부 : 같은 시기 출간된 남·북한 광주 기록
황 작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논란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2009년 5월19일자에서 이렇게 썼다.
“황석영은 그동안 1980년 5월 광주항쟁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라는 책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이 책을 쓴 작가가 황석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글은 광주시민 전체가 저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기자이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소속인 이재의 기자가 쓰고 상황지도는 조양훈이 그렸다는 구체적 반박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그 책이 황석영 기록이라고 되어 있지만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황석영은 이에 대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왜 ‘황석영 기록’이란 이름을 넣어야 했는지, 그 책의 인세를 왜 자신이 가져갔는지, 왜 이 책의 지은이라고 약력에 버젓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는지.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황석영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와는 결이 다른 지만원(68)씨도 8월 출간한 ‘솔로몬 앞에선 5·18’이라는 책에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북한 작가가 서술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광주의 분노’에서 사실 관계가 비슷한 대목 여럿을 제시하면서 황 작가 저작과 관련해 의혹을 제기했다.
로동당출판사가 출간한 ‘광주의 분노’
‘신동아’는 ‘오마이뉴스’와 지씨가 제기한 의혹을 검증하고자 5·18을 다룬 ‘광주 5월 민중 항쟁 일지’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10일간의 취재수첩’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등의 단행본, ‘동아일보’를 비롯한 5·18 시기의 신문기사, ‘신동아’ 1985년 10월호, ‘월간조선’ 1985년 7월호를 검토했다. 또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광주의 분노’를 확보해 황 작가 저작과 비교·분석했다.
조선로동당출판사가 출간한 ‘광주의 분노’는 평양종합인쇄공장에서 1985년 5월16일 인쇄했다.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은 1982년 4월10일 발행했다. 지씨가 황 작가 책과 북한 책이 닮았다면서 강조한 대목 중 하나를 보자.
“짙은 가스 연기 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뻐스 1대(광전교통 소속 전남 5에이 3706호)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 섰을 때 ‘계엄군’ 100여명이 들이닥치자 차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맞서 싸웠다.”(‘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76쪽)
“잠시 후 연기가 조금 걷히면 기침을 터뜨리면서 몇 만 명의 덩어리가 되었다. 투석이 날아가는 중에 버스(광전교통 전남 5아 3706)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위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군 저지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85쪽)
이 대목은 ‘동아일보’ 1980년 5월28일자가 다룬 내용이다. ‘광전교통 전남 5아 3706’이란 버스는 ‘월간조선’ 1985년 7월호 기사에도 나온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지씨가 북한 책 두 권과 황 작가 책이 닮았다고 지적한 대목들은 대부분 알려진 같은 사실 관계를 적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광주의 분노’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서 표현상 디테일이 닮은 부분이 상당히 나타난다.‘신동아’는 북한 책 두 권과 황 작가 책을 겹쳐 읽었는데, 그중 몇 대목을 소개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이 민주회복을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그들은 며칠 굶겨 놓은 맹수가 고깃덩어리를 발견한 것처럼 시위 군중을 덮쳤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7쪽)
“전두환 놈은 그놈들을 이틀 동안 굶긴 후 환각제를 탄 술을 먹여 마취시켰다. 원래 살인기술만을 익혀온 데다 환각제까지 먹은 ‘공정대’ 놈들은 야수의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냈다.”(‘광주의 분노’ 18쪽)
“시민군에 의하여 포로가 된 몇 명의 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출동하기 전에 독한 술에다 환각제를 타서 마신 상태였으며, 수통에는 빼갈을 담고 있었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0쪽)
“총, 총이 있어야 한다!”(‘광주의 분노’ 32쪽)
“저 놈들이 발포를 했다. 총, 총이 있어야 한다.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01쪽)
“쏠 테면 쏴라, 찌를 테면 찔러라. 이 악귀 같은 놈들.”(‘광주의 분노’ 23쪽)
“저 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7쪽)
“하기에 모두가 펼쳤던 우산도 머리에 썼던 보자기도 다 걷어 넣었다. 그리고는 대줄기같이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영령들을 숭엄하게 추모하였다.” (‘광주의 분노’ 95쪽)
“잠시 혼란스럽던 군중들은 모두 우산을 접고 다시 숙연한 분위기로 모여들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대회가 계속 진행되었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74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은 1985년 5월15일 발행됐다. ‘광주의 분노’가 1985년 5월16일 인쇄됐으니 우연히도 두 책은 ‘같은 때’ 세상에 나왔다. ‘광주의 분노’는 3년 전 출간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북한 책 두 권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같은 1차 자료’를 참고한 것일 수 있다. 황 작가가 갖고 있던 1차 자료의 사본(寫本) 혹은 이본(異本)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갔을 수도 있어 보인다. 북한도 외신보도·방송화면을 확보했을 것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실제 집필자가 황 작가가 아니라거나, 황 작가가 윤문만 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나돌았다. 공동 저작을 황 작가 이름으로 출판했다는 것이다. 황 작가는 그간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황 작가는 ‘신동아’에 보내온 답변서에서 “당시에 광주에 거주하고 있던 나로서는 유명 작가로서 광주시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를 돕는 젊은이들과 함께 1984년 말부터 1985년 봄에 이르기까지 기록을 정리했다. 나는 애초부터 이 책이 내 고유의 창작물도 아니고 광주에 거주하며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서 책무를 느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출간된 것인 만큼 단 한 푼의 인세를 받은 적도 없고, 저작권에 대한 권리조차도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측에 양도했다”고 밝혔다.
어둠의 자식들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되는 황 작가의 저작은 ‘강남몽’뿐 아니다. ‘네이버’ 검색창에서 ‘어둠의 자식들’을 찾아보면 ‘어둠의 자식들. 황석영 저. 현암사. 1980.07.01’이라는 책이 맨 위에 뜬다. ‘네이버’처럼 1980년대 초 베스트셀러이던 ‘어둠의 자식들’을 황 작가가 썼다고 아는 이가 적지 않다. 밑바닥 인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책 저자는 이철용 전 국회의원. 이 전 의원이 쓴 초고를 황 작가가 윤문했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2010년 9월4일자 참조)
“빈민운동을 하다 수배돼서 부산에 숨어 있을 때, 어느 모임에서 황석영씨를 만났다. 그가 쓴 책을 읽어봤다. ‘객지’라고.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 읽은 소설이었다. 막노동이라면 나도 좀 해봤는데, 이런 게 소설이라면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해남으로 은신처를 옮겨, 거기서 대학 노트 1000장 분량으로 편지 식으로 써내려갔다. 얼마 후, 이해찬(전 총리)씨가 당시 운영하던 돌베개 출판사 편집장이 보더니 당장 책을 내자고 하더라. 황석영씨에게 손을 봐달라고 부탁해 놨다. 나는 계속 떠도느라 몰랐는데, 김영동(국악연주가)이 그게 황석영의 책으로 나왔다고 하더라. 얼마 후 만나서 정정했다.”
‘오마이뉴스’도 이 부분을 지적한 바 있다.(2009년 5월19일자 ‘오마이뉴스’ 참조)
“1980년 초반 한국 독서계에 쓰나미를 일으키며 베스트셀러 1위로 떠오른 ‘어둠의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자식들’ 초판본은 지은이가 황석영으로 되어 있다. 다들 황석영 작가가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체험하여 그 책을 쓴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지은이는 이동철(본명 이철용)이다. 전 국회의원 이철용은 “그때에는 수배 중이었으니까 내 이름으로 책을 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필명으로 책을 내려고 출판사에 원고를 맡겼는데 이 책의 감수를 맡은 황석영이가 자기 이름을 내걸고 책을 펴냈다”고 말했다.(이후 ‘어둠의 자식들’은 원래 작가 이철용의 이름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이 전 의원은 11월1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당연히 내 이름으로 나가는 줄 알았는데, 황석영 이름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사정을 그로부터 전해 들었으나 “당시 일이 더 이상 거론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서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하고 발언해 글로 옮기지는 않는다.
▼ 황석영 작가가 ‘강남몽’과 관련해 ‘신동아’에 보내온 의견
우선 경위야 어찌됐든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적 대립국면으로 치닫게 된 데 대해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귀하의 요청대로 ‘강남몽’에 관련한 신동아 측의 문제제기에 즉각 답변하지 못했던 까닭과 입장표명을 하기까지의 정황에 대해서 밝히겠습니다.
송홍근 기자가 처음 관련기사를 내보내기 전에 내게 메일을 보내온 것은 10월13일자였는데 15일 오전 중으로 입장표명을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가 메일을 확인한 시점은 16일 밤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은 그전에도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다고 했지만 기자가 밝혔듯이 전혀 연락이 닿지 않은 상황이어서 뒤늦게 확인한 메일은 일방적 통보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새 작품을 집필하느라 중국에 체류 중이었고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있었지요. 기자가 내 입장을 확인하여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창비나 문학동네를 통해서라도 근황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에게 송 기자의 메일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는 부득이한 일로 일시 귀국한 상태였는데 출판사에도 전혀 입국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내가 외국에 체류하느라 답이 늦어졌다고 한 것은 여러 정황상 문제 제기의 본질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구태여 답변하자면 다음 작품을 마칠 때까지 어떠한 외부적 방해요소들로부터도 자유롭기 위해 그 입장을 견지했던 것일 뿐입니다.
어쨌든 신동아에 내 의견이 반영되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으므로, 먼저 기사를 다 작성해 놓고 형식적 절차를 거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틀 후 신동아가 출간되었고, 동시에 동아일보에 일방적인 표절로 몰아가는 논조의 사설이 실렸지요. 신동아에서만 기사가 다뤄진 상태였다면 내 입장을 동아가 아닌 타 신문사로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귀지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 경향신문을 통해 답변했던 것이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나는 소설 ‘강남몽’이 한국 자본주의 현대사에 관한 것이며 일종의 다큐 소설이라고 여러 번 밝혀왔습니다. 오래전부터 구상해 왔던 대하소설적 일감이 어떻게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축소되었는지도 밝혔는데, 그것이 전형적 캐릭터와 간추린 정치 사회적 사실과의 병존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의 역사물이나 시대물은 대개 역사적 기록이나 신문 잡지의 기사나 사실 자료를 취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인터뷰와 대담을 통하여 구상 단계에서부터 현대사에 관한 서적과 신문 잡지의 기사와 인터넷 자료 등등을 참조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건이나 인물은 실명 그대로, 아직 진행 중인 경우에는 가명으로 처리되었지요. 즉 이 소설은 사실과 그에 합당한 추측 또는 예상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밝히자면 ‘강남몽’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수집한 여러 참고 자료들 중에는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로 출간된 귀지 조성식 기자의 취재 기사 ‘김태촌· 조양은 40년 흥망사’ (신동아 2007년 6월호) ‘시라소니 이후 ~ 주먹과 정치’ (신동아 2008년 9월호)’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조폭의 계보’ 와 다수의 자료들이 있었습니다. 김·조 양씨는 7, 80년대에서 근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들의 행적은 자료에서뿐만 아니라 주위의 측근으로부터도 여러 번 들어왔던 것들이며 특히 조씨의 행적은 스스로 만든 자전적인 영화까지 나와 있습니다. 나는 이 시기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과 폭력의 시대였으므로 ‘강남몽’의 인물 구성상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료들을 검토했을 때에 조성식 기자의 기사들이 취재한 장본인들의 육성 위주로 기록되었으며 검증된 것이라 좋은 자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조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 나오는 장본인들의 구술은 현직 기자의 취재물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존중했습니다. 나는 인물을 지나친 허구로 왜곡하는 것보다는 팩트를 그대로 인용하되 다른 장에서 시도한 것처럼 적절한 장면에 조명을 주면서 각기 놓인 상황에 따라 인간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그 이면까지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번에 밝힌 참고자료는 문제의 초점을 흐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관행을 새로 정하자는 취지입니다. 외국에서는 시대물이나 역사적 사실에 의존한 작품의 경우에는 출판사 자료 팀이 철저하게 취재 조사해 주거나 작가에게 보조작가를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일찍이 소설에서도 인용 또는 참고한 서적이나 자료의 표를 책의 말미에 첨부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번 일로 우리 출판계에서도 이러한 관행이 바람직하게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조성식 기자의 취재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기사 내용들이 상상력이 동원된 창작물이었거나, ‘강남몽’이 다큐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면 문제가 될 여지가 있겠지만 조 기자의 기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취재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수의 자료들을 비롯하여 조 기자의 취재물을 참조 인용했다 하더라도 작가적 관점에 따라 어떻게 취사선택되며 완성도를 높이느냐는 그야말로 작가의 능력여하에 달린 것이므로 이 부분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며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주장은 작가의 고유영역까지 침해하는 어불성설입니다.
다만 이미 인정했듯이 그러한 사실들을 애써 취재한 기자의 노고를 헤아려 출처를 밝히는 데 소홀했던 것은 작가로서 불찰이었으나 이것을 표절로 몰고 가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2부 : 번역 오류·의역·누락 닮은 삼국지 논란
황석영씨가 번역한 ‘삼국지’
이 의혹은 황석영 삼국지가 먼저 출간된 옌볜인민출판사판 한글 ‘삼국연의’와 몇 가지 차원에서 유사하다는 데서 비롯됐다. 한글판 삼국연의는 옌볜인민대의 중문학부 교수 5명이 5년에 걸쳐 베이징 인민문학출판사본을 번역한 것으로 1990년 저작권 계약 없이 ‘정본 삼국지’(청년사 간)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다. 2004년 국민일보 지면을 통해 이 의혹을 처음 제기한 삼국지 전문가 정원기씨는 △두 작품의 저본(底本)이 같고 △옌볜본이 황석영본보다 먼저 나왔으며 △단락 구분이 유사한 데다 △43∼50회 이야기 중 동일 오류가 21곳이나 발견된 점 등의 차원에서 ‘베끼기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황 작가는 당시 정씨가 제기한 옌볜본과의 동일 오류에 대해 “납득할 만한 것은 3군데 정도뿐”이라고 반박하며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자 정씨가 이 동일 오류 및 오역 등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제의했고, 황 작가도 “형편이 닿는 한 이 토론에 참가하겠다”고 밝혀 새로운 토론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다. 황 작가는 이런 지적에 대해 “번역에 대하여는 당시에 지면을 통해 충분히 의견 개진이 되었다고 생각하므로 더 이상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오류 지적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확인하여 바로잡았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 이후에도 황석영 삼국지는 모 신문에 의해 ‘최고의 고전 번역서’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고, 2003년 7월 초판 발행 이후 올해 10월까지 약 150만부 정도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처럼 출판사와 번역자에게 이익을 안겨준 이 작품은 다른 한 출판사에는 엉뚱한 ‘재앙’이 되고 말았다.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현암사 옌볜본 삼국지 계약금 날려
현암사는 2003년 담당자를 직접 중국으로 보내 옌볜인민출판사로부터 한글판 ‘삼국연의’ 출판권을 샀고, 출간작업에 들어갔다. 2004년 초 현암사 형난옥 전 대표는 ‘신동아’의 한 기자에게 “1990년대 초부터 국내에서 ‘삼국지’ 번역자를 찾았으나 초역에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어 비교적 성실하고 정확하게 번역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 옌볜인민출판사본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또 옌볜본이 저본으로 삼은 베이징 인민문학출판사본과 일일이 원문 대조를 하고, 옌볜식 우리말의 어색한 번역을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황석영 삼국지와 삼국연의의 유사성에 대한 제보를 받고 대조작업에 들어간 현암사 측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현암사의 내부 사정에 밝은 A씨는 “당시 황석영 삼국지와 옌볜인민출판사본이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 수 있나’라는 얘기가 사내에서 돌았다”라고 말했다. 현암사 측은 고민을 거듭했지만 베끼기 의혹에 대해서 번역작품의 특성상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황석영 삼국지와 체재나 내용 등에서 비슷한 옌볜본을 출간해봐야 시장성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암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B씨는 “삼국지 출판 시장에 미련이 많았던 현암사가 황석영 삼국지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하다 결국 옌볜본 출간을 포기하고 2008년 정원기씨 번역으로 ‘정역 삼국지’를 펴냈다”고 말했다. ‘정역 삼국지’는 대부분의 국내 삼국지가 저본으로 삼은 기존 모종강본(本)의 오류 1000여 군데를 바로잡은 심백준 교리본(本)을 저본으로 삼았다.
당시 ‘삼국연의’를 현암사에 수출한 옌볜인민출판사도 두 작품의 유사성을 알고 검토까지 했다고 한다. 이 출판사 해외 저작권 담당자인 J씨는 “현암사로부터 ‘황석영 삼국지가 우리 출판사에서 펴낸 삼국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제보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창비사와 판권계약을 한 적이 없다. 당시 소송까지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름 있는 작가를 이긴다는 것은 계란으로 돌을 까는 일이어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황 작가는 현암사와 옌볜인민출판사 간의 계약 등의 문제에 대해 아느냐는 질문에 “왕훙시의 삽화 계약에 대한 출판사 간의 혼선이 있었을 뿐 텍스트에 대한 논쟁은 전혀 아는 바 없다”고 말했다. 삽화 계약문제란 중국 상하이 사서출판사의 ‘삼국지연의’ 그림 판권을 두고 현암사와 창비가 벌인 저작권 다툼을 말한다.
번역작품 표절 … 오역·의역·누락 부분 비교로 파악
사실, 같은 작품을 두고 서로 다른 사람이 번역했을 경우 그 결과물은 똑같을 수도 있고,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따라서 번역 작품을 어느 정도 베꼈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번역작품도 2차 저작물로서 분명히 저작권의 대상이 되고, 이를 가리는 기준도 이미 명확하게 정립돼 있다.
저작권 전문가인 세명대 미디어창작학과 김기태 교수에 따르면 번역작품의 표절 여부는 크게 △창의적 번역 부분이 두 작품에서 유사한가 △원본에 있지만 두 번역문에서 같이 빠지거나 첨가된 부분이 있는가 △같은 오역 부분이 있는가 등을 기준으로 따진다. 이를 통해 표절의 개연성을 가릴 수 있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소송이 진행될 때 판사가 혐의자를 불러 기습적으로 특정 대목을 번역토록 요구해서 표절 여부를 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옌볜인민출판사 ‘삼국연의’(청년사판 기준)에서 의역 처리된 부분이 황석영 삼국지에도 똑같이 나타나는 한 대목을 비교해보자.
‘그러나 낙양을 나서서 어가가 활 한 마장 거리도 못 왔을 때다. 문득 자욱하게 일어나는 티끌이 해를 가리고….’(청년사 1권 242쪽)
‘그렇게 낙양을 떠나 한마장이나 갔을까. 문득 자욱이 먼지가 일어 태양을 가리더니….’(황석영 삼국지 2권 38쪽)
[원문] 출료낙양, 행무일전지지, 단견진두폐일(出了洛陽, 行無一箭之地, 但見塵頭蔽日…)
원문에 보면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 즉 짧은 거리’의 뜻으로 쓰이는 ‘일전(一箭)’이 두 책에서 모두 ‘오리나 십리 이내’를 뜻하는 우리말 ‘마장’으로 표현됐다. 또 ‘자욱하게’라는 말을 뜻하는 한자는 원문에 없지만 두 책이 똑같이 이 단어를 쓰고 있다. 몇 줄 뒤에 보면 ‘지거전배계왈(至車前拜啓曰)’이라는 부분이 나오는 데 청년사본에서 ‘그는 수레 앞에 이르자 배복하고 아뢴다’라고 번역했는데 황석영 삼국지에선 ‘그가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말한다’고 번역했다. 원문에 ‘절하다’는 뜻의 ‘배(拜)’를 청년사본에서 ‘엎드려 절하다(拜伏)’는 뜻의 ‘배복’으로 표기했는데, 우연히도 황석영본에선 ‘배복’을 풀어쓴 듯 ‘땅바닥에 엎드리며’로 번역했다.
황석영씨의 ‘베끼기 의혹’의 수준을 더 잘 이해하려면 2004년 논쟁 당시 정원기씨가 제기한 ‘동일 오류 답습’ 21가지 사례를 들여다보는 게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당시 국민일보 지면에는 이 가운데 3가지만 언급됐고, 황 작가도 이에 대해서만 반박했다. 정씨는 ‘신동아’에 이를 다시 게재하는 것에 동의했다.(141쪽 상자 기사 참조)
정씨는 전체 120회 이야기 가운데 ‘적벽대전’ 부분인 43~50회를 검토했는데, 이 부분이 삼국지 줄거리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전쟁 부분에 가장 공을 들였다는 황 작가의 발언을 유념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시아대 교수를 역임한 정씨는 ‘삼국지사전’, 삼국지연의의 모태(母胎)라 할 수 있는 ‘삼국지평화’, 사설과 창으로 구성된 설창사화(說唱詞話) ‘화관색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시가를 발췌한 ‘삼국지 시가 감상’‘정역 삼국지’(현암사) 등을 번역한 삼국지 전문가다. 정씨는 또 회원 1만8000명의 ‘정원기 삼국지연구소’(www.samgookji.com)를 운영하고 있다.
“두 작품 치밀하게 대조해봐야”
영화 ‘적벽대전’중 한 장면.
정씨는 또 황석영 삼국지의 저본 문제가 모호해 판본에 대한 믿음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황 작가가 쓴 ‘옮긴이의 말’에서는 대만 삼민서국(三民書局) 출판본의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은 상해 강소고적(江蘇古籍)출판사의 번체자(繁體字) ‘수상삼국연의(?像三國演義)’(1999년판)를 저본으로 했으며, 후에 우석대 전홍철 교수가 인민문학(人民文學)출판사본을 대조해가며 교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강소고적출판사는 ‘상해’가 아닌 ‘남경’에 있다는 점, 중국 대륙에서 ‘번체자’ 삼국연의를 낸 곳은 ‘상해고적출판사’라는 점, 그리고 대만 삼민서국의 오류를 대륙 강소고적에서(즉 배인본(排印本)에서 배인본의 오류를) 바로잡을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 등도 의심을 낳게 하는 부분이라는 것.
이런 지적에 대해 황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긴 답변을 해왔다.
“후기에 밝혔듯이 나의 초기 번역은 대만의 삼민서국판과 일제 초기 영창서관에서 간행한 ‘언토삼국지’(※옮긴이의 글에는 현토삼국지라고 적혀있음)를 참고했으나, 출옥한 뒤에 다시 시작하면서 강소고적 출판사에서 나온 번체자 수상삼국연의(1999년)를 저본으로 삼았다. 물론 간체본과의 대조는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간 뒤에 전문가들이 했으며 초판 1쇄의 상해 강소고적출판사라는 부분은 출판 과정에서의 오기로, 이후 바로잡았다. 중국 대륙의 상해고적출판사에서 번체자 삼국연의를 냈는지는 모르겠고, 배인본 운운 부분도 전문학자들이나 아는 얘기이며 판본과 관련해서는 가장 정확한 것이라 하여 남경 강소고적판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만 삼민서국의 오류를 대륙 강소고적에서(즉 배인본에서 배인본의 오류를) 바로잡을 이유가 분명치 않다”는 지적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배인본’은 ‘필사본이 아닌 목판과 활자인쇄본에 대한 통칭’으로 배인본의 뜻을 정확히 알고 하는 질문인지 묻고 싶다.
덧붙이자면 대만 삼민서국판은 강소고적판보다 앞선 것으로 강소고적판이 삼민서국판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무엇이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또한 판본 문제는 대만판 중국판 번체본 간체본, 그것은 연변 한글판본 등등 복잡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은 학자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다고 한다.
문제제기 당사자의 실체도 알수 없거니와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중에 나온 판본으로 이전 판본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당연하고 편집 과정에서 구할 수 있는 많은 한글판본도 비교 참조했는데 그것은 새 번역본의 유리한 점이자 번역자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정씨가 지적한 문제의 요지는 △중국 대륙에서 간체자로 된 책을 번체자로 바꾸면 시장성도 없고 연구가치도 없는데다 유명한 강소고적출판사가 다른 출판사의 책을 뒤집어 펴낸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 △그것도 대만에서 나온 책을 대륙에서 바로잡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저본 문제는 황 작가도 언급했듯이 수많은 책이 나와 있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오류가 없었어야 오해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정씨와 다른 의견도 있다. 재중동포 리동혁씨는 황 작가가 옌볜인민출판사의 삼국연의에만 의존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광복 전에 나온 한글 삼국지들에도 의존한 듯하다”는 견해를 폈다. 2003년 ‘신동아’에 ‘삼국지 팬 울린 한글판 삼국지’를 기고했던 리씨는 최근 기자에게 보낸 e메일에서 “(황석영 삼국지와 옌볜인민출판사 판) 두 역본이 원본의 120회 구조를 그대로 따랐던 만큼 역문들의 일정한 유사성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기존 역본에서 틀리기 쉬운 부분들이 황본에서도 되풀이된 것은 사실이다”라고 언급했다.
리씨는 또 “이런 (베끼기) 소문을 잠재우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감옥에서 (황씨가) 옮겼다는 초고를 일부라도 내놓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엉성하더라도 초고에는 옮긴이의 성과 심혈과 고민이 역력하다”며 황 작가의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했다. 초고가 공개되면 황 작가가 어떤 사고 과정과 수개(修改) 과정을 거쳐 문장을 만들어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황 작가는 “‘삼국지’는 내가 투옥되어 있었을 때의 행형법상 작가에게 집필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글 쓰는 기능을 상실당하지 않기 위하여 번역이라도 하려던 의지의 결과물이다. 당시에 법무부 당국에 냈던 청원과 그 결과로 교도소 당국이 했던 조치가 있으니 법적 근거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국내 출판계는 이미 여러 차례 대리번역, 이중번역, 표절 등의 사건을 치르면서 비도덕적 상업주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따라서 황석영 삼국지에 대한 의혹도 우리가 털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다. 의혹은 어떤 형태로든 풀리겠지만, 한 중국 동포 출판인의 지적은 한국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그는 “한국에선 (자질과 무관하게) 명성 높은 작가를 번역자로 하면 책이 잘 팔린다고 생각하니 (무리하게) 이름 있는 작가를 옮긴이로 이용하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 황석영 삼국지와 옌볜 삼국지에서 보이는 ‘동일 오류’
다음은 정씨가 지적한 ‘오류 또는 특정 부분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경우’들이다.(황본은 황석영 삼국지)
1~ ▶ “대략 알아왔으니, 천천히 말씀 올리지요.”(황본 4권-144쪽)
▶ “대강 알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차차 말씀올리지요.”(청년사 3권-41쪽)
[원문] “이지기략, 상용서품(已知其略, 尙容徐稟)”(43회)
[문제점 해설] 포인트는 “기략(其略)”이란 단어. 명사로, “그 계략” 또는 “중점 요약”의 뜻이다. 따라서 앞 단락의 목적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그 계략을 알아서 돌아왔으니, 조금 뒤 천천히 말씀 올리도록 해주십시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두 번역본이 똑같이 부사로(대략, 대강) 처리하고 있어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2~ 두어 명으로 표현한 경우
▶ “수레 한 대에 말 한 필, 종자 두어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황본 4권-146쪽)
▶ “수레는 불과 한 채, 말은 불과 한 필, 또 종자는 겨우 두어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청년사 3권-43쪽)
[원문] “……, 종불과수인,……(……, 從不過數人, ……)”(43회)
4,5명으로 표현한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황개는 군사 4,5명만 거느리고 작은 배로 뛰어내려, …….(황본 5권-28쪽)
▶황개는 작은 배로 뛰어내려 배후의 4,5명으로 배를 젓게 하고…….(청년사 3권-153쪽)
[원문] 황개도재소선상, 배후수인가주(黃蓋跳在小船上, 背後數人駕舟,…….) (제49회)
서로 다르게 표현했지만, 역시 이상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이튿날 채중과 채화는 군사 5백여명을 두어 척의 배에 나누어 태우고,…….(황본 4권-227쪽)
▶이튿날로 군사 5백 명을 거느려 4,5척 배에 나누어 타고,…….(청년사 3권-106쪽)
[원문] 차일, 이인대오백군사, 가선수척,……(次日, 二人帶五百軍士, 駕船數隻,…….)(제46회)
[문제점 해설] “수인(數人)” 또는 “수척(數隻)”의 “數”를 “두엇” 또는 “4,5”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군사 500명을 두어 척의 배에 태운다는 건 해당 스토리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 문제제기에 대해 황석영씨는 국민일보에 게재한 반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삼국지’에서 數는 數人, 數騎, 數里 등 그야말로 수없이 쓰이는 글자로, 10 이하의 소수를 나타낸다. 즉 몇, 두어, 서너, 너댓, 대여섯 등으로 옮길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이를 우연히도 옌볜본과 유사하게 옮긴 곳은 10권 통틀어 그야말로 몇 군데 되지 않을 것이다. 정 교수가 검토했다는 4권만 보아도 13,113,118면 등에서 나는 같은 글자를 각기 ‘여러’ ‘4,5’ ‘두엇’으로 옮겼는데, 무슨 의도에서 굳이 그 한 군데를 들어 옌볜본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3~ ▶ “그는 여남 사람 정덕추(程德樞)다.”(황본 4권-155쪽)
▶ “그는 곧 여남 출신 정덕추(程德樞)다.”(청년사 3권-49쪽)
[원문] “공명시기인, 내여양정덕추야(孔明視其人, 乃汝陽程德樞也).”(43회)
[문제점 해설] 기존의 일반 삼국지에는 “여남(汝南)”으로 되어 있으나 인민문학출판사본에서 그 오류를 “여양(汝陽)”으로 수정한 경우. 이 또한 옌볜대 번역팀의 실수 부분을 답습한 혐의가 짙다.
4~ ▶ “지난날 겨우 여포, 원소, 원술, 유표 등이 감히 대적했는데, …….”(황본 4권-171쪽)
▶ “전에 다만 여포, 원소, 원술, 유표 등이 그와 다투다가…….”(청년사 3권-62쪽)
[원문] “향지유 여포, 원소, 원술, 유표감여대적(向只有呂布, 袁紹, 袁述, 劉表敢與對敵).”(44회)
[문제점 해설] 두 역문은 말만 조금 바꾸었을 뿐 의미는 동일하다. 원문에 준한다면, “지난날 감히 더불어 대적할 만한 인물로는 여포, 원소, 원술, 유표 등이 있었을 뿐이다”는 뜻이다. 위의 두 번역과는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유표와 원술 등은 조조에게 “대적할 만한” 인물이었을 뿐, 대등한 실력으로 다툰 상대는 아니다.
5~ ▶ “넷째는 중원의 군사들을 몰고 멀리 강호를 건너오느라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병에 걸리는 군사가 많습니다.”(황본 4권-179쪽)
▶ “중원 땅의 군사들을 몰고서 멀리 강호(江湖)를 건너왔기에 수토불복(水土不服)으로 병들이 많이 날 것이니 이것이 넷째로 꺼리는 바입니다.”(청년사 3권-70쪽)
[원문] “구중국사졸, 원섭강호, 불복수토, 다생질병, 사기야(驅中國士卒, 遠涉江湖, 不服水土, 多生疾病, 四忌也).”(44회)
[문제점 해설] “강호(江湖)”를 풀어쓰지 않으면 “세상” “사방각지”의 의미가 되지만, 여기서는 “강과 호수”, 즉 “먼 길(여정)”로 쓰인 경우이다.
6~ ▶ “이 주유에게 정병 수천만 내주시면, 하구에 주둔하여 주공을 위해 적병을 물리치겠습니다.”(황본 4권-179쪽)
▶ “유에게 정병 수천 명만 내어주시면 곧 나가서 하구에 둔치고 장군을 위해서 적을 깨치겠습니다.”(청년사 3권-70쪽)
[원문] “유청득정병수만인, 진둔하구, 위장군파지!(瑜請得精兵數萬人, 進屯夏口, 爲將軍破之!)”(44회)
[문제점 해설] 원문에 있는 “수만인(數萬人)”을 청년사본과 똑같이 “수천 명”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에 대해 황 작가는 국민일보 기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것이 실수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옌볜본의 실수를 ‘고스란히 답습’했다는 것은 무리한 지적이다. 번역과정에서 나는 국내 판본의 번역상태와 함께 그간 국내 번역본의 저본이 되어온 대만 삼민서국판도 검토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거기서 찾을 수 있는 실수를 두고 오류를 고스란히 답습했다니 침소봉대도 이런 경우가 있겠는가.”
7~ ▶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황본 4권-181쪽)
▶ “선생의 말씀이 심히 옳습니다.”(청년사 3권-71쪽)
[원문] “선생지론심선(先生之論甚善.)”(44회)
[문제점 해설] “선(善)”은 통상 “옳다(是), 그르다(不是)”보다는 “좋다, 훌륭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해당 상황 역시 흑백을 가리기보다는 청자가 화자의 능력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훌륭한 견해를 제시한 장면이다. 대화 중 “선(善)”이 여러 번 나오는데, 뒤쪽으로 나가면 “좋다, 훌륭하다”로 정정된다.
8~ ▶ “……, 여범과 주치를 사방순경사로 삼아서, 6대의 군사가 수륙으로 일제히 진군하여 정한 기일에 모이도록 했다.”(황본 4권-183쪽)
▶ “……, 여범과 주치로 사방순경사를 삼고, 여섯 군의 모든 군사를 재촉해서 수륙병진하여 정한 기일에 일제히 다 모이게 하였다.”(청년사 3권-73쪽)
[원문] “……, 여범·주치위사방순경사, 최독육군관군, 수륙병진, 극기취제.(……, 呂范·朱治爲四方巡警使, 催督六郡官軍, 水陸竝進, 克期取齊.)”(44회)
[문제점 해설] 두 가지 오류를 동시에 범하고 있다. (1) 6군의 관군을 재촉하고 감독하여 모이게 하는 주체는 여범과 주치이고, 두 장수에게 이런 임무를 부여한 주체는 주유이다. 이를 문법용어로 “겸어구조”(사역동사문)라 한다. 그런데 두 장수를 사방순경사로 삼고 6군의 관군을 모이게 하는 주체를 문장 전체 주어인 주유로 오인한 것이 동일하다. (2) “육군관군(六郡官軍)”이란 동오 전역에 흩어져 있는 여섯 군의 지방관군들을 지칭하며, 여범과 주치에게 이들을 모아오도록 “사방순경사(四方巡警使)”의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두 책 모두 이를 제1대에서 제6대까지로 보고 오역했다.
9~ ▶ “이는 각자 주인을 위해 하는 일이니 사양하지 마시오.”(황본 4권-188쪽)
▶ “이는 피차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 선생은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청년사 3권-77쪽)
[원문] “피차각위주인지사, 행물퇴조.(彼此各爲主人之事, 幸勿推調.)”(45회)
[문제점 해설] “사양”이란 겸손한 양보의 의미로 쓰이지만, “퇴조(推調)”란 “병력이동의 책임을 미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주유가 제갈량을 함정으로 몰아넣으려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자명한 일이다.
10~ ▶ ……유현덕의 등 뒤에 칼을 짚고 선 장수를 발견하고 멈칫하며 물었다.
“저 장수는 누구요?”(황본 4권-194쪽)
▶ ……문득 운장이 칼을 안고 현덕의 등 뒤에 서있는 것을 보고 황망히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굽니까?”(청년사 3권-81쪽)
[원문 ] “맹견운장안검입어현덕배후, 망문하인.(猛見雲長按劍立於玄德背後, 忙問何人.)”(45회)
[문제점 해설] (1) 원문에는 “저 장수는 누구요?”라 묻는 대화체가 없다. 평서문 “忙問何人”을 대화체로 바꾼 경우이다. 두 역본이 약속이나 한 듯 동일하다. (2) “안검(按劍)”이란 칼을 어루만지거나 쥐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안고 있다”거나 “짚고 있다”는 표현은 둘 다 옳지 않다. 여차하면 하시라도 뺄 듯한 자세로 “쥐고 있는” 게 해당 장면의 상황이다. (3) 의미만 통할 뿐 성실한 번역과는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