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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16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 정일준 아주대교수·사회학 ijchung@ajou.ac.kr

이승만 장기집권의 뼈대, 한미동맹과 북진통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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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무력 북진통일을 호소했다. 이승만은 양 진영 간의 제3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나의 견해 차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지금 하느냐, 아니면 앞으로 미루느냐 하는 점에 국한되고 있다”고 했다. 7월28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이승만은 극동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격전을 전개하자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해군력과 공군력만 지원한다면 아시아 지역의 군대만으로 북한을 회복하고, 나아가 중국 본토를 회복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 정치인과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승만의 이미지는 ‘반공투사’에서 ‘전쟁광(狂)’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휴전이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정세가 양 진영 사이의 평화공존이 정착되는 방향으로 흐르자 북진통일론은 안팎에서 도전받게 된다.

“가장 시급한 요구는 휴전 백지화”

북진통일론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 내부에서 야당과 지식인에 의해 도전받기 시작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민주당도 같은 시기 화전양양론(和戰兩樣論)을 주장함으로써 휴전기에 구축된 북진통일론 일색의 통일 논의는 시험에 들게 되었다. 이승만은 1956년 말 헝가리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북진통일론을 강조했다. 1957년 1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어떤 사전계획이나 특별한 조직도 없이 정말로 자발적으로 일어난 헝가리 봉기는 소련의 통제 아래 놓인 인민들이 얼마나 결사적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소련의 위성국가들은 해방을 얻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바랐지만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미국이 지켜 나가야 할 기준은 평화가 아니라 정의라는 점을 강조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는 바입니다. …현재 우리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조국통일입니다. 38선으로 분단된 이후 거의 12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국가목표를 성취하는 것을 막는 두려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제3차 세계대전입니다.



…쟁점은 자유세계가 추구해야 할 더 나은 길이 해방이냐, 또는 봉쇄냐 하는 점입니다. 내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봉쇄정책은 자유세계를 지키는 데 부적절합니다. 첫째, 봉쇄정책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해방에 반대하여 봉쇄를 지지하는 주장은 봉쇄선 그 자체로부터도 끊임없는 후퇴를 낳게 됩니다. …둘째, 봉쇄정책은 이미 공산주의자에 의해 노예가 된 세계인구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헝가리인은 노예가 된 인민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봉쇄정책의 실패는 날이 갈수록 점차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유감스럽게도 또 다른 세계대전이 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득세했습니다. 우리 처지에서는 이런 주장에 마지못해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맹국들과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방국들에게 공산주의 문제를 푸는 데 가능한 모든 평화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휴전에 반대했으며 우리 우방국들의 바람에 반하여 최소한 한 번 이상 북진하려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탄약과 기름 공급이 3, 4일분으로 줄어들거나 하루분으로 줄어드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조국의 분단 상황을 내버려두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소위 휴전을 백지화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시급한 요구사항입니다. (“Aide Memoire”, 24 January 1957. 이승만 대통령이 주한 미국대사 다울링을 통해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외교각서)


중국 봉쇄와 일본 중심 경제 통합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오히려 1957년 말부터 미국은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유로 감군(減軍)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1958년 신년사를 통해 단독 북진통일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엔군이 우리에게 허락해 우리 국군이 나가서 싸울 기회를 주고 자기들은 뒤에 앉아서 물자와 도의상 원조만 해주면 우리나라의 통일은 머지않아 성취된다는 것입니다.”(공보실, ‘대통령 리승만 박사 담화집’ 제3집, 1959, 55쪽).


1958년에는 북한 주둔 중공군이 전면 철수하였다. 이는 휴전체제가 사실상 안정기에 들어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휴전 무렵부터 중공군을 통일의 장애물로 규정하고, 중공군만 철수하면 당장이라도 북진해서 통일할 수 있을 것처럼 선전해왔다. 더욱이 같은 해에 미국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점차 껍데기만 남게 됐다.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 공약에서 통일정책 부분을 빼버렸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 이르러 집권 자유당에 의해 북진통일론이 자체 청산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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