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롯데호텔에서 열린 김강섭 팝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1970년대로 접어들 무렵. 미국의 젊은이들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장발에, 맨발에, 청바지, 미니스커트, 통기타. 히피들이 집단을 이루어 도시를 누비고, 전원을 찾고, 기존 체제에 반발했다. 월남전 반대와 마약. 그들이 내세운 모토는 화합, 양해, 호감, 그리고 믿음이었다. 감성적이고 반항적인 물병자리(Aquarius)의 물결은 높고 위태롭고 사납기까지 했다. 그 물결은 미국을 넘어 세계를 훑었고 그 여파가 서울에서도 뚜렷이 감지될 정도였다.
어쿠웨리어스 기의 특징은 “천재냐 광기냐”로 표현되기도 했다. 당시 세계 국가원수들의 모임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공통의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젊은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였다고 한다.
4·19 혁명을 뒤집고 집권한 5·16 주체에 대해 1970년대 젊은이들은 크게 반발했다. 대학에는 정보원과 군대가 배치됐고, 애국가와 최루탄이 한 공간에서 엇갈리며 뒤섞였다. 공연윤리위원회는 금지곡을 양산했고, TV 쇼에서조차 집단으로 흔들고 뛰는 동작을 자제해야 했다.
1970년 TBC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가 됐다. 그리 마음먹은 것은 ‘전문가’보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이 나의 앞날에 도움이 되리라는 나름의 예측 때문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섰을 때 내 나이는 37세. 이제 곧 40세가 될 터인데 그때 가 타의로 직장을 그만둬야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무리 방송국이 좋은 직장일지라도 계급이 올라갈수록 윗분들의 눈치를 더 봐야 할테고, 그래서 ‘내 생각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50세까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기초를 넓게 닦자.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게 어떤 일이라도 내게 맡겨지면 번듯하게 해치울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가 돼야 하지 않겠나. 내가 선택한 스페셜리스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젊음과 음악과 라이브 현장’에 파고들어가는 것이었다.
청담스님의 별난 청아성
프리랜서가 돼 KBS TV와 MBC TV에서 각각 5분쇼와 미니스테이지의 사회를 맡아 하던 때의 얘기다. 당시 나는 청개구리집(YWCA가 운영한 청년마당)의 수요일 담당이었는데 마침 방송일이라, YWCA의 한 여성간사에게 프로그램 앞 부분인 청담스님 소개를 부탁한 뒤 자리를 떴다. 허겁지겁 방송을 끝내고 돌아와보니 이게 웬일인가. 아수라장이었다. 오자미(팥주머니) 놀이를 하는 남녀, 엎드려 팔씨름하는 사람들, 응원하는 친구들…. 한쪽에선 어떤 녀석이 제법 신이 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반쯤 팔베개하고 누워 그 노래를 들어주는 쪽도 있고 벽에 기대 앉아 허공을 보는 친구도 있었다. 와글와글 바글바글.
초등학교 교단 높이의 마루에 걸터앉은 청담스님 바로 앞에는 네댓 명의 스님이 다가앉아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시종스님이 법장을 높게 세워든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옆에 자리한 여성간사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학생들이 듣는 척하다가 천천히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런 지경이 됐다 했다. 시종스님 역시 법장을 안고 조는지 알아보는 기척이 없었다.
청담스님 앞에 나도 바싹 다가앉아 귀를 기울였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물오물 억양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자음이나 모음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 속에서 삭히고 있었다. 경문일까 주문일까. 어두운 조명 탓인지 회색 법의 때문인지 내가 본 것은 청동상(靑銅像)이었다. 아수라장 속에 어떤 따스함이 느껴지는 부동의 조용한 청동상.
시종스님에게 다가가 흔들어 깨운 후 의향을 물었다.
“스님께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씀 드려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다시 청담스님에게 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고맙습니다. 긴 시간 같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내가 주춤하더니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스님께로 집중됐다.
“벌써 시간이 다 됐어?”
청개구리들에게 클로징 멘트를 했다.
“스님께서 이제 자리를 뜨십니다. 다들 일어나서 박수로 환송해주십시오.”
잠이 완전히 깬 시종스님이 벌떡 일어나 법장을 받들고 앞장섰고, 청담스님을 부축하듯 여성간사가 뒤따랐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세 분이 시야에서 벗어났다. 나의 잔소리가 없을 수 없었다.
“이 다음 여러분이 어른이 되어 청담스님처럼 요청을 받아 젊은이들 앞에 섰을 때,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막 열을 올리려는데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간사가 달리듯 돌아와 숨찬 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청담스님은 “오늘처럼 재미있고 즐거운 적이 일찍이 없었다”며 “젊은이들과 더 어울리다 가면 안 되겠느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을 시종스님이 겨우겨우 차로 모셨다고 했다. 마지막 떠나는 차 속에서도 “꼭 잊지 말고 또 불러야 해” 하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청개구리집. 1970년대 청년문화의 주역인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투코리안스, 라나에로스포, 방의경, 최안순 등을 배출한 젊은이의 안방. 누구도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체면 세우려 하지 않았으며 서로를 믿었기에 서로에게 관대할 수 있었던 명동 한복판의 청개구리집. 그 날 어쩌면 청담스님도 그 분위기가 좋아 속으로 스님 나름의 가락을 뽑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좌절된 ‘학원 십자군’
내가 프리랜서가 되었을 때 대학 동기이자 TBC의 상무였던 김규는 이미 회사를 떠나 퇴계로에 ‘선진문화’라는 광고기획사를 차리고 있었다. 동아제약 강신호 사장, 후라이보이 곽규석, 작곡가 길옥윤, 화가 박영일 씨 등이 주주였다. 방을 하나 그냥 내주면서 무엇이든 하라기에 통기타 1세대들, 그러니까 쎄시봉과 청개구리집 멤버들에게 알려 찾아오게 했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코코브라더스의 박상규 장영기, 투코리안스의 김도향 손창철, 김민기 임문일 방의경 등.
누가 먼저 얘기를 꺼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전국대학 순회공연을 기획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캠퍼스 크루세이더스(학원 십자군)’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보니 그럴듯했다. 스폰서도 구해야 하고 사회 저명인사의 격려글도 받아야 했다. 네 분을 미리 정해 찾아 나섰다. 누구보다 먼저 조계종 총무원장실로 청담스님을 찾았다. 한자로 여섯 자를 써주었다.
‘화랑혼(花郞魂) 풍류도(風流道)’
“왜 화랑도가 아니고 화랑혼이냐”고 물었다.
“꽃 지듯 젊은 목숨 아낌없이 바치는 것은 ‘도’가 아니고 ‘혼’이라야 맞지. 초개같이 생명 버릴 마음이 서 있고, 그리고 풍류를 아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은 풍류를 즐길 줄 알아. 절뚝발이 가난뱅이도 지게 지고 산으로 나무하러 갈 때 혼자서 흥얼흥얼 풍월을 읊으며 스스로 즐길 줄 알아. 즐기는 것은 ‘도’야. 젊은이들이 혼을 알고 도를 즐긴다면 그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겠나.”
TBC 때부터 얘기 손님으로 종종 모셨던 중앙중학 동창 오병열군의 아버님, 언론계의 대선배, 동서종교철학을 비교 연구하고 강의하던 석천 오종식 선생을 프레스센터로 찾아갔다. 이번에는 한자로 여덟 자였다.
‘師心 使氣(사심사기) 怡神 養性(이신 양성)’
“자기 마음이 곧 스승이야. 자기마음보다 좋은 스승은 이 세상에 없어. 기를 쓰라고 해. 우주의 기운은 아무리 써도 줄지 않아. 그 기가 다 제것인데 부러울 게 무엇이겠어. 신에게 몽땅 맡기고 의지해. ‘소원하는 모든 것 이루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미리 감사하는 거야. 행여 ‘이루어주시면 고맙겠나이다’ 같은 조건부 기도는 하지 마. 그런 기도 안 받아주셔. 자신이 곧 스승이고, 우주의 기운이 다 내 것이며, 하늘이 내편인데, 그럴 때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야겠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타의 성(性)을 가꾸고 키워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오선생의 설명이었다.
이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았다. 김추기경은 ‘맑은 마음 밝은 사회’라는 글을 한글로 써주었다. 음성이 곱고 밝았다. 그러면서도 쓴 것을 다시 읽을 때, 어딘지 모르게 찌르는 듯한 어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해군 군악대 시절 교관인 이교숙 선생과 이대 무용과 육완순 교수였다. 이교숙 선생은 나의 주선으로 ‘동키클럽’이라는 작곡 클래스를 열어, 신중현 씨를 비롯 여러 대중음악 작곡가들에게 현대 화성악과 작곡법을 지도한 사람이다. 그 제자 중 민들레악단 출신의 세 사람, 그러니까 김형찬 맹원식 이덕재가 3년 연속 문화공보부 장관이 주는 음악상을 탔다. 김도향과 최희준, 펄씨스터스의 언니로 광고음악을 하던 김복순씨도 한때 ‘동키클럽’ 멤버였다. 이교숙 선생은 ‘축발전(祝發展)’이라는 세 글자를 써주었다.
마지막으로 육완순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육교수는 이대 무용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무대에 올려 장안의 화제를 모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캠퍼스 크루세이더스 발족에 뺄 수 없는 것이 젊은이들의 신체적 동작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에서 그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교수는 “나 그런 것 관심 없어요”라고 똑부러지게 말했다. 대학교수가 젊은 ‘딴따라’와 어울리는 것은 당시로선 금기였다. 천재냐 광기냐. 장발에 어쩌면 마약에 젖어 있을 수도 있는 일부 젊은이들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글은 다 받았으니 다음에 할 일은 스폰서 구하기였다. ‘코카콜라’ 본사를 지목했다. 거기서는 광고대행업체에 알아보라 했다. 전용버스와 운전기사, 기본적 음향장비에 야간공연에 대비한 조명기구만 있으면 우리는 전국 대학을 누비며 대학 내 ‘스타’들과 함께, 식물적(植物的)이 아닌 생동하는 젊음의 축제를 열 심산이었다. 대행업체의 대답은 “내년에나 가서 보자”였다. 결국 야심 찬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1980년대 젊은 음악인들과 함께. 뒷줄 가운데가 ‘들국화’ 멤버였던 허성욱, 앞줄 왼쪽부터 강인원, 전인권, 나.
안쪽 벽면이 제법 컸는데 어떻게 꾸밀까 궁리하다가 평소 가까이 지내던 판화가 배융씨에게 의뢰했다. 배융씨는 검은 우주 그림에 붉은 태양을 두 개 그려 넣었다. 하나는 목성(주피터)이고 또 하나는 화성(마르스)인 셈이었다.
감상실 이름은 ‘르 시랑스(Le Silence)’로 정했다. 정숙(靜肅)의 의미다. 소리가 있기 전의 정숙, 소리가 있고 난 다음의 정숙. 어차피 소리는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가는 것.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정적(靜寂)을 듣는 것이었다.
르 시랑스의 음악은 그러나 조금은 시끄러운 록 사운드가 주류였다. 피프드 디멘션의 ‘Aquarius’, 엘튼 존의 ‘Crocodile Rock’, 아메리카의 ‘A horse with no name’, 스테판 울프의 ‘Born to be wild’. 부드러운 곡들도 있었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비틀스의 ‘Let it be’, 로버타 플랙의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외국음반 수입이 금지되던 때라 대부분의 음반이 해적판이었다. 하지만 듣는 데 지장은 없었다. 르 시랑스의 안식구는 다섯 사람. 막 군에서 제대한 실험극단의 구자흥(현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과 중부경찰서에서 형사로 25년 근무 후 정년퇴직한 이선생, 나, 그리고 디스크 룸을 맡겠다고 자원하고 나선 록음악 마니아 두 사람이 있었다.
‘백색 마녀’ 이연실
르 시랑스는 레코드 음악이 있고 라이브 노래가 있고 개그꾼들의 재치도 펼쳐지는 곳이었다. 새 목소리들이 나타났다. 이동원, 양병집, 이연실, 최성원(들국화), 이주원(‘내 님의 사랑은’), 윤석화, 채은옥, 어니언스(임창제 이수영), 김정호, 현경과 영애, 여고를 갓 졸업한 김인순…. 어떤 때는 그룹사운드까지 등장했다. 아직 무명 시절이던 조용필의 ‘킴스 트리오’, 서울대생으로 구성된 록그룹 ‘스푸키즈’ 등이 있었다.
개그맨들도 빼놓을 수 없다. 뽀빠이 이상용, 연대 응원단장에 엘비스 프레슬리 풍으로 노래도 하던 임성훈, 꽃만두 박성원(‘스푸키스’의 사회도 맡았다), 천의무봉에 좌충우돌하던 고영수, 허원, 송영길, ‘꿀딴지’ 멤버였던 최미나(허정무 감독 부인), 그리고 후에 ‘독도는 우리땅’을 발표한 ‘한심이 시리즈’의 정광태. 이 중 이연실은 현재 연락두절이고 김인순과 꽃만두 박성원은 세상을 떴다.
어느날 이연실이 흰 의상에 눈썹까지도 완전 백색인 채 입술만 진홍빛으로 화장하고 와서는 노래를 하겠다고 했다. 백색의 공포였다. 석고상이 노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라도 군산 출신, 홍익대 미대생. 그녀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
‘엄마에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 하얀 발목 아프게 내게 오시네 /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 산등성이 너머로 내려오시네 //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밤 /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나오면 / 마루 끝에 나와앉아 별만 셉니다’(‘찔레꽃’;이연실 작사, 박태준 작곡)
그것은 듣는 사람의 원초감각을 되살려내는 소리였다. 아니 그 소리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소리였다.
이연실은 사람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함부로 다가서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성정(性情)은 수줍음을 타면서도 직선적이었다. ‘새색시 시집가네’ ‘조용한 여자’ ‘타박네’ ‘소낙비’ ‘목로주점’ 등이 그녀가 부른 노래다.
박성원은 자살을 했다. 죽은 후 내 꿈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놀라셨죠. 장난삼아 해본 건데 그렇게 됐어요.” 그는 ‘스푸키즈’의 리더였던 김영민의 꿈에 와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한다. 그의 유골은 미아리 언덕빼기 어느 절에 봉안되었다.
박성원의 죽음. 그 일단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는 거의 매일 르 시랑스에 왔다. 자칭 ‘꽃만두’, 우량아를 넘는 체중이었다. 르 시랑스에선 거의 매일 라이브 코너가 있었고 그가 짬짬이 나와서 한마디 거들면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어느날 박성원이 자기만의 코너를 갖고 싶다 했다.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매주 목요일 밤은 꽃만두 박성원 아워’라는 예고 포스터를 입구에 붙였다. 첫날은 손님을 더 받을 수 없을 만큼 만원이었다. 그것은 곧 원맨 개그쇼의 기원이 됐다. 그러나 다음 목요일 제 시간이 됐는데도 박성원이 DJ실에서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아주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선배님, 무서워요. 못하겠어요.”
사연인즉, 실내에 약 20명 정도 손님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단골이라는 것. 이미 3O번도 넘게 자기 개그를 들어 레퍼토리를 거의 외고 있는 이들인데, 어떻게 똑같은 것을 또 반복하느냐는 것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쇼는 계속해야 한다. 그를 설득했다. 오늘은 시비를 걸어봐. 왜 안 웃는지. 왜 코웃음치는지. 눈에 띄는 대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딪쳐봐. 손님도 자기에게 화살이 날아올까봐 긴장할 테고. 소위 재즈연주에서 말하는 애드리브 수법을 권했다. 매일 하는 거지만 여기저기 탈선하면서 진행하면 객석과 무대가 더 달아오를 것이라고 부추기면서….
꽃만두 박성원이 기지개를 켜면서 DJ실 밖으로 나와 육각형 탁자에 앉았다. 손님이 그를 보는 게 아니라 그가 손님을 보고 있었다. 손님 수는 적었지만 성공이었다. 소문은 곧 퍼져나가 TBC 라디오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해 ‘꽃만두 박성원 아워’라는 중고생 대상의 스튜디오 라이브 토크쇼를 신설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특히 여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프로 속에서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어머” 했고, 다가가면 비명을 질렀고, 말을 붙이면 거의 기절했다. 난리, 난리. 그런 객석이 예전엔 없었다. 무대보다 객석이 늘 압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자기 방 낮은 문고리에 넥타이를 걸고 앉은 자세로 장난처럼 떠났다. 그야말로 심심풀이로 한 것인데 그리 된 건 아니었을까. 갑자기 얻은 주체할 수 없는 인기는 때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그 두 번째 목요일. 나는 그를 부추기지 말아야 했다. 그를 그냥 그대로 제 발로 일어서게 했어야 했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르 시랑스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손님은 신을 벗고 들어왔는데 손님이 ‘이실직고’하면 대야에 물을 담아 씻게 했다. 자주 대야물을 쓴 것은 김민기와 양병집. 둘은 명동을 걸을 때도, CBS 라디오에 출연할 때도 맨발이었다. 당시 이동원은 고은 선생과 가까웠던 모양이다. 그는 ‘빈센트’를 자주 불렀고 고은 선생은 르 시랑스를 불당 같다고 했다. 군에서 휴가 나온 까까머리 병사들도 있었고 일본항공의 스튜어디스들도 단골이었다.
‘어니언스’가 오는 날이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아가씨가 있었다. 까만 머리, 까만 눈. 조용하고 자그마했다. ‘편지’에 나오는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의 바로 그 여자였다. 어느 날이었다. 입구 구석에서 임창제가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며 작은 체구의 내게 쓰러질 듯 기대었다. 울고 있었다. “딴따라가 싫대요.” 그날 밤 T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그는 울먹이며 노래를 잇지 못했다.
그들의 두 번째 앨범 녹음 때는 나도 스튜디오에 같이 있었다. 가수들이 최종 녹음할 때는 스튜디오에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마장동 이청 기사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안건마씨의 편곡으로 그때로서는 드물게 피아노를 사용한 반주곡에 그들의 노래를 입히는 과정이었다. 아직 ‘짜깁기(음악의 어떤 부분을 수정해 끼워 넣는 작업)’가 안 될 때라 중간에서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불러야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내가 섰다. 두 사람은 그날 나를 보며 노래했다. 구절구절 나의 반응을 확인하며.
르 시랑스에서 거의 매일 듣던 곡이라 별로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음반에서 여러 곡이 크게 히트했다. ‘사랑의 진실’ ‘작은새’ ‘편지’ ‘잊으리라’ ‘외길’ ‘초저녁별’. 요즘도 간혹 ‘편지’를 듣게 되는데 예전과는 감흥이 다르다. 달아났던 그녀가 결국은 돌아왔기 때문이다.
1972년 1월 중순, 예총회장 이해랑 선생의 분부라며 길옥윤 선배가 내게 하나의 과제를 주었다. 돌아오는 3·1절 시민회관 축전에 통기타 가수들을 등장시키라는 것이었다. 일간스포츠 정홍택 기자가 기획을 맡고 라이온스 호텔에 방을 잡아 준비 사무실로 썼다. 김민기, 임문일, 송창식, 윤형주, 투코리안스, 방의경 등 핵심부대가 모여들었다. 저녁때가 됐다. 모두들 자장면 먹으러 가자며 자리를 뜨는데 김민기는 속이 안 좋다며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럼 우리 갔다 오는 동안에 다같이 부를 곡 가사라도 생각해봐” 하고 나갔다. 돌아오니 김민기가 머뭇머뭇 종잇장 하나를 내게 건넸다. 가사는 그 자리에서 송창식에게 넘겨졌고 삼 일 만에 곡이 완성됐다. 민족선열을 기리는 자리에서, ‘천재냐 광기냐’의 시대를 맞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부를 노래였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내 나라 내 겨레’ 中)
박대통령이 만든 ‘젊음의 행진’
1972년 늦가을, KBS TV에서 전화가 왔다. 다가오는 새해 특집으로 ‘젊음의 행진’을 예정하고 있으니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르 시랑스의 젊은이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주어질 시간은 두 시간. 날짜는 1973년 1월2일 저녁 7시, 담당 PD는 진필홍. AD는 김현숙이었고 의견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샹송 해설가로, KBS 심의실에 있던 이진섭 선생이었다. 당시의 KBS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두 시간 특집이라면 30명 정도의 출연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늘 가까이서 어울리던 분신들. 트윈폴리오, 조영남, 코코브라더스, 어니언스, 투코리안스, 스푸키즈, 김세환, 이장희, 서유석, 혼혈 여가수 수지, 풋내기 가수 윤석화, 최영희, 박성원, 고영수, 전유성, 정광태에 김민기, 양희은, 양병집, 이연실에 정미조까지 가세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방송시간은 줄었다. 두 시간이 한 시간 반으로, 그러다 또 한 시간으로, 결국 최종적으로 배당된 시간은 삼십 분이었다.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고를 고민하지 않고 모두 나가기로 했다.
몇 번인가 준비차 신참 AD 김현숙씨가 르 시랑스에 왔고 윤형주, 김민기, 임문일, 나 네 사람이 전략을 짰다. MC는 윤형주와 윤석화로 하고, 모든 출연자는 솔로를 하게 했다. 세트를 오픈해서 서기도 하고 의자에도 앉고 바닥에 털버덕 앉도록도 했다. 일제히 고고를 추다가 스톱 모션에 걸리면 한 사람씩 짧은 외마디를 내지르는 스페셜 컷도 준비했다.
생방송 당일,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내가 할 것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모두 라이브로 다져진 백전노장이었다. 노래는 반절만 불렀다. 누가 노래하면 나머지는 기타 반주나 박수로 그를 받들었다. 그날 마지막 부분에 내가 한 일이 하나 있었다. 객석 뒤쪽 빈 공간에 있는 A형 사다리에 올라가 가사 적은 종이를 들고 있는 것. 거기에는 김민기가 쓴 ‘내 나라 내 겨레’의 가사가 적혀 있었다.
다음날 아침 르 시랑스로 전화가 왔다. KBS의 이기하 국장이었다. 조금 떨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청와대에서 전날 밤 대통령 가족이 프로를 봤고, 방송 후 최창봉 사장에게 전화로 치하의 말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지금 회의중인데 ‘젊음의 행진’이 정규 프로그램이 되니 서둘러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청바지에 더벅머리, 통기타를 껴안은 젊은이들이 매주 KBS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주가 지난 1월 하순이었다. ‘캠퍼스 크루세이더스’는 스폰서를 찾지 못했지만 대신 KBS가 전국의 안방에 통기타 1세대들을 세워준 것이었다.
1999년 한국포크싱어협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친구들. 왼쪽부터 하남석, 임창제, 이승재, 최희준, 나, 한민.
두 번째 주 예선 통과한 곡 중 ‘견우 직녀’라는 것이 있었다. 이희목씨가 가사를 보고 내가 곡을 봤는데 문제가 생겼다. 작사가, 작곡가가 모두 스튜디오에 나와야 하는데 ‘견우 직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작사가는 대전교도소, 작곡가는 부산교도소에서 복역중인 장기수였다. 면회는 허가해주겠다는 대전 교도소장의 승낙이 있어 나와 AD 곽명세군은 KBS 대전방송 이달형 국장(고교 동창)의 안내를 받아 교도소를 방문했다. 소장실에서 만난 작사가 김영환씨는 무기수였다.
“그녀가 어디 갔느냐고 물으면 / 저 푸른 하늘을 가리켜주오”
잔잔한 말씨에 평온한 느낌. 죄를 지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법무부 내 직원이나 수감자들이 보는 잡지에 글을 올리니 부산의 한 수감자가 곡을 붙이겠다고 해 승낙을 했다는 것이었다. 소장은 그가 아주 마음 착한 모범수이고,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대담은 짧았다. 먼길 왔으니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이달형 국장이 앞장서서 시내 어떤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소장에게 물었다.
“교도소 견학이 가능할까요?”
김영환씨가 가리킨 교도소 안의 ‘저 푸른’ 하늘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곳에 “저 푸른 하늘”은 없었다. 나는 무색 무음의 진공관 안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시기 전에 차라도 한잔 하자”는 소장을 따라 다시 소장실에 들어섰다. 정색을 하고 소장에게 난데없는 한마디를 꺼냈다.
“보름이고 한 달이고 나도 여기 들어와서 살 수 없을까요?”
소장은 법무장관을 통해 대통령 결재까지 얻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심심풀이로 들고나는 곳이 절대 아니라고 했다. 대전을 다녀오고 3주쯤 지난 4월 초순 ‘견우 직녀’는 방송됐고 주장원상을 탔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현실이 되었다. 광고음악 녹음을 위해 통기타 가수들과 외출한 사이 중부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르 시랑스로 몰려와 손님으로 온 학생 60여 명을 연행했다. 실내를 샅샅이 뒤졌고 화장실도 조사했다. 주방일과 기도(문지기)를 보던 전직 중부서 형사 이선생도 연행됐다.
누군가가 르 시랑스를 대마상습업소로 고발한 것이었다. 주머니 조사를 받은 학생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이선생만은 구속됐다. 이선생이 자신이 주인이라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어떤 증거물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 화장실은 건물 공용이었다.
‘차오스’와 ‘카오스’
그날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선생이 걱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혹시 장기외박할 수도 있음을 식구들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신문에는 어제 사건의 기사가 벌써 실려 있었다. 10시쯤 형사실로 들어가 내가 업주니 이선생은 풀어달라고 했다. 형사 두 사람이 나를 별실로 데려갔다.
“제발 돌아가세요. 여기 오면 안됩니다. 선배(이선생)가 사칭으로 죄가 더 커져요”
그들은 나를 취조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돌아갈 생각을 안 하자 두 사람은 점심 시간이라며 아무 말 없이 나가고 말았다. 두 시가 되고 세 시가 되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직자에게 물으니 두 사람은 이미 퇴근했고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선생은 지금 어디 있으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다음 월요일에 다시 중부서에 찾아가 나를 수감하고 이선생을 풀어달라고 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도 구속하세요” 했더니 나를 유치장에 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한 조서를 간단히 작성했다. 이름, 생년월일, 본적, 주소, 학력, 경력, 르 시랑스의 경영내용 등이었다. 틀린 내용이 없고 잘못한 것도 없어서 지장을 찍었다. 이틀 후 검찰청에 갔다. 담당검사는 나보다 10세는 아래로 보였다. 이런저런 얘기로 부드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요즘 젊은이들, 특히 음악감상실 드나드는 젊은이들 모두 히피죠. 부모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탈선하고 성관계 문란하고 마약 상습하고. 이렇게 사회질서가 깨지는 것을 ‘차오스’라고 하지요?”
물어보니 대답 안 할 수가 없었다.
“차오스는 아니고 영어로는 ‘케이어스’, 독일어로는 ‘카오스’지요.”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영어사전을 가져와 발음을 살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독일어는 다를 거야.”
피의자가 ‘영감님’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무슨 일이 잘될까. 그는 다시 나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서대문 경찰서를 들러 밤에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됐다.
내가 수감된 감방에는 사상범 한 사람과 경제사범 여섯 명이 있었다. 나의 자리는 뒷간 바로 옆이었다. 면회 나가는 길에 이선생과 마주쳤다.
“왜 들어오셨어요?”
“죄송합니다. 갈곳이 없었어요.”
구자흥씨와 동생들이 면회하러 왔다. 이선생은 풀려났고, 나는 공판을 거쳐야 한다 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 이주일.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높은 곳에 있는 작은 창 밖에서 참새들의 짹짹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하루는 감방에 잡지가 들어왔다. 김영환의 ‘견우 직녀’ 가사가 실렸던 그 잡지였다. 무심코 뒤지다가 편집후기를 읽는데 거기에 곽명세씨와 나의 이름이 있었다. 내용은 두 사람이 지난 3월 13일 대전교도소를 방문해 김영환씨를 면회하고 돌아가 방송을 했다는 것이었다.
언제 공판이 열리고 풀려날지 알 수가 없었다. 들어올 때는 내 발로 걸어들어왔지만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나의 음력 생일은 석가가 고행길로 나선 2월8일이다. 지금 고행을 하는 나는 혹시 석가탄신일에 풀려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내 멋대로 하면서 공판일을 기다렸다. 공판일은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다가왔다. 공판에서 나를 담당한 변호사는 오유방씨, 재판장은 가수 정미조의 오빠 정만조 판사였다. 판결은 무죄였다. 단 매스컴을 통해 사회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석탄일 전날 나는 교도소를 나왔고 소금을 맞으며 집에 들어가 생두부를 먹었다. 그 해의 석가탄신일은 5월8일이었다. 한달 남짓의 고행이었다.
Age of Aquarius, 천재냐 광기냐…. 내가 겪은 사바세계로부터의 격리는 인재였을까 섭리였을까. 나를 담당했던 검사는 몇 년 후 면직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열 살 갓넘은 소년이 고물상에서 몇백 원짜리 고물을 훔친 사건을 입건, 송치, 수감했대서 검사직을 박탈당했다고 했다. 신문보도로 알게된 얘기다.
‘젊음의 행진’과 ‘우리들의 새노래’는 여전히 방송되고 있었지만 나는 방송에 나가지 않았다. 신문은 내가 무죄로 석방된 것을 보도하지 않았다. 르 시랑스 사건을 꼬집어 보도한 신문사에 들러 해당 부서 부장에게 따졌다. ‘그 기자는 현장에 와서 취재를 했는가, 왜 옆집 여성전용 다방(손님들이 담배 피우고 분위기가 퇴폐적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얘기까지 르 시랑스에 밀어붙였는가, 그 기자를 만나게 해달라.’ 그러나 만나게 해줄 리가 없었다. 내용인 즉 만취한 기자가 취재도 안하고 쓴 기사였고 그것이 소위 ‘매스컴을 통해 사회를 어지럽힌’ 판결문 속의 지적사항이었다.
이진섭 선배가 나를 위로했다.
“서대문교도소 별거 아냐. 언론계에 갔다온 사람 많아.”
그해 10월30일 대한민국 방송상 시상식에서 ‘우리들의 새노래’는 TV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 다음날인 10월31일 ‘견우 직녀’는 ‘우리들의 새노래’에서 연말 장원상을 받았다.
연말에 KBS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의 차녀 박근영양의 곡이 선정되었는데 나와서 심사평을 하라는 것이었다. 윤석중 선생, 박용구 선생, 그리고 정광모씨와 나란히 앉았다. 나는 다시 방송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OB맥주, 줄줄이 사탕, 브라보 콘
1973년 하반기. 한때는 이민을 갈까도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현실감이 그전 같지 않았다. 왠지 기력이 소진된 느낌이었다. 프리랜서의 길은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찾는 사람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궁리하고 있을 때 CF 제작사 ‘비프로’의 김영훈 사장이 광고음악을 해볼 생각이 있으면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를 해왔다. 비프로는 중부서 옆에 있었다. 김영훈 사장은 TBC의 우수한 카메라맨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그 실력을 인정해 도덕재무장 관계 영화를 그에게만 맡겼고, 월남전 특파원에 청와대 출입기자도 역임한 사람이었다. 부단한 연구와 노력으로 평판이 좋은 분이었다. 그가 막 CF 제작회사를 차린 것이었다. 소문은 이미 나 있어서 비프로의 일감은 많았다. 태평양화학, OB맥주, 해태제과, 롯데제과, 삼성 TV, 금성 TV, 대한 TV, 동아제약, 종근당, 삼양설탕, 제일제당…. 손대지 않은 회사가 없을 정도였다.
필름에 CM송을 붙일 때도 있고, 배경음악과 제품 로고송만 준비할 때도 있었다. 나는 김영훈 사장의 작업을 처음부터 끝(납품단계)까지 지켜보면서 카메라 렌즈가 얼마나 냉혹하고 비정한 것인지 알게 됐다. 1초 24프레임마다 찍히는 것이 다 달랐다. 같은 커트를 무수히 찍어 그중 제일 좋은 것을 골라 편집하는 일, 그것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나도 1초 24프레임에 준하는 세밀성으로 녹음에 임했다. 시각과 청각의 조화. 언제 시각을 강조하고 언제 청각을 고조시킬 것인가. 언제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소비자의 감성은 예리했다. 정성 들인 만큼의 반응이 나왔다. 김사장과의 공동작업에서 나는 많은 것을 깨우쳤다. 한참 광고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대중가요가 아주 느슨하게 들리기도 했다.
다음은 초기에 만든 CM송들이다.
‘OB 흰 거품에 OB 그 한잔에 너의 마음 나의 마음 하나가 된다. 마셔요 OB OB, OB 맥주’(‘OB맥주’ 카피 이백천, 곡 김도향·김영민)
반응이 대단했다. 너무 대단해서 이 CM을 계기로 주류의 CM은 방송불가라는 당국의 결정이 나왔다.
‘아주머니 아직도 하루 세 번 밥을 지으시나요. 한번이면 되는데. 오늘 당장 구하세요 한상전자 쟈. 언제나 따뜻한 밥 한상전자 쟈아아’(‘한상전자 쟈’, 카피 이백천, 곡 김도향).
나는 소리의 원초성을 찾고 싶다. 옷도 벗고 몸도 벗고 소리 속의 혼을 보고 싶다
‘아빠 오실 때 줄줄이 엄마 오실 때 줄줄이. 우리집은 오리온. 줄줄이 사탕. 난 먹고 싶은 거야’(‘줄줄이 사탕’ 카피 이백천, 곡 김도향).
초등학교 3학년 남자 아이가 불렀다. 차려자세로 소리를 곧장 지르게 했다. 제품은 늘 동이 났다. 야구장에선 안타가 나고 연속 득점이 나면 이 노래가 불려졌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되려면 이 제품을 사들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열두 시에 만나요 브라보 콘 둘이서 만납시다 브라보 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브라보 콘 브라보 브라보 콘’(‘브라보 콘’, 카피 송영만, 곡 강근식, 노래 강근식(첫해), 윤석화(다음해)).
이 CM송이 나올 무렵 해태는 경영 위기였다. 이 제품이 그 해 2억원의 매상을 올리면 대성공이라고 했는데 20억원을 기록했다. 해태를 살린 CM송이었다. 이듬해 윤석화가 ‘살짝이’를 ‘살짜쿵’으로 다시 불러 또 히트했다. 윤석화는 이를 계기로 두 달 사이에 50개의 CM송을 부르고 급기야 MBC의 주말 쇼프로 MC까지 맡게 됐다.
CM송은 단순성, 명쾌성, 친근성이 중요하다. 당시는 아직 TV가 흑백이었기 때문에 음향이 화면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어린이들이 동요는 안 부르고 CM송만 따라 부른다 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대마초 파동 그 이후
‘비프로’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CM송 제작에 여러 식구가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같이 시작한 김도향에 이어 스푸키스의 김영민, 김찬, 그들의 친구 석태홍, 그리고 윤형주와 ‘우리들의 새노래’에서 픽업한 강원도 아가씨 김복순. 비프로 김영훈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국 스튜디오’를 개설했다. 새로 또 멤버가 늘어나 이현섭(이진섭 선생의 아우, ‘옛 시인의 노래’의 작곡자), 듀오 ‘4월과 5월’의 백순진, 작편곡가 이경석, 그룹 ‘동방의 빛’ 멤버인 이영재, 정수라, 윤석화, 기타리스트 겸 편곡자 문성원 선생 등도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다.
한국스튜디오에서는 노래 워크숍도 열었다. 안식구 외에 ‘4월과 5월’의 김영진, 이지민군과 남궁옥분 등 새로운 인물들도 자주 들렀다. 판소리 명창 박동진 선생을 모시고 워크숍을 연 일도 있었다. 선생은 40세가 지난 후 판소리를 시작했는데 분뇨 거른 물을 마시며 폭포수 밑에서 수련한 얘기 등을 해주었다. 훗날 박선생에게 “판소리에서 좋은 소리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물은 일이 있었다.
“그건 쇤소리여. 요즘은 ‘허스키’라고 하던가. 소리를 좀더 뽑아내려는데 기진 상태여. 그런데도 마지막 힘을 다해서 좀더 내려고 할 때 나는 소리, 그르륵 가래 끓는 소리. 그게 진국의 소리여. 숨 걷기 직전에 나오는 그런 소리 말여.”
1974년에서 1978년까지 5년간은 주로 CM송 작업을 했다. 통기타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갔다. 방송과 레코딩, 축제, 그리고 공연. 1974년은 포크 가수들에게 최고의 해였다. 주요 신문이 청바지 문화를 언급했고 라디오 심야프로는 이들의 주무대이자 사교장이었다. 동아방송 심야프로는 이장희에서 윤형주로 바통이 넘겨졌고, 동양방송에서는 서유석이 형 노릇을 하면서 후배들을 이끌었다.
이제 음악감상실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객석의 입김을 알고 하는 노래와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시작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이때쯤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소위 ‘짜깁기’라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음색이나 여운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어 노래 실력이 달려도 어지간하면 음반을 낼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스튜디오 가수들은 자신의 타고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기계가 변조해놓은 음성을 자신의 소리로 느껴야 했다.
녹음기술이 가창력을 추월해 가수들은 멋과 테크닉에 빠져들기도 했다. 비디오형 가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대마초 파동 이후부터다. 한때는 음악산업 현장에 가사만 좋아도 히트할 수 있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다. 얼마나 가창력이 퇴화했으면 그런 말이 나돌았을까.
1977년에 구자흥씨의 아우 구자형(방송 작가, 음반기획자)군이 나를 찾아왔다. 1975년부터 대학로 성베다교회에서 워크숍 겸 라이브 스테이지를 계속해왔는데 장소를 옮겨 명동성당 카톨릭여학생관에서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모임을 매주 갖는다는 것이었다. 모임을 이끄는 MC를 맡아달라고 했다.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주요 멤버는 강인원, 남궁옥분, 전인권, 명혜원, 이종만, 유성찬, 유한그루, 곽성삼, 한동헌(서울대 경제학과, 서울대 통기타 동아리인 메아리의 대표이자 후일 ‘노래를찾는사람들’의 리더), 박용범(현 조선대 교수) 등이었다. 이홍열도 그때 멤버였고 고교생 개그맨 지망생들도 이 무대에 섰다. 대개 촛불을 켜놓고 진행했고 한때는 함석헌 선생을 초빙해 ‘노자강의’를 듣기도 했다. 내가 참여해서는 박동진 선생을 모시기도 했다.
전인권은 당시 아직 득음(得音)이 안 돼 주로 듣기만 하는 멤버였다. 강인원은 현재 음대 교수이고 남궁옥분은 지금도 공연에 바쁜 몸이다. 모두들 소박한 심성의 젊은이들이었다. 카톨릭여학생회관이라 수녀님들도 적지 않았고 분위기가 늘 숙연해 청개구리집이나 르 시랑스와는 달리 심성을 수양하는 곳 같은 느낌도 있었다. 한동헌이 이끄는 ‘노찾사’가 나중에 사회의 그늘진 곳,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고 쟁의 현장에까지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찾사의 계보에서 일반에 알려진 가수로는 ‘솔아솔아’를 부른 안치환이 있고 그 다음이 윤도현이다.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다. 서울대 농대 그룹 ‘샌드 페블스’가 대상을 타고 서울공대 트리오가 ‘젊은 연인’들로 동상을 탔다. 한국 스튜디오에서 연습한 팀이었다.
1978년 한국스튜디오를 폐쇄했다. 김도향과 윤형주가 따로 나가 기획사를 차렸고 서로 경쟁할 처지가 아니어서 광고음악에서 아주 손을 떼었다. 나는 다시 비프로 김영훈 사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분은 나를 받아줬다. 내가 별로 도움을 주지도 못하면서 신세를 진 사람이 김영훈 사장이다.
“저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나!”
시간을 의식하며 나의 얘기를 적는 것보다 현장을 따라 공간감각을 더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한강, 여의도광장, 파랑새극장, 시청 앞 광장,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일산 아파트 단지 안 벤치와 나무. 남이섬 울창한 숲과 넓은 잔디, 아침에 물가에서 바라본 물안개….
먼저 ‘국풍81’ 때의 여의도광장. 대학생들의 노래 콘테스트가 열렸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의 공연과 심사였다. 크고 거창한 무대. 그 앞의 넓은 공간. 전체 무대가 한눈에 보일 정도의 자리에 반원 형태로 배치된 약 10석의 심사위원석. 뒤쪽으로 조금 떨어져 맨바닥에 앉은 관객들과 시민. 공연이 다 끝났으니 서둘러 심사를 해야 했다. 이봉조 악단장이 저만치서 벌떡 일어나 반대쪽 끝에 앉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백천아, 누가 제일 낫노?”
이봉조씨는 나보다 서너 살 위다. 사람 많은 곳에서 유독 “백천아”를 연발했다. 고등학교 동창생말고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심사원 모두가 나를 향했다. 물어왔으니 나의 생각을 대답해야 한다.
“서울대 그룹도 좋고 혼자 기타 치면서 노래한 친구도 좋은데…. 솔로 한 친구가 더 좋은 거 같아. 혼자서 그만큼 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하자.”
경상도 사나이 이봉조의 결정이 전원의 결정이 됐다. 이용이 대상을 받았다.
이용을 MBC ‘가요콘서트’에서 1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날은 그가 주인공이다. 그는 여러 곡을 불러야 했다. 그런데 연습중 유난히 눈을 깜빡거렸다. 멈추게 하고 싶었다.
“이용씨! 노래하면서 자신이 낸 소리의 빛깔도 안 봐요? 눈은 왜 그렇게 깜빡거려요?”
바로 며칠 전 그의 삼촌 이종덕(전 세종문화회관장, 전 예술의전당 관장)씨가 내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조카 좀 잘 봐줘. 미국서 돌아왔는데 힘든가봐.”
“가수가 깜빡거리면 듣는 사람이 정신없어요. 깜빡거리지 마세요. 그리고 자기가 낸 소리가 어떻게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걸러지고 다시 눈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지 살핀 다음 소리를 내봐요. 그렇게 하면 눈 깜빡거림이 없어질 겁니다.”
그는 그날 깜빡이지 않았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프로그램 게시판에 소감들이 올라왔다.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내가 이용씨의 가슴속에 들어가 내내 같이 노래한 것 같은 흥분을 느꼈습니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친구가 있나.
‘들국화’의 전인권은 한동안 나를 전속 사회자로 삼았다. 대학로 파랑새극장,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공연장,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극장. 그는 나에게 MC로서 누릴 수 있는 무한자유를 주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얘기하고 싶을 때는 아무 때라도 끼여들고, 노래를 중간에 중지시켜도 좋고, 연주중 무대를 돌아다녀도 좋았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극장에서 ‘대학신입생 환영 봄축제’를 40일 동안 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날 나의 심사는 삐딱했다. 나는 전인권을 추켜올리는 데 지쳐 있었다. 추키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한 그를 그날도 오프닝 멘트에서부터 틀에 박힌 말로 추켜세우고 싶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 첫 멘트를 했다.
“오늘 따라 좋은 소리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찬란하고 강하고 영웅적인 소리는 스타가 내는 소리이지 마음에 스며드는 소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소리를 내면 그 앞에 앉은 사람은 무엇입니까.”
바로 옆에서 나를 보고 있던 전인권의 볼에 경련 같은 것이 스쳤다.
“좋은 소리는 어쩌면 무난한 소리가 아닐까요. 흠 잡을 데 없는 편안한 소리. 듣는 사람을 결코 위압하지 않는 소리. 자기 소리보다 남의 소리를 더 소중하게 받들면서 내는 무난한 소리.”
전인권의 콘서트에는 마니아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날 내가 ‘딴소리’를 한 것은 전인권의 또 다른 소리를 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늘 그룹의 앞장을 서던 그가 그날은 그룹의 소리를 떠받치는 역할로 변신했다. 사운드가 확 달라졌다. 새로운 투명감이 소리 속에 끼여들면서 우리 모두의 귀가 전인권의 소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커튼 옆에서 무대를 보고 있는데 천장의 라이트와 바닥의 라이트로 비춰지는 미립자 먼지들이 소리에 취한 탓일까, 마치 요정들이 춤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럴 수가…!
그날의 기타(김광석), 베이스(민재현), 드럼, 그리고 전인권 네 사람이 어울려 내는 소리는 천상의 음악이었다. 소리에는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또 하나의 유체(流體) 같은, 차원이 다른 공간이 있었다. ‘무난한 소리’에 대한 전인권적 해석이 새 감동을 엮어낸 것이었다.
소리 속에서 혼을 보고 싶다
이때가 1991년. 이날의 이상체험이 하나의 전기가 되어 나는 1964년부터 계속해온 포크 세대와의 랑데부 여정에 일단락을 찍었다. 초기 1세대가 40대를 넘어 50대로 접어들고 있고, 서태지를 앞세운 신세대의 소리에서는 통기타의 통나무가 들려주던 소박한 입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보다 동작, 분장, 재치 쪽에 경사돼 있었다. 나는 소리에서 어떤 원초성을 찾으려는데 그들은 소리를 사용해서 그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새로운 ‘자극’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옷도 벗고, 몸도 벗고, 소리 속에서 어떤 혼을 보고 싶었는데 그들은 자꾸 더 껴입고, 더 바르고, 그리고 더 높이 뛰어오르고 싶어했다.
언젠가 이진섭 선생이 스탠 게츠(쿨 재즈의 창시자, 테너색소폰 연주가)의 서울 안내역을 3일간 내게 맡긴 적이 있었다. 그는 당대 20년 동안 테너색소폰의 세계 최고 연주자였다. 길옥윤 선배도 그의 음악을 연구했고,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는 “알파, 베타, 오메가”의 세 단어를 말했다. 그 세 단계를 거치면 무념, 무상, 무아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고 애쓰지 않아도 음악이 스스로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뉴욕의 자기 집에는 명상을 위한 기계가 있고 순회공연 때는 늘 분장실에서 30분간 그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언젠가 인간문화재 김소희 선생의 따님 박윤초씨가 내게 해준 말이다. “소리마다 혼이 박혀 있어야 해. 작은 소리든 큰 소리든.” 생전에 어머니가 자주 한 말씀이라고 했다.
또 언젠가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지에서 읽어낸 풍월이다. 청각을 관장하는 뇌의 측두엽(側頭葉)은 듣는 것 외에 다섯 개의 또 다른 기능을 관장하는데 그것은 ‘영감’ ‘신비감’ ‘직관’ ‘텔레파시’ ‘초능력’이라는 것이다. 청중의 귀에 노래를 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존경하는 스승 성경린 선생님과 TBC TV 시절 선배 최상형 형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한국 사람의 심성은 슬기롭고 청아(淸雅)해. 샘물처럼.”
통나무의 순박한 숨결에 자기 소리를 실어 노래했던, 아니 지금도 노래하고 있는 포크싱어들이 지금 한참 지쳐 있을 50~70대와 젊은 세대에게 다시 성숙과 맑음, 새 영감에서 비롯되는 노래를 들려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