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 현장을 둘러보는 임승남 사장(오른쪽). “매일처럼 전국의 현장을 누비는 게 즐겁기만 하다”고 한다.
이런 시장 상황을 반영하듯 최근 기업들은 너나 없이 불필요한 투자와 지출을 줄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생산활동에 필수적인 부분을 제외한 비용은 최소화하거나 아예 없애고, 신규 채용에도 인색하기만 하다.
그런데 요사이 내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위기는 기회다”라는 것이다. 위기라고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위기 자체를 극복하자는 말이다. 물론 기회가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기에 대비해 역량을 키워둔 사람만이 이런 순간을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꾸준히 준비하는 업무 수행 태도 및 이와 관련된 학습일 것이고, 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탄탄한 재무개선 활동과 첨단 기술력, 영업 노하우 확보 등일 것이다.
얼마 전 최근 10년간의 대기업 순위 변화에 대해 다룬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선두를 달리던 재벌이 순식간에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거나, 심지어는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허다했다. 이러한 변화는 점점 더 가속화하고 있어 이젠 그 누구도 기업의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이는 쉼없는 자기 혁신의 노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도태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올해로 나는 직장생활 40주년을 맞는다. 국가 산업 근대화와 함께한 나의 청춘 시절을 뒤돌아보면 자기 혁신의 노력이 있었기에 나 자신은 물론 내 주변과 내가 몸담고 있는 기업도 꾸준히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
모래바람과 ‘밑 빠진 독’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은 연세대학교 화공학과 4학년이던 1964년이다.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롯데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해 일본 롯데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이곳에서 나는 초콜릿, 껌 등을 생산하는 일부터 배웠다. 그후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이사와 롯데잠실건설본부장 등을 거쳐 1998년 4월 롯데건설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롯데건설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롯데건설 중동본부장을 맡으면서였다. 롯데건설의 전신인 ㈜평화건업이 중동 건설붐을 타고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벌인 해외 사업의 수습 책임자로 발령되어 중동으로 날아갔는데, 당시 그곳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형국이었다.
국내 건설업체들 사이의 지나친 경쟁과 이에 따른 덤핑 수주, 공사와 관련 없는 무리한 클레임 등으로 복마전을 빚고 있었다. 직원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이직률이 30%에 이르렀고, 무사안일과 적당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적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만큼 자금관리에도 문제점이 많았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현장 내 인화단결을 도모하고, 기강확립을 통한 적당주의의 배격, 각 현장의 구체적인 적자 파악, 자금 조달의 일원화, 정확한 수주 원가 계산 등 해외공사 정리작업을 펼쳤다.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현장을 뛰어다닌 결과 밑이 보이지 않던 ‘문제 공사’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어갔다. 그 결과 총연장 111㎞의 알랴마니아-아담 간 연결도로, 리야드 공군본부 지하사령부, 제다 공업단지 등을 성공적으로 완공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사 여건상 신규 수주를 중단하고, 진행중인 사업장에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더 이상 손실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새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것보다는 기존 사업장을 무사히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치는 거센 모래바람, 마치 밑빠진 독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도 없이 새나가는 각종 비용 등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시련이 결국에는 큰 기회이자 좋은 경험이 됐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땀방울을 연신 훔쳐대며 인내를 배웠다. 리야드 공군본부 지하작전사령부를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끄떡없게끔 짓고, 끝없는 모래벌판 위에 도로를 닦으면서 수준 높은 시공 기술을 축적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무형의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중동에 진출해 있던 세계 유수의 건설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쌓아올린 기술이 오늘의 롯데건설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