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넥스트 도어 걸즈(Next door girls)’, 혹은 ‘넥스트 도어 맨(Next door Me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배우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에 주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길종 감독의 페르소나(인체상)로 불리는 하재영은 1970년대 반항과 개성을 상징하는 청춘스타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개화(開花)할 무렵 대마초 파동으로 4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시대가 안겨다준 상실과 상처를 직격탄으로 맞은 하재영은 그 상흔을 안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몹시도 평범한 외모지만 분명한 것은 하재영만큼 자신만의 향취를 가진 배우를 만나기란 어렵다는 점이다. 하재영에게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개성이 묻어난다. ‘무채색의 색채, 없음이 곧 있음’인 이 배우를 보자면 가끔은 멍해 보이고, 또 가끔은 정말 어눌해서 오히려 진심이 전해지는 무균질의 매력을 떨쳐내기 힘들다. 평생 한 여자에게만 성실할 것 같아 보이는 얼굴에는 여자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고, 그러면서도 평생 ‘넘버 원’으로 선택받지 못할 것 같은 평범함의 그늘에는 동물성이기보다는 영원한 식물성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다.
그래선지 하재영은 1980년대 의지할 데 없는 여주인공들의 작은 오아시스이자 안식처가 된다. 남성 관객에게는 친구가 되고 여성 관객에겐 휴식이 되는 비어 있는 편안함, 혹은 수동적 이미지는 2000년대 이르러서 ‘상실의 시대’를 대표하는 아버지, 즉 묵묵한 가장의 역할로 드라마에 안착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추억과 집착 때문에 차마 딸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아버지로, ‘겨울연가’ ‘여름향기’ ‘유리구두’에서는 누군가와 헤어지고, 죽고, 아픔을 감추는 아버지로 브라운관의 한쪽을 채웠다.
1970년대 ‘고래사냥’을 목청껏 부르면서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리고, 비좁은 ‘닭장차’나 아스팔트 위에서 맨 잠을 자본 이들은 알리라. 이층 양옥집을 짓는 것이 꿈이라던 ‘바보들의 행진’(1975)의 영철이 동해에 몸을 던진 까닭을. 한국영화 사상 가장 인상 깊은 데뷔 신고식을 치렀으나, 암흑의 시대인 1980년대에 전성기를 속절없이 흘려보낸 배우. 그래서 ‘정말 운이 나쁜 배우’라는 내 말에 묵묵히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본 운 좋은 사나이”라고 답하는 사람. 하재영은 ‘꿈꾸는 식물’이다.
욕심 없는 아이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 인터뷰가 어느덧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1980년대를 대표할 만한 남자배우가 드물어요. 이대근, 김추련, 이영하씨가 활동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재영씨는 1970년대 가장 중요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바보들의 행진’에서 주연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1970~80년대 영화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직접 만나니 배우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정말 욕심이 없어 보입니다.
“욕심이 없죠.”
-사람이 어떻게 욕심 없이 살 수 있죠?
“어릴 때부터 종종 어머니께서는 저더러 다른 형제와 달리 욕심이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어머니는 김을 구워서 늘 나눠줬어요. 형제가 많으니까. 그러면 전 항상 제몫을 먹지 않고 있었대요. 그러다 형이나 동생들이 제몫을 다 먹고 하나씩 가져가도 가만두었다고 해요.”
-그렇게 자기 것을 챙기지 못했는 데도 굶어죽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맞아요. ‘마음 좋은 년 동네 시어머니가 열몇이라’고, 욕심 없이 살았는 데도 이상하게 호주머니에 돈 마를 때쯤이면 돈이 좀 생기고 그래요.”
-아내는 남는 것 없다며 힘들어하지 않나요.
“이젠 익숙해져서 그렇지 않아요. 예전에는 조감독들이 ‘좀 싸게 해주지’ 그러면 공짜로도 출연했어요. 그때는 스태프들과 버스 같이 타고 다니면서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네가 감독하는데 그냥 해줘야지’ 그러면서 어영부영 공짜로 출연해주는 일이 많았죠.”
-영화에 공짜로 출연했다는 말입니까?
“네. 나중에 준다고 해서 ‘그래, 그럼 나중에 줘’ 그랬다가 안 주면 할 수 없는 거고. 그런데 그렇게 떼어먹은 사람들은 잘 안 돼요.”
-하재영씨는 실물이 낫네요. 키도 크고. 요즘 하시는 연기 대부분이 내향적이고 상처받기 쉽고, 그런 인물이지요. 그 때문인지 훤칠하다는 느낌이 브라운관에서 잘 살아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감독들이 내게 원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런 것도 있다’면서 다른 걸 꺼내 보여주면 깜짝 놀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