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무균질의 매력’ 하재영

“‘바보들의 행진’으로 시대의 아픔 대변한 건 큰 행운”

  •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04-03-02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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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재영은 1975년 ‘바보들의 행진’의 영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러나 대마초 파동으로 4년간 활동이 금지됐다. 한국영화의 암흑기인 1980년대를 속절없이 보낸 후 1990년대에는 TV브라운관에서 ‘상실의 시대’를 대변하는 아버지로 자리잡았다.
    • 그러나 하재영만큼 독특하고 일관된 이미지를 간직한 배우는 찾기 힘들다. 내성적인, 상처받기 쉬운, 편안한, 욕심 없는, 무채색에 가까운 배우. “참으로 운이 없다”는 말에 “이것저것 다 해보는 행운을 누렸다”며 자족하는 그는 ‘꿈꾸는 식물’이다.
    ‘무균질의 매력’ 하재영
    가끔 배우들 중에는 ‘저 사람이 어떻게 배우가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그런 배우들이 있다. 길을 걷다 한번쯤 지나쳤을 것 같은 얼굴. 만만해 보이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같아 무심히 지나치지만, 영화에 나오지 않으면 왠지 허전함이 밀려오는, 우리 같은 그들.

    ‘넥스트 도어 걸즈(Next door girls)’, 혹은 ‘넥스트 도어 맨(Next door Me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배우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에 주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길종 감독의 페르소나(인체상)로 불리는 하재영은 1970년대 반항과 개성을 상징하는 청춘스타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개화(開花)할 무렵 대마초 파동으로 4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시대가 안겨다준 상실과 상처를 직격탄으로 맞은 하재영은 그 상흔을 안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몹시도 평범한 외모지만 분명한 것은 하재영만큼 자신만의 향취를 가진 배우를 만나기란 어렵다는 점이다. 하재영에게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개성이 묻어난다. ‘무채색의 색채, 없음이 곧 있음’인 이 배우를 보자면 가끔은 멍해 보이고, 또 가끔은 정말 어눌해서 오히려 진심이 전해지는 무균질의 매력을 떨쳐내기 힘들다. 평생 한 여자에게만 성실할 것 같아 보이는 얼굴에는 여자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고, 그러면서도 평생 ‘넘버 원’으로 선택받지 못할 것 같은 평범함의 그늘에는 동물성이기보다는 영원한 식물성의 이미지가 깃들어 있다.

    그래선지 하재영은 1980년대 의지할 데 없는 여주인공들의 작은 오아시스이자 안식처가 된다. 남성 관객에게는 친구가 되고 여성 관객에겐 휴식이 되는 비어 있는 편안함, 혹은 수동적 이미지는 2000년대 이르러서 ‘상실의 시대’를 대표하는 아버지, 즉 묵묵한 가장의 역할로 드라마에 안착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추억과 집착 때문에 차마 딸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아버지로, ‘겨울연가’ ‘여름향기’ ‘유리구두’에서는 누군가와 헤어지고, 죽고, 아픔을 감추는 아버지로 브라운관의 한쪽을 채웠다.

    1970년대 ‘고래사냥’을 목청껏 부르면서 최루탄 가스에 눈물 흘리고, 비좁은 ‘닭장차’나 아스팔트 위에서 맨 잠을 자본 이들은 알리라. 이층 양옥집을 짓는 것이 꿈이라던 ‘바보들의 행진’(1975)의 영철이 동해에 몸을 던진 까닭을. 한국영화 사상 가장 인상 깊은 데뷔 신고식을 치렀으나, 암흑의 시대인 1980년대에 전성기를 속절없이 흘려보낸 배우. 그래서 ‘정말 운이 나쁜 배우’라는 내 말에 묵묵히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본 운 좋은 사나이”라고 답하는 사람. 하재영은 ‘꿈꾸는 식물’이다.



    욕심 없는 아이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 인터뷰가 어느덧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1980년대를 대표할 만한 남자배우가 드물어요. 이대근, 김추련, 이영하씨가 활동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재영씨는 1970년대 가장 중요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바보들의 행진’에서 주연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1970~80년대 영화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직접 만나니 배우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정말 욕심이 없어 보입니다.

    “욕심이 없죠.”

    -사람이 어떻게 욕심 없이 살 수 있죠?

    “어릴 때부터 종종 어머니께서는 저더러 다른 형제와 달리 욕심이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어머니는 김을 구워서 늘 나눠줬어요. 형제가 많으니까. 그러면 전 항상 제몫을 먹지 않고 있었대요. 그러다 형이나 동생들이 제몫을 다 먹고 하나씩 가져가도 가만두었다고 해요.”

    -그렇게 자기 것을 챙기지 못했는 데도 굶어죽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맞아요. ‘마음 좋은 년 동네 시어머니가 열몇이라’고, 욕심 없이 살았는 데도 이상하게 호주머니에 돈 마를 때쯤이면 돈이 좀 생기고 그래요.”

    -아내는 남는 것 없다며 힘들어하지 않나요.

    “이젠 익숙해져서 그렇지 않아요. 예전에는 조감독들이 ‘좀 싸게 해주지’ 그러면 공짜로도 출연했어요. 그때는 스태프들과 버스 같이 타고 다니면서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 ‘네가 감독하는데 그냥 해줘야지’ 그러면서 어영부영 공짜로 출연해주는 일이 많았죠.”

    -영화에 공짜로 출연했다는 말입니까?

    “네. 나중에 준다고 해서 ‘그래, 그럼 나중에 줘’ 그랬다가 안 주면 할 수 없는 거고. 그런데 그렇게 떼어먹은 사람들은 잘 안 돼요.”

    -하재영씨는 실물이 낫네요. 키도 크고. 요즘 하시는 연기 대부분이 내향적이고 상처받기 쉽고, 그런 인물이지요. 그 때문인지 훤칠하다는 느낌이 브라운관에서 잘 살아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감독들이 내게 원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런 것도 있다’면서 다른 걸 꺼내 보여주면 깜짝 놀라죠.”

    -인터뷰는 왜 안 하시죠?

    “말주변도 없고 옛날 생각도 나고….”

    -옛날 생각하는 게 싫은가요?

    “돌이켜 생각하면 방황만 했던 것 같아요. 즐거운 날이 많지 않았죠. 요즘 젊은이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죠.”

    갑갑하던 옛 시절을 이야기하기 싫었던 것일까. 그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요즘 가장 잘 되는 영화가 ‘실미도’냐”고 묻는다. ‘친구’가 갖고 있던 신기록 800만 관객을 넘어 1000만 관객 고지를 향해 순항중”이라고 답했더니, 대뜸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나는 강우석이 감독으로 대성할 줄 몰랐어요. 옛날에 그 친구가 정인엽 감독 연출부 막내였거든요. 그런데 일을 미련할 정도로 못하더라고.

    바닷가 카페에서 영화를 찍는데 해일을 만드느라 물이 필요했죠. 감독이 좀 멀리 떨어진 바다에 가서 물을 받아오라고 했어요. 강우석 그 친구가 나보고 같이 가재요. 그때 내가 지프를 몰고 다니는 역할을 맡아서 차 열쇠가 있었거든요. 강우석이 드럼통을 껴 안고 옆에 앉고 내가 운전했는데, 커브 길을 돌 때마다 ‘어어어’ 하면서 드럼통을 떨어뜨렸어요. 드럼통이 양철로 된 거였는데, 바닥이 많이 닳아서 굉장히 날카롭더라고요. 이 바보가 그것도 모르고 껴안고 있었죠. 나중에 보니까 손이 피반, 물 반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때 ‘너는 감독 안 된다’고 그랬거든요. 우스갯소리지.”

    -미련한 게 아니라 열정적인 거네요.

    “너는 감독 안 돼, 임마. 야, 물을 카메라 보이는 데만 살짝 뿌리지 뭣 하러 안 보이는 데까지 다 뿌려…. 그러면서 우스갯소리로 감독 못 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강우석, 그 사람 하나뿐이에요.”

    -그러니까 오기가 있는 거죠. 이제는 한국영화 파워 1인자인데.

    “내게는 1인자라고 느껴지지 않고 그저 옛날 생각만 나죠.”

    연극에서 영화로

    -본론으로 돌아와서 몇 개 질문을 드립니다. 하재영씨는 1960년대 배우들처럼 신화적 인물은 아니죠. 그렇지만 독특한 캐릭터와 향취를 가진 배우인 것 같습니다. 굉장히 내향적이고 수동적이면서 상처받기 쉽고. 실제로도 그렇게 내향적인가요?

    “실제 성격도 그래요.”

    -무대에 오르는 게 겁나지 않았나요?

    “처음 연극무대에 섰을 때 다리가 후들거렸죠. 내가 내 다리를 잡을 정도였으니까. 그때 오태석씨가 연출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티볼트가(家)의 똘마니 역할을 맡았어요. 그런데 첫날만 떨렸지, 그 다음부터는 재미있더라고요. 그러다 영화도 하게 됐죠. 하길종 감독이 극단 사무실로 전화해 ‘청계천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오라’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바보들의 행진’ 대본을 주었어요. 영화도 그렇게 어영부영 하게 됐어요. 영화에 대한 사명감, 이런 건 나와 거리가 멀었죠.”

    -하길종 감독은 어떻게 하재영씨를 마음에 두게 됐습니까?

    “왜 나를 캐스팅했냐고 물으니까 ‘네 얼굴이 탁 들어오더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별 말씀 없었습니다. 나도 굉장히 궁금했어요.”

    -영철이란 인물에 대한 감독의 구상과 하재영씨 이미지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본인에게 ‘바보들의 행진’은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요.

    “그럼요. 데뷔작이니까 더 그렇죠.”

    충무로의 기린아, 분열과 순수와 반항으로 1970년대를 일갈했던 하길종은 1979년 서른여덟의 나이로 요절한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다.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이 미국에서 돌아와 만든 세 번째 장편 영화였다. 청와대를 연상시키는 푸른 집을 배경으로 동성애와 치정으로 얽힌 한 집안의 몰락을 그린 ‘화분’(1972)과 한사군 시대의 비극적 부부를 통해 폭군의 압제를 드러낸 ‘수절’(1974)은 흥행에서 실패했고 누구도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가 어느 정도 자신을 추스르고 대중에게 다가가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세 번째 영화가 바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대학생들의 경쾌한 풍속도에 청춘의 상실감과 비애를 효과적으로 녹여 넣은 이 영화 역시 30분 분량이나 잘려나가는 참변을 겪었지만 서울에서만 20만 관객을 모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비평계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원작자 최인호와 하길종은 단숨에 1970년대 청년문화의 대변자가 됐다.

    ‘바보들의 행진’은 핸드 헬드와 경사 앵글 등을 사용해 젊은이들의 불안감과 질식할 듯한 시대적 현실을 경쾌하게 잡아냈다. 장발을 단속하는 경관이 더 장발이고, 교정에서 담배를 피운 학생의 뺨을 때리는 교수가 당연시되는 사회. 누가 더 바보인지 모르는 ‘바보’ 테마는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과 함께 1970~80년대 영화를 이끌어가는 아이콘이 됐고, 영화 속 청춘들의 에피소드는 바로 1970년대 초반 젊은이들의 자화상이었다.

    영철과 병태가 도망갈 때 흐르는 곡은 그 뜻도 의미심장한 송창식의 ‘왜 불러’이며, 또 다른 노래 ‘고래사냥’은 한동안 금지곡이 됐다. 감독은 영화 내내 그들을 서울 거리에서 ‘질주’시킨다. 뛰는 것, 뛰어나가는 것! 오직 질주만이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라는 듯.

    ‘무균질의 매력’ 하재영

    ① 소낙비(1995, 최기풍 감독) ②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1982, 정진우 감독) ③ 그는 나에게 지타를

    -‘바보들의 행진’은 잘린 장면이 그렇게 많다면서요?

    “많죠. 응원하는 장면들은 사실 다 데모하는 장면이었어요. 수업하다가 영철이 병태에게 ‘나가자’고 하니까 병태가 ‘안 나간다’고 하는 신이 있어요. 원래 데모하러 가자는 건데, 다 잘리는 통에 응원 연습하러 놀러가자는 걸로 대사가 바뀌었어요.”

    -그 외에도 잘린 장면이 있나요?

    “많죠. 병태와 영철이 유치장 안에서 동대문을 향해 경례하는 장면이 있죠? 엿 먹으라면서. 그 신 다음에 구치소에 들어가서 슬로비디오로 아줌마들에게 농락당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것도 잘렸죠.”

    -그 장면은 왜 잘렸죠?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 그날 기분에 따라 자르곤 했으니까.”

    하길종만큼 검열에 몸서리친 영화인 없을 것이다. 한사군 시대를 배경으로 유신체제에 대해 은유적으로 비판을 가했던 ‘수절’은 검열로 20분이나 사라졌다. 하길종은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나 자신을 공개하는 것 같다’고 탄식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막 돌아온 촉망받는 수재였지만, 외부적 검열과 영화계 내부의 견제는 그를 심한 우울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그후 하길종은 1975년 7월18일 김호선, 이장호, 홍파, 이원세 감독과 평론가 변인식 등과 함께 ‘영상시대’를 결성, 누벨바그의 물결을 이 땅에 심기를 염원했다. 동시에 그는 검열관들과도 열심히 싸웠다. 재떨이에 얼굴이 찢겨나가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한마디로 토악질 나는 전쟁이었다.

    -영철을 연기하면서 영화가 사회 비판 의식을 갖는 동시에 시대를 상징한다는 점을 알게 됐나요?

    “그럼요. 시대 상황이 그랬으니까. 데모 때문에 한 학기에 두세 달 학교 다니면 많이 다닌 거였어요. 머리카락을 목숨처럼 아끼던 시절인데 끌고 가서 가운데를 밀어버리면, 그 기분은 정말….”

    -‘바보들의 행진’ 찍으면서 재미난 일화가 있다면 말씀해주시죠.

    “어느날 영화 찍다가 하 감독이 어딘가 끌려가서 머리카락 깎이고, 눈 밑이 찢긴 채 돌아온 적이 있어요. 아마도 유학 다녀오자마자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끌려갔던 것 같아요. 자세한 얘기는 안 해주셨어요. ‘맞고 온 걸 얘기하긴 싫다’면서 끝내 털어놓지 않으셨지요.”

    -그렇게 1975년에 영화로 데뷔했고 이 작품으로 영화평론가상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유일한 상이죠.”

    -첫 영화를 찍고 난 후 영화에 대한 느낌은 어땠습니까.

    “‘놀면서 영화를 해도 영화가 되는구나’고 생각했어요. 영화에 실생활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영화를 만만하게 본 거군요.

    “아니에요. 두 번째 작품부터는 만만하게 보지 않았어요. 최인호 감독의 ‘걷지 말고 뛰어라’와 하길종 감독의 ‘여자를 찾습니다’ 두 편을 찍었습니다. 하 감독이 최 감독에게 ‘너는 영화하지 마라. 괴물 같다’ 그랬지요. 그래서 그런지 최인호 감독은 ‘걷지 말고 뛰어라’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고는 감독을 다신 안 했죠.”

    대마초 파동으로 4년간 활동 금지

    1976년작 ‘걷지 말고 뛰어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 최인호가 자신의 원작소설을 직접 각색, 연출을 맡았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하길종이 대학시절 ‘괴물’로 통했다는 사실. 괴이하게 생긴 작업복이나 구제품 의상을 걸치고 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다니면서 말 끝마다 ‘쉬르리얼리즘’이란 단어를 인용해 동기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라 한다. 그런 그가 1970년대 청년 문화의 기수 최인호를 ‘괴물’이라 부른 것이다.

    -‘괴물 같다’는 게 무슨 뜻이었습니까.

    “최인호 감독이 너무 고민해서 괴물처럼 변해 있었어요. 머리도 안 깎고 씻지도 않고.”

    -하길종 감독의 ‘여자를 찾습니다’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지요.

    “글쎄요. 그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어요. ‘바보들의 행진’보다 줄거리가 탄탄했는데.”

    -‘여자를 찾습니다’에서 맡은 역할은요?

    “나팔수. 나팔 부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이 나팔수예요. 시골에서 올라와 어떻게든 서울에서 살아보겠다며 이것 저것 하는 놈이었어요.”

    -그렇게 영화를 찍으면서 1970년대를 보내셨군요.

    “그러다 대마초 파동이 일었어요. 사실 그 시절 대학 다니면서 대마초 한두 번 피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협회로 공문이 내려왔나 봅디다. 인기 있는 젊은 애들 중 몇 명 올려보내라고. 검찰청에서 우리 집으로 전화가 왔어요. 한번 보자고. 그런데 협회에서 보자고 하더군요. 협회에는 노인들이 앉아 있어서 젊은 배우들이 가지도 않았는데.”

    ‘무균질의 매력’ 하재영

    그 여름의 마지막 날 (1984, 이원세 감독)

    -배우협회 말씀이신가요?

    “네. 스카라극장 건너편에 있었지요. 협회에 들어가자 검은 점퍼 입은 남자가 나를 위원장실에 데리고 들어가더니 백지 한 장을 줬습니다. 백지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쓰라고 했어요. ‘학교 다닐 때 대마초 피우셨죠?’라고 묻길래 ‘에이, 그거 한두 번 피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을 그대로 적으라고 하더군요. 적지 말았어야 했는데, 바보처럼 ‘학교 뒷동산 어쩌고’ 하면서 다 적었어요. 지장을 찍으라고 해서 찍었더니 바로 수갑을 채웠습니다.

    이장호 감독 동생 이영호라고 있었어요. 그때 나랑 젊은 대학생 역할을 단골로 한 친구였어요. 그 친구도 오더라고요. 나와 똑같은 케이스였어요. 그 친구도 수갑을 차고 나와 함께 지프에 탔어요. 도쿄호텔 맞은편 여성복지회관 지하로 데리고 가더군요. 합동수사본부였어요.”

    -거기서 맞았나요?

    “학교 다닐 때 두 번 했다고 다 썼기 때문에 맞지 않았어요. 같이 연기했던 이영호, 이장호 감독, 지금은 디자이너인 하형수 등 줄줄이 끌려들어 왔어요. 우리는 아무 죄 없이, 단지 그 시대에 영화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붙들려 간 거예요. 4년 동안 활동을 못했어요. 1975년부터 1980년 2월까지. 4년이란 세월은 젊은 시절에는 참 큰 거지요.”

    -여성복지회관 지하 합동조사실에서 가수 신중현씨도 맞았다지요.

    “당시 보사부 장관 아들이 내 친구였어요. 그런데 그 친구도 붙들려왔다니까요. 그때 소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이 대마초 피우다 걸리자 박통이 봐주지 말라고 했다죠.

    합동조사실에서 같이 대마초 피운 사람으로 하길종 감독, 최인호 작가 둘만 대면 나가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스승을 불어요. 그래서 내가 ‘감독님들은 촬영할 때만 잠깐 뵙지 감히 얼굴도 똑바로 못 쳐다보는 분들’이라면서 군대 간 친구와 이민 간 친구 둘의 이름을 댔어요. 그랬더니 ‘이 새끼들은 잡아올 수 없으니까 안 된다’고 해요. 그런 식으로 한 사람이 두 명씩 대마초 피운 사람의 이름을 대면 피라미드가 되는 거죠. 겨울인데 낮에는 지저분한 파이프가 달린 변기에 앉혀놓고 밤에는 응암동 정신병원에서 잠을 재웠어요.”

    -며칠이나 그랬습니까?

    “보름 좀더 있었던 것 같아요. 구정 때 풀려났죠.”

    -4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이장호 감독은 명보극장 뒤에 있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도왔고, 나는 연극을 다시 하겠다며 오태석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연극을 하면서도 영화가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규제가 풀리기 한 해 전에 하길종 감독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초에 ‘병태와 영자’란 작품을 하길종 감독의 조감독을 하던 분과 함께 작업했습니다.”

    홀딱 벗고 ‘애마부인’ 촬영

    -1980년대 출연했던 유명한 작품이 ‘애마부인’(1982)입니다. 당시에는 굉장히 많은 베드신을 연기했습니다. 나영희, 이미숙, 안소영 등 당대 유명 여배우 모두 연기와 했었죠.

    “장미희씨와도 연기했는데, 남자배우를 참 편하게 해줬어요. 당시는 호스티스 영화가 유행이라 그런 역할 안 한 배우가 없죠.”

    -‘애마부인’에서 동엽 역을 맡았습니다. 여주인공이 기차에서 만나는 연하의 남자였지요. 엇갈렸다가 술집에서 조우한 뒤 시골에서 마지막으로 뜨거운 섹스를 나누죠. 함께 프랑스로 떠나기로 하고 동엽이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여주인공은 오지 않는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 후에는 1970년대처럼 당대의 청춘을 대표하는 역할보다는 따뜻하고 포근하게 여자를 감싸주는 역할을 많이 맡은 것 같습니다.

    “베드신 할 때는 감독이 다 벗어야 한다며 불을 끄고 스태프들은 다 나가라고 했어요. 저도 당황스러운데 여배우는 오죽했겠습니까. 하여튼 감독 이기는 배우 없다고, 그렇게 홀딱 벗고 찍었어요.”

    한국영화에서 ‘아내의 바람’이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돼왔다. 1960년대 이후 여성의 성(性)이나 혼외정사와 연관된 영화들이 모두 ‘자유부인’ ‘애마부인’ 등 부인 시리즈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정을 가진 여자의 바람 그 자체가 큰 구경거리였던 셈이다.

    교수 부인이 친구의 꾐에 빠져 젊은 대학생에게 춤을 배우고 술과 담배를 즐기며 친구 남편과 관계를 맺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었던 ‘자유부인’(1956)은 바람난 유부녀를 통해 한국전쟁 이후 변화한 사회상을 그려낸 작품으로 13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자유부인’의 흥행성공을 계기로 유한 부인들의 은밀한 일탈의 장소인 댄스홀을 허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남성 지식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속 자유부인들은 하나같이 가정을 버린 대가로 불행해지거나 벌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제작된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1966)는 유부녀와 연하 남자의 사랑을 그려내 ‘자유부인’의 뒤를 이었으나, 이 역시 권선징악형의 일부일처제 영화에 그치고 말았다.

    1970년대 뜸했던 불륜 소재 영화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산딸기’ ‘애마부인’ 등으로 다시 붐을 일으켰다. 이 영화들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가시화했지만 철저하게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구현하는 도구로 재현됨으로써 오히려 ‘자유부인’보다 퇴보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강제적으로 남자에게 몸을 빼앗기고, 모든 남자들이 여주인공만 보면 성욕을 느끼는 등 매우 획일화된 스토리와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화에는 사회적 맥락은커녕 불륜에 대한 응징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1982년작 ‘애마부인’은 부인시리즈의 결정판이었다. 중년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방황을 그린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안소영의 풍만한 가슴에 대한 신화는 다분히 제작사와 남성 관객의 욕망이 낳은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제목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애마부인’은 ‘愛馬婦人’이 아니라 ‘愛麻婦人’으로 개봉되었다. 성에 대한 검열이 이전보다 완화되어 성적 묘사는 더욱 직설적이었다. 섹슈얼 판타지가 아니라면 관심도 흥행도 없던 사회. 광주항쟁이 일어난 1980년대 한국영화의 현주소는 이랬다.

    발바닥 찢어져가며 영화 촬영

    -하재영씨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바로 1980년대에 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여자들에게 차이는 역할만 맡았을까요.

    “그런 역할을 많이 맡다보니까 익숙해지더군요. 다른 걸 보여주면 감독들이 나보다도 더 당황스러워해요. 그게 감당이 안 되니까 ‘다음에 보여주지’ 하면서 속에서 꺼낸 카드를 도로 집어넣게 되죠. 그렇게 길들여졌어요.”

    -하재영씨는 정말 운이 없습니다. 1975년 데뷔한 후 곧바로 4년간 활동이 금지됐습니다. 해금되자마자 한국영화는 암흑기에 접어들었고요.

    “팔자라고 생각해야죠.”

    -그렇죠. 난세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요즘 젊은 배우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영화가 참 잘 만들어지고, 잘되고 있는데요.

    “좋죠. 한국영화를 많이 보러 다니는 편입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 저런 영화를 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종종 해요. 그런데 영화는 나이 들어서 힘이 달리면 힘들어요. 그래도 좋은 영화를 보면 하고 싶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영화는 하명중 감독의 ‘X’입니다. 물이라는 핵심 이미지를 잘 살렸고, 주제적으로도 당시 발흥하던 신흥 자본과 섹스의 결합이 남녀주인공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표현했어요. 특히 풀밭에 있는 마네킹을 죽 비추다가 마네킹처럼 누워 있는 이미숙씨를 비추는 장면이 좋았습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처럼 농구공 없이 공놀이하는 장면도 좋고요. 주인공이 취직에 계속 실패해 좌절하는 장면은 오리고 오린 신문조각 더미가 바람에 좍 날리는 것으로 표현하죠. 굉장히 신선하고 모너니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 만든 영화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을까요. 영화사에서도 전혀 언급 되지 않고요.

    “콜보이와 콜걸이 콜택시 탄다고 해서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배우가 감독을 했다고 해서 좋게 봐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흥행에도 성공하지 못했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영화였지만요. 그런데 ‘X’를 찍으면서 배우들은 참 괴로웠습니다. 촬영기사가 그 유명한 고(故) 유영길씨 였거든요.”

    -그래서 영상이 좋았군요.

    “그 양반이 굉장히 신경질적이었어요. 하명중 감독과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낀 배우들만 힘들었죠.”

    -하재영씨 작품 중에선 ‘바보들의 행진’이 제일 수작이네요.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 정진우 감독의 1983년 작품인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를 찍으면서는 발바닥이 다 찢어졌을 정도로 고생했어요. 또 첫 번째 동시녹음이라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나영희씨가 은주 역으로 나옵니다. 은주는 고등어 한 마리 값에 몸을 팔 정도로 막장까지 간 창녀지요. 흑산도로 몸을 팔러 온 은주를 하재영씨가 사랑하죠. 사실 이 영화는 당시 유행했던 호스티스물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 있죠. 나영희씨는 이 영화로 무슨 상을 받았어요. 정진우 감독이 상을 주지 않겠다는 사람들과 싸워서 거의 빼앗아오다시피 했죠.”

    -정진우 감독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성격이 대단하신 분인데.

    “늘 킁킁거려요. 코가 막히는지. 그러나 생김새에 비해 굉장히 섬세한 분입니다. 디테일도 아주 잘 잡고….”

    정진우 감독은 1963년 ‘외아들’로 감독 데뷔했다. ‘외아들’은 가난한 어촌을 배경으로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외아들이 성공하기까지의 피나는 역정과 어머니의 강인함 등을 엮은 멜로물이다. 최무룡, 김지미, 황정순이 주연을 맡아 크게 히트했다. 이후 정 감독은 ‘배신’이나 ‘초우’ ‘목마른 나무들’ 등 멜로, 액션, 전쟁 영화를 두루 만들며 상업감독으로서 발판을 굳혔다. 1980년대에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는 몸으로 울었다’ 등 토속 에로물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영화사 ‘우진필름’과 극장 ‘시네하우스’를 경영하기도 했다.

    -1980년대 이후 정신없이 영화를 찍었어요. 그런데 그 영화들은 지금 보기 정말 괴롭습니다. 무술영화 ‘단’, 이두용 감독의 ‘뽕2’ ‘뜨거운 바다’ ‘애마부인’ ‘이별 아닌 이별’…. 심지어는 ‘성애의 여행’ ‘서울 야누스’ 등등.

    “다 별 볼일 없는 영화죠.”

    -감독이 누구인지 알면 ‘이 영화 찍으면 안 되겠다’라든가 ‘이 영화는 앞으로 별 볼일 없다’는 판단을 했을 텐데요.

    “나는 스스로에 대한 관리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위안일지 몰라도 이것저것 다 해본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해요. 그 시절에 CF 모델 하려고 벗는 영화는 안 하겠다고 했다면 배우가 아니라 사업가라는 얘기를 들었을 겁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영화는 가끔 찍고 드라마에 많이 출연했습니다.

    “영화는 거의 안 했어요.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황인뢰, 주찬옥 콤비의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이유’라는 드라마를 하셨습니다.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다운 드라마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동네 깡패대장을 맡았죠. 황인뢰 감독 작품을 많이 했습니다. 행운아였죠. 좋은 감독에게 캐스팅됐으니까. ‘여름 향기’의 윤석호 감독처럼 영상미를 추구하는 요즘 감독들은 황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재영씨는 느린 사람입니다. 상처를 받지만 내색은 잘 않는. 하재영씨가 맡은 역할은 모두 도시와는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결국 바다로 가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연 친화적인 배우, 물이라는 원형으로 되돌아가는 남자랄까. 만약 지금 시대에 다시 영화배우를 시작한다면 한석규씨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 같습니다. 한 명의 배우가 일관된 공통점을 갖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재영씨에게는 감독들로 하여금 바다로 가서 죽거나 바다로 회귀하는 인물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원형적인 본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바다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있다면요.

    “글쎄요. TV 드라마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한두 달 지나면 잊어버려요. 영화처럼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아요. 희한하죠.”

    -영화와 연극, TV드라마 통틀어 가장 애착이 가고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요.

    “이제는 연극을 하고 싶습니다. 코미디 연극 한편 해보고 싶어요. 아까 나보고 운이 없다고 하셨지만, 어영부영 이것저것 다 해봤으니까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상을 못 타서 그렇지요.”

    -상 받은 적 없나요?

    “받을 뻔했어요. 이원세 감독의 ‘실종’으로 대종상 주연상을 받게 된다고 아침에 카메라 리허설까지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턱시도 입고 나가려고 하는데, 친하게 지내던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야, 주연배우상 바뀌었대’ 그래요. 안기부에서 밀어서 다른 배우가 타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 후로는 상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았어요.”

    -‘실종’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았습니까.

    “데모하다 학교에서 잘리고 빈둥거리는 대학생 역이었습니다. 일본에 삼촌이 있어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일본 조총련에 포섭되어 이북에 들어가 대남 방송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후 바다를 통해 남한으로 내려오려고 애쓰다 교수형을 당하죠.

    -역시 체제에 희생당하고 좌절하는 무기력한 역할이었습니다. 적응하지 못하고 또 바다로 탈출을 감행하는 역할, 그게 하재영씨의 원형질인가 봅니다.

    “글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가장 잊지 못할 감독이 누굽니까. 또 자신을 배우로서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하길종 감독을 잊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평가하라면, 글쎄요. 그저 영화가 좋아서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해왔지요.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는 한 시대를 대표했다’는 그런 자부심도 있어요. 하지만 한창 영화를 할 때는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진 않습니다.”

    -영화 외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결혼은 누구랑 하셨습니까?

    “여자와 했죠. 발레 하던 친구였어요. 엄지발가락 발톱 두 개를 모두 수술해서 빼내는 바람에 발레를 더 이상 못하고 사범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런데 교생 실습까지만 나가고 교단에 한번도 서보지 못한 채 나와 결혼했죠.”

    -어떻게 만났습니까?

    “연극 ‘춘풍의 처’를 할 때 만났습니다.”

    -관객과 결혼하신 셈이네요.

    “우리 극단에 아내의 서울예고 후배가 있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났죠. 한 5년 연애했어요.”

    -여행을 좋아하신다면서요?

    “예전에는 돈 좀 들어오면 짐 싸가지고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여행다니곤 했어요. 그래서 돈 모아놓은 거라곤 집 한 채 말고는 없어요.”

    -작년에는 미국으로 훌쩍 이민을 갔었죠.

    “미국을 좋아해요. 나이 오십이 넘어서 새로운 곳에 가니까 젊을 때의 에너지가 용솟음 치더라고요.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햇볕 내리쬐는 사막에 있는 게 즐거웠어요.”

    -‘천국의 계단’ 후속작은 안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나요.

    “네. 정해진 스케줄 없이 잡히는 대로.”

    -여유로우시네요.

    “미국에서도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요. 윗동서가 미국 백화점에서 구두가게를 20군데 정도 운영해요. 그중 가게 하나를 맡았어요. 팔린 상품을 차에 싣고 20군데 정도에 배달해요. 나는 단순해서 머리 쓰는 걸 싫어하거든요. 배우 안 했으면 운전사가 됐을 거예요. 어릴 때 꿈이 소방차 운전사였어요.”

    뜨거운 사막에서의 운전이 삶의 낙

    -요즘 서울에서는 촬영이 끝나면 뭘 하십니까. 아내도 없고 아이들도 없는데.

    “방에 드러누워 예전에 못 보고 재놨던 영화들을 다시 꺼내 봐요. 그러다 어디 지방에서 ‘요즘 과메기 철이다’라고 하면 내려가서 과메기 한 박스씩 사다가 혼자서 멍하니 소주 한잔하지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침잠이 없어요. 일찍 일어나서 동네 한바퀴 돌고 회 좀 더 먹으면서 한잔 더 하고…. 지방마다 유서 깊은 곳이 있잖아요. 젊을 때는 촬영만 했지 구경을 못 했으니까 한바퀴 둘러봐요. 그러다 촬영 있다고 몇 시까지 나오라고 연락 오면 시간 맞춰 나갑니다.”

    -한량이시네요.

    “젊을 때부터 그렇게 살았어요.”



    -신성일씨를 만났을 땐 여자를 참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배우와의 베드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즐기시더군요. 배우마다 낙이 있습니다. 하재영씨는 그게 술인가요?

    “아니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아요. 그냥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은 거지. 내 낙은 운전하는 거예요. 막막한 사막에서 뜨거운 열을 받으면서 운전을 하면 묘한 기분이 느껴져요. 다시 젊어진 것 같은. 앞으로도 쭈욱 그렇게 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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