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의회민주주의 승리’ vs ‘제2의 6월항쟁’… 보혁갈등 기폭제 되나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4-03-26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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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회민주주의 승리’ vs ‘제2의 6월항쟁’… 보혁갈등 기폭제 되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된 3월12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 보수단체 회원들.

    3월12일 회사원 김모(38·서울 망원동)씨는 세 번 혼돈에 빠졌다. 이날 밤 11시30분 야근을 마친 뒤 차를 몰고 퇴근하던 그는 마포구 공덕동네거리를 지나는 순간 쏜살같이 불법 U턴을 하는 차량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평소 평일 심야에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차량들을 종종 봐왔던 그로선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 이날 따라 과속차량 역시 유난스레 많이 눈에 띄었다.

    김씨는 문득 이런 혼란스러움이 이날 전격적으로 이뤄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과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날 오전 11시40분쯤 직장동료들과 이른 점심식사를 하러 간 식당에서 “TV 좀 켜달라”고 하자 “아침부터 뭐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겠느냐”는 주인아주머니의 천연덕스런 대꾸에 잠시 뜨악해했던 일, ‘설마 통과야 되겠느냐’며 무심히 바라보던 TV화면에 ‘탄핵안 가결’이란 문구가 선명히 떠오르던 에피소드 등이 묘하게도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3월12일, 하루가 길게만 느껴지면서 혼돈을 경험한 이가 비단 김씨뿐일까.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발의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진통 끝에 가결된 직후부터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졌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등 이른바 친노(親盧)단체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들까지 ‘탄핵 반대’ 대열에 일제히 합류해 거리로 나선 데 이어 보수단체들도 그들대로 공동대응을 모색하면서 민심이 요동치고 있는 것.

    아노미 상태에 빠진 대한민국

    3월13일 오후 6시15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 양방향 차로를 경찰이 전면 통제한 가운데 ‘근조 국회’ ‘탄핵 무효’라고 적힌 붉은색 리본을 단 시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집회 참가인원은 7만여명. 발디딜 틈조차 없이 빽빽한 인파 속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 범국민대회’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더불어 시작됐다.



    집회는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른 진행요원과 자원봉사자들의 질서유지 노력으로 시종 평화로운 분위기이긴 했지만 사뭇 비장감이 감돌았다. 집회참가단체들의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시민단체 소속의 연사들이 연단에 등장할 때마다 시민들은 “탄핵 무효!” “민주 수호!”를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집회장엔 ‘헌법재판장 할아버지, 대통령 아저씨 혼내지 마세요-일반시민 가족이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힌 애교 섞인 피켓도 눈에 띄긴 했지만, 탄핵안 가결에 찬성한 국회의원 193명을 빗댄 ‘집 나간 193마리의 미친개를 찾습니다’등 비판의 수위가 높은 피켓이 대다수였다.

    “탄핵안 가결은 박정희, 전두환에 이은 세 번째 (의회) 쿠데타다” “4월15일은 한·민(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장례식날” “4월15일은 쓰레기(탄핵안 가결 참여 의원들) 분리수거의 날” “대한민국이 193명만의 나라인가” “전국민이 똘똘 뭉쳐 수구꼴통 박살내자” “딴나라당과 미친당을 박살내자” 등의 자극적 구호들도 터져나와 성난 민심을 대변했다. 참가자들은 전날의 여의도 집회에 이어 ‘탄핵 무효 모금함’을 돌려 집회 기금을 모았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집회군중은 더 불어나 촛불 수만 개가 광화문에서 종각역까지 뒤덮었다. 집회 참가자들도 가족, 직장인, 노인, 대학생, 고교생 등 다양했다.

    부인과 함께 이날 집회에 참가한 양혁철(43·연극연출가·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씨는 “1987년 6월항쟁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이번 탄핵정국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당시의 항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온 것 아니냐”며 “집회 참가자들 대다수가 자발적 의지에서 모였다. 탄핵무효는 당연한 주장이며 앞으로도 ‘제2의 6월항쟁’에 계속 참가할 것”이라 말했다.

    네 살바기 딸을 데리고 집회에 참가한 김종빈(37)씨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민심은 생각지 않고 탄핵안을 가결한 부패 정치인들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어 집을 나섰다”고 밝혔다.

    연인 사이인 듯한 한 20대 커플은 “역사적 순간에, 훗날 교과서에 나올 그날의 현장에 함께 있고 싶었다”며 연신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어대기도 했다.

    이날 촛불집회의 주최측은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 준비모임(이하 범국민행동(준))’.

    참여연대, 민주노총, 민언련, 한총련 등 전국 551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범국민행동(준)은 이날 오전 11시 서울YMCA 강당에서 비공개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탄핵 무효 때까지 전국 동시다발 촛불집회 개최 ▲탄핵 무효 1000만명 서명운동 ▲‘근조 국회’ 리본 달기 등 실천지침과 함께 3월20일 서울 광화문에서 1차 대중집회를 갖기로 결의한 터였다. 범국민행동(준)은 또 ‘탄핵안 가결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헌법재판소는 탄핵안이 무효임을 신속히 결정할 것’을 요지로 하는 시국선언문도 발표했다.

    그러나 범국민행동(준)은 노사모 등 친노단체들과는 애써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범국민행동 참가단체에 정당 및 그와 연관된 단체들은 물론 노사모의 참가마저 배제했기 때문이다.

    범국민행동의 조직구성을 맡은 환경운동연합 서주원 사무총장은 “민주질서를 해친 탄핵안 가결에 대한 국민적 비판여론은 노무현 대통령이나 여당에 대한 지지와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며 “범국민행동을 노사모와 함께 움직이는 조직으로 오도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국민들의 순수한 자발적 조직인 만큼 친노-반노의 이분법적 틀에 끼워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3월7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과 국회 앞에서 줄곧 탄핵 반대 시위를 벌였던 노사모측도 마찬가지다. 노사모 사무국의 한 관계자는 “3월13일 하루만 해도 미국·일본 방송사 등 외신을 포함해 약 60개 언론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노사모는 탄핵 국면이 종료될 때까지 아무런 사업도 만들지 않을 계획”이라며 “지난 2월 한달 내내 노사모가 조류독감에 따른 ‘닭 먹기’ 캠페인을 전개했는데 언론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한낱 인터넷 게시판에 불과한 ‘국민참여 0415’를 일부 언론은 실체가 있는 또 하나의 단일조직으로 보도하는 등 신뢰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냈다.

    노사모 심우재 회장 역시 3월13일 노사모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회원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에서 ‘이제 노무현은 우리 노사모가 아니라 국민의 손으로, 마음으로 넘어갔다. 노사모도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나라당, 민주당, 수구언론들이 국민의 열화와 같은 분노의 함성을 노사모만의 극렬 집회로 보도하고 있다. 노사모의 상징을 접고 거리로 나가달라’는 요지의 메시지를 밝혔다. 그러나 실제 집회현장에선 주최측만 다를 뿐 한목소리로 ‘탄핵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맞불 지피는 보수진영

    이와 대조적으로 탄핵안 가결을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하는 보수단체들의 분위기는 ‘정중동(靜中動)’으로 요약된다. 3월12일까지만 해도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에서 탄핵 촉구 집회를 열었던 보수단체들은 탄핵안 통과 이후 일절 집회를 갖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잠잠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언제든지 ‘액션’을 취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어 참여정부 출범 이후 줄곧 첨예한 대립을 보여온 보혁(保革)갈등의 분수령이 될 조짐마저 엿보인다.

    자유시민연대 김구부 사무총장은 “방송에서 탄핵 반대 집회 소식을 마치 ‘붉은악마’ 생중계하듯 내보내고 있지만, 우리까지 나서면 혼란을 부채질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친노세력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할 것”이라 말했다.

    이를 방증하듯, 보수단체들로 구성된 ‘노무현 대통령 탄핵촉구 국민연대’(공동대표 박찬성·북핵저지시민연대 대표)는 3월13일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시국 기자회견을 갖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연 것”이라며 노 대통령의 조속한 사임을 촉구하는 대규모 구국기도회 및 캠페인을 벌여나가는 등 여론몰이에 나설 방침임을 밝혔다.

    흥미로운 사실은 보수단체들이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의 당위성을 북한 인권문제와 결부시킨다는 점이다. 인터넷 ‘독립신문’ 신혜식 대표는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지만, 야당이 적시한 선거법 위반, 권력형 부정부패, 국정 혼란 및 경제 파탄의 3가지 탄핵소추 사유로는 미흡하다. 북한 인권을 외면한 노 대통령의 친북정책에 관한 문제도 덧붙여야 했다”며 “현재 노 대통령의 선거 개입에 대해 별 문제 없다는 방송보도가 이어지는데 헌법재판소는 잘못된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2002년 대선 결과와 관련,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대법원에 선거무효소송을 제기해 지난 2월2일 9차 심리까지 마친 ‘주권찾기시민모임’(주시모)도 선고를 기다리며 ‘부정선거 심판=국민의 소송’이라 외치고 있다. 주시모 이기권 대표는 “병풍(兵風) 조작사건, 이회창 후보 20만달러 수수설, 기양건설 10억 제공설 등이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지지 않았느냐”며 “탄핵도 탄핵이지만, 지난 대선이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이 곧 드러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탄핵 찬반을 둘러싼 민심의 극명한 충돌이 자칫 ‘감성과잉의 이분법적 대결구도’로 흐를 경우 4·15총선이 지난 대선에 이어 또다시 국민들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길 이념쟁투의 결정판이 될 우려가 높다는 데 있다.

    사회의 균형을 지탱하는 것은 보수와 진보의 양대 축이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남짓한 동안 대북(對北)·대미(對美) 관계를 비롯해 교육·환경·노동 등 거의 사회 전분야에서 빚어진 이념논쟁은 사상 유례없는 심각한 갈등을 낳았다. 이는 물론 참여정부 탄생이 당시까지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던 보수세력의 위기감을 높인 일대 사건이라는 ‘태생적’ 측면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번 탄핵정국으로 4·15총선이 한국 정치권의 진정한 이념적 분화 가능성을 가늠해줄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엔 역부족이 돼버린 상태다.

    ‘의회민주주의 승리’ vs ‘제2의 6월항쟁’… 보혁갈등 기폭제 되나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고 있는 노사모 등 친노단체 회원들.

    이와 관련해 탄핵소추를 당한 노 대통령과 탄핵안을 가결한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동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열린우리당을 ‘건전한 보수정당’으로 평가해온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선대본부장은 “민노당의 입장은 탄핵안 가결 자체는 잘못됐지만, 총선 올인 전략 등 노 대통령의 과도한 선거 개입에도 분명 책임이 있다는 것”이라며 “3월13일 광화문 집회에서 ‘국민들은 대통령 탄핵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식의 구호도 나오던데, 이는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발상이자 노 대통령에 대한 냉정한 비판의식의 실종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책선거’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까지 선거에서 불리한 자신들의 처지를 전환해보려는 정략적 의도에서 탄핵정국을 활용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탄핵안 통과 이전인 3월11일 기자회견에서의 노 대통령의 미흡한 사과는 ‘미필적 고의’ 혐의가 짙다”며 “얼마전 열린우리당의 모 의원을 만났는데, ‘이번 총선을 실미도 분위기로 끌고 가겠다’고 귀띔했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처럼 열린우리당이 세몰이를 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고 덧붙였다. 지난 대선 때 노사모 덕을 톡톡히 본 경험을 바탕으로 열린우리당이 ‘철학 없는 이미지 정치’ ‘고뇌하지 않는 이벤트 정치’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탄핵정국으로 인해 4·15총선에서 지역주의가 다시 고개를 쳐들 것인지 여부도 주목된다. 당초 이번 총선은 지역주의 타파의 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탄핵안 가결 이후의 상황은 점치기 어려운 상태다.

    특히 여러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대구지역의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 찬성 비율이 30%대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오자 이를 곱잖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네티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현지 분위기는 다르다는 게 시민들의 얘기다.

    대구시민 김헌덕(38·회사원)씨는 “대구의 탄핵안 가결 찬성 비율이 높다고는 하지만, 지역언론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번 탄핵 사태 이후 한나라당 지지도가 17.2%로 지난 2월의 30.4%에서 13.2%포인트 급락했고, 열린우리당 지지도는 17.2%로 4.3%포인트나 올랐다”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던 직장동료 상당수가 4·15총선에서 반드시 투표를 하되 한나라당을 찍지 않겠다는 말들을 공공연히 내뱉고 있다”고 귀띔했다.

    탄핵의 파장은 복잡미묘하게 번져가고 있다. 탄핵정국을 맞아 둘로 쪼개진 민심(民心), 과연 어느 쪽이 천심(天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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