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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 ③

20세기 풍미한 영웅대망론

박정희는 왜 나폴레옹을 숭배했나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icnunc@nate.com

20세기 풍미한 영웅대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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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 시기의 ‘가난하고 못난 나’는 민족과 동일시된다. ‘우리는 패배한 민족이며 가난하고 못난 민족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처럼 일어서야 한다.’ 이것이 지난 100년을 규정하는 한국인의 결정적인 정서이자 생각이었다.
20세기 풍미한 영웅대망론

제7대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가 숭배했던 나폴레옹의 초상화.

넘버2와 넘버3의 세력 다툼, 이른바 영역 쟁탈전 또는 충성 경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툼은 총격전이 되고 말았는데, 그 와중에 넘버1이 저녁 먹고 시바스리걸 위스키를 홀짝대다 말고 총을 여러 방 맞는다. 결국 넘버1은 젊은 여가수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영화의 한 장면임에 틀림없을 듯한 이런 종류의 대단한 임종은 아무나 맞는 게 아니다. 조폭 두목쯤 되면 혹 모를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이렇게 죽기란 무척 어렵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죽고 싶어도 잘 안 된다. 일단 부하직원들이 권총을 찬 채 회식 자리에 들락거리는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한 국가의 넘버1, 즉 대통령이나 수상이 이렇게 죽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물론 국가 지도자들도 가끔은 테러리스트나 정신이상자의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넘버2나 넘버3인 총리, 여당 당수, 국방장관는 평소에는 권총을 휴대하지 않는다(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소지품 검사를 안 해봤으니 내가 어찌 알겠는가?)

아무튼 자기가 키운 부하에게 32구경 총알로 확인사살까지 당하고 여가수의 품에서 영영 밥숟가락을 놓은 넘버1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다. 박정희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비록 감옥을 다녀온 일은 있지만 대략 천수를 누릴 것 같다.

박정희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과대평가하려는 어이없고도 음험한 시도와 무관하게, 약간만 깊이 들여다보면 박정희의 삶과 생각은 한껏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민족주의자였지만 일본군 장교였고, 좌익이었다가 파시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청렴한 듯했지만 일찍부터 출세와 권력을 밝혔고, 웅대한 포부를 가진 듯했지만 내성적인 좀팽이였고, 지도자였지만 열등감에 가득 차 있었다.



꽤나 복잡한 생의 앞자락을 들여다보니 나폴레옹과 이순신이라는 만고(萬古) 영웅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독재자 박정희가 청년시절부터 숭배하고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들, 나폴레옹과 이순신이었던 것이다.

영웅과의 동일시

어린 박정희는 영웅 숭배심에 불타는 소년이었다(박정희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기훈 ‘일제하 식민지 사범교육-대구사범학교를 중심으로’ 등이 실린 역사문제연구소 편 역사문제연구 제9호 2002년 특집 ‘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시대’와 ‘박정희 전기’가 수록된 조갑제 씨의 개인홈페이지를 주로 참고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시절, 전체적으로 성적이 나빴다. 특히 수학·과학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역사 과목만은 성적이 좋았는데 특히 서양 영웅 전기 읽기를 좋아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플루타르크 영웅전’ ‘나폴레옹 전기’가 그것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나폴레옹 전기’를 가장 열심히 읽었다. 소 꼴을 먹이면서도 읽었을 만큼 경북 벽지 출신 소년 박정희는 영웅 나폴레옹처럼 되고 싶었다.

“코르시카의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나 군대에 들어간 이름 없는 시골청년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로웠습니다. 눈보라 치는 알프스 산맥을 백마를 타고 넘을 때의 모습! 정희 소년은 이 세상에 이같이 멋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감탄했습니다.”(김종신 ‘박정희 대통령-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조갑제씨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박정희의 나폴레옹 숭배에는 가히 사이코적이라 할 만한 면이 있었다. 사범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고 졸업 후 문경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도 하숙집 책상 위에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학교 숙직실에까지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였다 한다. 박정희는 나폴레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나폴레옹 숭배를 그의 개인적 성향이나 전기적 사실과 연관시킬 만한 근거는 많다. 나폴레옹에 결부된 상식적인 이미지를 박정희의 캐릭터와 결부시켜보자. 한 예로 ‘키가 작고 열등감에 가득 차 있으며 야심을 내성적인 태도 속에 숨기고 있는 시골 출신’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을 가진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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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icnunc@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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