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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⑤­|삼도봉에서 작점고개까지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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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은 찾아왔건만 백두대간 어귀마다 겨울이 숨어 있다. 눈 녹은 질퍽한 계곡을 어렵사리 뒤돌아서니 한 겨울에나 있을 법한 눈밭과 얼음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계절이 거꾸로 가나? 100년 만에 3월 폭설이라니. 하얗게 눈 덮인 산중에 소나무가 더욱 푸르다.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한국은 산림녹화의 모범국으로 불린다.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국토 위에 광활한 숲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제3세계에 조림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숲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거진 숲은 있되, 가꿔진 삼림은 적기 때문일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해마다 식목일이면 국가적으로 나무를 심지만 삼림이 자원으로 활용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한국의 숲이 이른바 ‘녹색댐’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녹색댐이란 산림이 빗물을 저장했다가 서서히 흘려보내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숲이 녹색댐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홍수와 가뭄을 예방할 수 있고 나아가 수질까지 개선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혹자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한국은 여름철 집중호우가 잦기 때문에 녹색댐이 발달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주장이다. 집중호우가 녹색댐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녹색댐은 강수량보다 조림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즉 잘 가꾼 숲일수록 토양이 빗물을 많이 흡수하고, 나무가 수분을 적게 소비한다는 얘기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우리의 삼림이 침엽수 일색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생태계의 천이(遷移) 과정을 고려할 때, 시간이 갈수록 침엽수가 증가하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침엽수 일색의 숲이라도 가지치기와 간벌을 해주면 활엽수림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다. 활엽수가 침엽수보다 수분저장량이 많다는 점에서 조림사업이야말로 녹색댐을 만드는 지름길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IMF 직후인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노숙자와 실업자 등 연인원 1000만여명을 삼림녹화 공공사업에 투입한 일이 있다.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고용문제와 환경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정책이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속성이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산림은 녹색댐과는 너무나 먼 길을 가고 있다.

2월21일 아침 6시30분.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수원역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기차는 충북 옥천역에 정차해 있었다. 전라도의 지붕이 무주·진안·장수라면, 충청도의 지붕은 보은·옥천·영동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보은·옥천·영동을 가리켜 ‘충북 남도3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산지가 많고 백두대간이 지난다는 점에서는 전라도의 무진장과 닮았다.

물한리 가는 길목에서



오전 10시.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영동역에서 택시를 타고 대간에 붙기로 했다. 영동에서 황간쪽으로 10여분쯤 달리다 보면 도로 왼편으로 낯익은 터널이 하나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노근리 쌍굴다리다. 노근리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미군이 민간인 300여명(추정)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현장으로, 이 사건은 1994년 ‘말’지와 1999년 AP통신 보도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AP통신 보도 이후 미국은 2000년 18명의 자문위원단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사건의 전모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쌍굴다리에서 대곡면을 지나 상촌면으로 가는 길목 양옆으로 포도밭이 길게 이어졌다. 평야가 많지 않은 영동지방에서 과수농업은 중요한 생계수단이다. 경작지의 80%가 과수원이고, 이 가운데 포도 재배 농원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때문에 최근 영동지역의 민심은 흉흉하다. FTA 협정이 타결되면서 포도농가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탓이다. FTA 얘기가 나오자 포도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택시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먹고 살 게 없어요. 영동포도가 품질이 좋다지만 기껏해야 두세 달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칠레산 포도는 저장성이 뛰어나 1년 내내 출하된다는군요. 도시 사람들은 FTA를 찬성한다고 하는데, 농민도 먹고 살 길을 만들어줘야 할 거 아닙니까.”

농민들이 들으면 속상할 일이지만, 영동의 과수원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특히 복숭아 농장이 일품인데, 초여름 이곳을 지나노라면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바람에 복숭아 꽃잎이 날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과수원을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夢(몽)’이 떠오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이제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 같다. FTA의 상처를 모른다면 모를까, 농민의 멍든 마음을 알고서야 어찌 한가롭게 영동의 복숭아밭을 드나들 수 있을 것인가.

택시가 상촌면 시내로 들어섰다. 5일장이 서는 날이라 그런지 가뜩이나 좁은 길이 북적거렸다. 이곳 상촌면은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가 촬영된 현장으로 유명하다. 2002년 개봉돼 전국적으로 ‘할머니 열풍’을 일으켰던 이 영화에서 상촌면의 5일장 모습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벙어리 할머니가 철부지 손자에게 운동화와 자장면을 사주면서 자신은 물만 마시는 장면, 할머니가 구멍가게의 병든 친구를 찾아가 초코파이를 산 뒤 산나물을 내놓는 장면, 할머니가 손자만 버스에 태워 보내고 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혼자서 걸어오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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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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