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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⑤­|삼도봉에서 작점고개까지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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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한리 계곡에서 아침을 먹으려 했으나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구멍가게를 찾아가니 주인장이 콩을 섞은 밥과 김치로 아침을 차려냈다. “산에서 점심을 드셔야 할 것 같구만” 하며 점심도시락까지 챙겨주었다. 두 끼 비용이 고작 2000원. 더 내고 싶었지만 주인은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필자가 고마움을 표하며 “주말인 데도 사람이 없네요?”라고 묻자, 주인 아저씨는 “장사가 안 되는 건 걱정이지만, 우리 동네 산(민주지산)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산도 좀 쉬어가면서 살아야죠”라고 대꾸했다.

물한리에서 삼도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는 눈이 모두 녹아 질퍽했으나, 계곡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이 코스는 길이 넓고 경사가 완만해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얼마 전부터 이곳에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도봉 안부에서 숨을 고르며 3주 전 빼재-삼도봉 구간을 함께 타다가 이곳에서 헤어진 부산아저씨를 떠올렸다. 그는 본래 산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찾아간 지리산 산장에서 산꾼들의 무용담을 듣다가 갑자기 우리나라의 높은 산을 모두 밟아보고 싶은 객기가 발동해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고 말했었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면 무슨 일이든 자신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프 승용차도 새로 장만했다고 했다. 그런 열정이라면, 산속에서 용기 이상의 그 무엇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삼도봉에서 1123m봉으로 가는 코스는 아담한 오솔길이다. 갈대와 철쭉, 잡목더미와 싸리나무 덩굴을 차례로 지나야 한다. 눈이 쌓였더라면 꽤나 고생스런 구간이었겠지만, 이미 눈은 녹은 상태라 산악마라톤을 하듯이 가볍게 뛰어갈 수 있었다. 1123m봉 앞에서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필자는 비구름과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방수용 파카와 배낭 커버로 중무장을 하면 비가 그치고, 옷을 벗고 단출하게 차림을 바꾸면 비가 쏟아졌다.

밀목재를 지나면서부터는 눈이 녹지 않은 응달이 나타났다. 같은 산속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눈이 많았다. 필자는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발자국에 발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지뢰가 없는 안전지대만 밟으며 적진으로 침투하는 군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눈길을 통과하자 이번엔 가파른 오르막이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20여분을 씨름하고 나서야 1175m봉에 올라섰다. 흐린 날씨 탓에 조망은 신통치 않았으나, 연신 얼굴을 때리는 상큼한 비바람이 나그네의 피로를 깨끗이 풀어주었다.



1175m봉에서 화주봉(1207m)으로 가려면 가파른 내리막을 통과해야 한다. 백두대간 안내책자에는 이곳이 ‘위험지대’로 표시돼 있는데, 경사가 워낙 급해 밧줄을 타고 내려서야 한다.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한 발짝씩 아래로 내딛다가 어딘가 모르게 밧줄이 불안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밧줄을 놓고 팔과 다리를 모두 쓰는 삼지법으로 기어서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눈이 거의 녹았기에 망정이지 한겨울이었다면 빙판 때문에 단단히 고생했을 터였다. 화주봉으로 가는 길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로 편안한 능선이다. 화주봉 정상에 이르자 40대 초반의 산꾼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새벽부터 대간을 탔는데, 선두에서 달리다 꼴찌로 처졌다고 했다. 길을 잘못 들어 헛걸음을 한 탓이다. 세상이치가 그렇듯이 헛수고를 하면 기운이 빠지게 마련이다.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산악회의 선두를 이끌었을 그였으나, 지친 산꾼은 천천히 걷는 필자를 따라잡기에 바빴다.

雨中山行에 大醉하다

화주봉에서 1시간 정도 걸어가니 우두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두령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먼저 도착한 산악회 대원 1명이 서울아저씨를 찾기 위해 대간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오후 3시30분.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경북 김천시 구성면의 경계인 우두령 정상에 섰다. 우두령 고개에서 잠시 산행을 계속할 것인가 말것인가 고민하다가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된 한일전 축구경기를 보고 싶어서였다. 산악회 사람들의 배려로 면소재지까지 관광버스를 타고 나와 허름한 다방의 TV 앞에 앉았다. 소주의 유혹도, 서울행 차편도 모두 마다하고 축구경기에 집중했다. 0대2. 한국은 후반에만 두 골을 먹고 완패했다.

밤새 비가 내렸다. 필자는 상촌면의 하나뿐인 여인숙에 묵었는데 조립식으로 지은 건물이라서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새벽녘엔 천둥까지 치는 바람에 잠을 청하지 못했다. 잠을 자지 못할 바엔 걷는 게 낫겠다 싶어 해가 뜨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우두령으로 향했다. 랜턴을 비추며 절개지를 오르는데 진흙이 자꾸 흘러내려왔다. 스틱을 꺼내 짚어보았지만 빗줄기가 워낙 거세 별 효과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표지마저 드물어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애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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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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