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1500년 전으로 떠나는 여로 충남 공주·부여

영화와 비애 함께 품은 ‘百濟風’의 도도한 유혹

  • 글: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사진: 김성남 기자 photo7@donga.com

    입력2004-03-30 19: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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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새벽녘, 부여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 앞에 섰다. 언뜻 보기엔 소박하지만 요모조모 살펴볼수록 세련된 백제풍(百濟風)에 혹해 연신 마른침을 삼켜대고 있자니 어느 결에 해가 떠오른다. 여명을 안고 눈부시게 빛나는 석탑 뒤로 화려했던 고대 왕국의 대도읍이 위용을 드러낸다.
    1500년 전으로 떠나는 여로 충남 공주·부여

    여명을 등지고 우뚝 선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영화 ‘황산벌’의 마지막 장면에서 전투에 패한 백제의 계백은 신라의 김유신 앞에서 참수를 당한다. 삼국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사투리를 썼을 거라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황산벌’이 단순한 코미디 영화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백제의 최후가 이처럼 비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중원을 호령하던 고구려,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신라에 비하면 백제는 상대적으로 ‘잊혀진 제국’에 가깝다. 해토머리 봄 기운이 제법 풍겨나던 2월말 백제의 고도(古都) 공주와 부여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불현듯 ‘황산벌’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라 가슴 한 끝이 아려왔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탄 지 2시간여 만에 공주에 닿았다. 공주는 백제 문주왕 원년(475)부터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당시 이름은 웅진성. 공주 시내로 들어서자 예로부터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으며 숱한 문필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금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공주의 백제 유적지는 대부분 시내에 몰려 있어 찾아보기 편하다. 우선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엔 백제 웅진 도읍기의 왕과 왕족 무덤이 모여 있는데, 무령왕릉을 비롯해 7개의 고분이 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무덤이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따르면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은 ‘8척 장신에 이목이 수려하고 인자관후하여 민심이 잘 따랐다’고 한다. 실제로 무령왕은 재위기간(501∼523) 동안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신장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겨 그의 아들 성왕대(代)에 이르러 백제 중흥을 이뤄내는 기반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1500년 전으로 떠나는 여로 충남 공주·부여

    ◀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라는 궁남지. 일본식 정원의 시원이기도 하다. <br>▶ 춘경(春景)이 특히 아름답다는 마곡사.



    1500년 전으로 떠나는 여로 충남 공주·부여

    ‘고색창연’한 버스정류장 옆 매표소에서 표를 사는 아낙네. 이날 부여 읍내에 장이 서 모처럼 시끌벅적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아쉽게도 무령왕릉을 비롯한 고분들의 내부는 비공개라 볼 수 없었다. 대신 고분 속을 재현한 모형관을 관람한 후 송산리 고분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인근 동산에 올랐다. 일곱 개 고분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광경이 어머니의 보드라운 젖가슴마냥 단아했다. 여기엔 사자(死者)들이 어머니의 가슴처럼 편안한 곳에서 다음 생을 준비하도록 배려한 백제인들의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고분군을 뒤로한 채 금강을 따라 30분 정도 차를 몰아 부여에 당도했다. 부여는 성왕 16년(538년) 공주에서 천도한 후 의자왕 20년(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123년간 ‘사비성’이라고 불렸던 백제 수도였다. 부여에는 백제 역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와 가장 처참한 멸망 당시의 흔적들이 함께 남아 있다.

    부여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정림사지오층석탑도 쓰라린 역사를 품고 있다. 6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 9호)은 부여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149개의 돌조각을 쌓아 만든 높이 8.33m의 이 탑은 현란하지는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용모를 뽐낸다. 하지만 1층 몸체돌에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업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어 멸망한 제국의 슬픈 뒤안길이 눈앞에 그려진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하루종일 다리품을 판 터라 출출함이 밀려왔다. 부여를 가로지르는 백마강 근처 구드래 나루의 구드래돌쌈밥(041-836-9259)을 찾았다. 구드래 나루는 백제시대에 사비성을 드나드는 배들의 항구 노릇을 하던 곳. 이곳을 통해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 중국으로 뻗어나갔다. 지금은 백마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 선착장으로 쓰이는데, 근처에 토속음식과 별미를 즐길 수 있는 식당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돌쌈밥. 돌솥밥과 쌈밥을 합친 말인데, 뜨끈한 솥밥과 함께 20여 종류의 신선한 유기농 야채들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음식점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학교 종, 축음기, 옹기 그릇 등 1950년대에나 사용됐을 법한 물건들에서 1980년대 영화 포스터와 필름까지 별의별 소품들이 음식점 내부를 만물상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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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성은 공주를 지키기 위해 쌓은 백제의 대표적인 성곽이다. <br>▶ 무령왕릉을 포함해 7개의 고분이 모여 있는 송산리 고분군. 어머니의 보드라운 젖가슴마냥 포근한 느낌이다.



    1500년 전으로 떠나는 여로 충남 공주·부여

    금강은 글자 그대로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아왔다.

    “고물상과 시골마을들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모으다 보니 13만점이나 됐어요. 백제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유물도 꽤 모았습니다. 부여 생활사 박물관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는 게 꿈입니다.” 주인 최규원(48)씨의 말이다.

    다음날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다시 찾았다. 막 솟아올라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등진 탑은 한낮에 봤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빛을 발하는 탑신 너머로 용틀임치는 고대 왕국 대도읍의 기상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설레다 못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탑을 떠났다. 이어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 궁남지, 삼천궁녀의 한이 서린 낙화암 등을 돌아보고 다시 공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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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궁녀의 한이 서린 낙화암. 백마강 구드래 나루터에서 유람선을 타면 낙화암을 둘러볼 수 있다.

    공주에서 추천받은 음식은 금강에서 직접 잡아 요리한 장어구이와 민물고기 매운탕이다. 그러나 몇 년 전 금강 유역에 댐이 건설된 후로는 민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단다. 그래도 금강 유역에는 민물고기 전문 음식점들이 성황이다. 주로 양식한 고기를 쓴다. 30여년간 금강변에서 음식을 내온 옛날 배씨네집(041-852-7371)에선 갖은 양념을 해 숯불에 구운 장어, 찹쌀로 만든 고추장에 살아 있는 게를 넣어 끓인 참게탕이 입맛을 돋웠다.

    평소 운동부족이던 다리에 여독이 조금씩 쌓이는 듯했지만 공주까지 와서 계룡산을 빠뜨릴 순 없는 노릇. 마음을 다잡고 산행을 나섰다. 계룡산은 철화분청사기의 본산지로도 명성이 높다. 철화분청사기는 14∼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서민적인 도자기로 대개 계룡산 지역에서 만들어졌고 일본 도자기의 원류이기도 하다. 산 중턱에는 1993년부터 철화분청사기를 연구하는 도예가 18명이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이곳 도예촌에선 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으며 직접 도자기를 구워볼 수 있다(비용은 1인당 1만원). 도예촌 사람들은 오는 4월8일부터 12일까지 ‘계룡산 분청사기 봄꽃 도자기 축제’를 마련한다.

    공주와 부여의 거리 곳곳에선 ‘백제 문화의 백미’라는 기와 장식이 눈에 띄었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이 백제에 대한 기억의 끈을 놓지 않고 백제문화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유적이 많은 탓에 개발에 제약이 많아 지역 발전이 더디다는 불만도 크다. 보존과 개발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 1500년 전의 영화(榮華)를 재현시키는 게 이곳 사람들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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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뜨끈한 솥밥과 신선한 유기농 야채들을 고루 맛볼 수 있는 돌쌈밥.<br>▶ 살아 있는 게를 넣어 끓인 참게탕은 공주 금강 유역의 대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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