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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기고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의 독설 한마당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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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 한다. 그의 비판에는 아군과 적군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에 대해 “가슴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묻는다.
  • “당신은 사유를 심장으로 하나?” 최근 대통령 탄핵, 영부인 모독방송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는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당파와 파벌로 찢긴 대한민국은 미쳤다

‘탄핵무효’를 외치는 진보그룹의 촛불시위(위)와 ‘탄핵지지’를 선언한 보수단체의 집회.

갑자기 주위의 사람이 낯설게 느껴질 때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믿었던 이들에게서 문득 이질감을 느낄 때, 그 당혹감 속에서 주위의 세계 전체가 매우 낯설게 나타나게 된다. 요즘 그런 체험을 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튄다’고 말한다. 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는 얘기는 지극히 온건하고 상식적인 주장들이다. 외려 내가 비판하는 것들이야말로 도를 넘는 주장이나 극단적 행태들이다. 그런데 왜 나보고 튄다고 하는 걸까. 나는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한민국의 소통은 극단적이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정치권만 극단적인 게 아니다. 탄핵사태가 나자 명문사학의 교수라는 분이 군인들 앞에서 “이 나라를 구할 길은 쿠데타밖에 없다”는 극언을 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한 철학자가 느닷없이 ‘자연법’ 운운하며 시민의 함성으로 헌법을 바꾸자고 선동한다.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 선거에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대통령을 뽑자고 하면 그만이다. 탄핵이 마음에 안 들면, 앞으로 탄핵요건을 법적으로 강화하자고 하면 그만이다. 그 얘기를 하는 데에 ‘쿠데타’라는 극단적 단어는 왜 필요하고, 개헌을 위해 거리로 나가라는 선동이 왜 필요한가.

군사 쿠데타 혹은 의회 쿠데타를 주장하는 하나의 극단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는 현행헌법을 ‘근원적 위헌’이라 부르는 또 다른 오버액션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극단적인 견해는 (각자 자기 진영에서) 지식인의 용기 있는 소신의 표명이라는 찬양을 받고, 이 엄청난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뜯어말리는 나는 졸지에 쓸데없이 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얼마 전 MBC ‘신강균의 사실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들의 집회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모인 이들은 정상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과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굳이 극단적인 욕설이 필요한가.



그 방송이 나가자 이번엔 그 반대편에서 난리가 났다. 집회의 사회자는 묘하게 편집된 화면 때문에 시민들로부터 온갖 비방과 욕설과 협박을 들어야 했다. 듣자하니 그는 ‘영부인 모독죄’의 대가로 이틀 만에 3000통의 전화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게 정상인가. 그런데도 그 편집의 극단성은 문제가 안 되고, 그 방송의 편파성을 지적하는 나는 졸지에 ‘튀고 싶어 환장한’ 놈이 된다.

군중 속의 럭비공

튀는 것은 공이다. 축구공, 농구공, 테니스공. 그 중에서 내 존재에 해당하는 것은 ‘럭비공’이다. 다른 공과 구별되는 럭비공의 고유한 성질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다.

나는 이것도 이해가 안 된다. 내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다. 그것을 가지고 보면 내가 특정한 사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얼마든지 합리적 예측이 가능하다. 내가 보기에는 외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럭비공이다. 상식적인 머리로는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도대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럭비공일까?

럭비공은 가끔 혼자서 거대한 네티즌 군단을 상대하곤 한다. 몇 년 전 부산대 여학생 몇이 인터넷 사이트에 대학 내 예비역들의 군사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전국의 예비역들이 궐기해 이들에게 끔찍한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그들의 개인정보를 빼내 포르노 사이트에 올리기까지 했다.

마침 ‘안티조선’ 운동을 하던 나는 조선일보의 극우성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이라면 이런 군사문화와도 열렬히 맞서 싸워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네티즌들은 이 사태 앞에서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 몰상식한 폭력의 편에 섰다. 이 예상치 못한 사태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실존적’ 고독을 느꼈다.

또 하나의 예. 한동안 미군 장갑차의 사고로 죽은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촛불로 애도하던 이들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감성적 휴머니스트라면 서해교전 당시 북한의 발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죽음에도 애도를 보내야 한다. 아울러 사람을 치어놓고 ‘나 몰라라’ 하는 미군의 무책임을 비난하는 사람이라면, 뚜렷한 이유 없이 총질을 하는 북한의 모험주의 노선도 소리 높여 비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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