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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굴

‘간도협약’ ‘中朝밀약’은 무효, 대한제국 말기까지 국내성은 한국 땅

사료로 본 고구려 수도 국내성의 영토주권

  • 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shimbg2001@hanmail.net

‘간도협약’ ‘中朝밀약’은 무효, 대한제국 말기까지 국내성은 한국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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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 ‘中朝밀약’은 무효, 대한제국 말기까지 국내성은 한국 땅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광개토대왕비. 중국 정부가 방탄유리벽으로 감싸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해 여러 곳에 국내성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경종실록’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이다. 다소 길지만 ‘국내성’의 위치나 주변환경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쪽 변경 방어의 중요한 곳으로서 본부(本府)보다 더한 곳은 없으나, 한 외로운 성(城)이 다른 험애(險隘)한 곳이 없고 믿는 것은 오직 장강(長江) 하나뿐인데, 근래에는 수세(水勢)가 크게 변하여 넘칠 때가 아니면 걸어서 물을 건널 수가 있으니, 천혜의 요충지로서의 험애함은 이미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강 밖에는 호산(胡山)들이 죽 막고 늘어서서 평상시 바라보는 시야로 몇 리(數里)를 벗어나지 못하니 만일 창졸간에 포위를 당한다면 며칠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방어군을 철수한 뒤로는 본부의 윤번(輪番)하는 병졸은 수백 명도 채 못 되니 급박한 형편을 당한다면 부곡(部曲)의 원근 지역에 흩어져 있는 자들을 어떻게 전령(傳令)하여 불러들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성첩(城堞)에 올라가 지킬 자는 성 안의 민정(民丁)뿐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성을 지키자면 어떻게 안전을 다짐할 수 있겠습니까? 군량이 모자라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성 안의 우물들이 거의 말라버렸으니, 이미 후원(後援)이 끊긴 데다 물과 식량마저 떨어진다면 그저 죽는 길밖에는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병자년의 호란(胡亂) 때에 임경업(林慶業)이 감히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지 못하고 물러나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나 지킬 계책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경업은 화란(禍亂)이 닥칠 것을 알고 미리 목숨 바쳐 싸울 전사들을 모집하여 저들의 경내(境內)를 정탐하고는 미리 성에 들어가 지켰지만, 지금은 형편이 아주 달라져서 예측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으니, 비록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는다 해도 멀리 백마산성까지 달려가기란 그 형세가 또한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30리쯤 되는 거리에 고성(古城)이 하나 있는데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으로 곧 고구려에서 500년간이나 도읍을 하였던 곳입니다. 형세의 편리함이 본주(本州)의 주성(州城)보다 100배나 나을 뿐 아니라 바로 천혜의 요새(金湯)입니다. 몇 겹으로 둘러싸인 속에 저절로 한 국(一局)을 이루고 있는데 옛 성터가 지금도 완연합니다.



밖은 험준하고 안은 평탄하여 토곽(土郭)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위는 3600여보(步)나 되는데 그 안에는 더구나 옛 우물이 많고 간수(澗水)의 여러 줄기가 마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의 동남쪽에는 따로 산기슭 하나가 있어 옆으로 뻗어서 빙 둘러막아 하나의 외곽(外郭)을 이루어 놓았으며, 또 10여리를 지나면 압록강의 여러 물줄기가 하나로 합수된 곳이 있는데, 바로 대총강(大摠江)입니다. 또 고진강(古津江)이 있는데 대총강의 하류와 바다입구에서 합쳐지니, 이곳이 바로 양하진(楊下津)입니다.

옛 성에서 수구(水口)에 이르는 길은 양쪽 골짜기가 마치 묶어놓은 듯한데 그 가운데로 한가닥 길이 통해져서 바로 10리 장곡(長谷)을 이루고 있으니, 설사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강을 건넌다 해도 한 걸음에 골짜기 입구(谷口)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 백마산성으로 물러나 지키더라도 적들이 또한 우리의 퇴로(退路)를 차단하지는 못할 것이니, 주성(州城)과 비교하여 같이 논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일 국내성으로 고을을 옮기고 백마산성과 서로 성원(聲援)한다면 비단 험준함을 믿어 스스로 견고하게 수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주(黃州)와 철산(鐵山)의 통로가 두 성 사이에 있게 되니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해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본부를 옮긴 뒤에는 저쪽과 우리의 사신이 곧바로 저들의 마전참(馬轉站)에서 권두(權豆)의 북쪽을 경유하여 대총강을 건너서 국내성에 이르게 될 것이니, 구련성(九連城: 요녕성 안동헌 동북에 있던 성) 한 군데 참(站)의 비용과 세 강을 따로 건너는 폐단이 한꺼번에 모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또 국내성에서 곧바로 용천(龍川)으로 가게 되니 소관참(所串站) 하나가 없어지게 되어 비용 절감도 적지 않습니다.”

국내성은 조선 의주 소속

이 글은 조선조 경종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던 이명언(李明彦)이 의주성을 옛 고구려의 500년 도읍지였던 국내성으로 옮기자고 건의한 상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조선 경종 1년은 1721년으로 청(淸)나라 강희(康熙) 60년에 해당하는데 고구려·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조 경종 때까지도 국내성은 엄연히 중국 땅이 아닌 조선의 의주에 소속된 땅이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경종 1년 8월5일에는 판중추부사 조태채도 연경(燕京)에 다녀오는 길에 국내성에 들러 요충지로서의 위치를 확인한 뒤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의주의 읍치(邑治)를 국내성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의주 부윤 이명언이 읍치(邑治)를 국내성으로 옮길 것을 소청(疏請)하였기에 신도 그곳에 가서 형편을 보았더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天作) 땅으로서 힘을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청컨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서 장문(狀聞)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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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shimbg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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