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밀약은 단순한 ‘대화 기록’… 조선 병합 승인한 협약은 없었다

  • 하정인 고려대 대학원 석사과정·사학

    입력2005-11-30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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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9월30일 주미대사관에 대한 국회 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실재 여부가 쟁점화하자 ‘신동아’ 11월호는 이와 관련한 연세대 김기정 교수(국제정치학)의 글을 실었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적극적으로 승인했으며, 다만 밀약의 성격이 협정이냐 각서냐 하는 형식상 논란만 남아 있다’는 게 그 요지였다. 이 글을 읽은 고려대 대학원 석사과정(사학)의 만학도 하정인씨가 또 다른 시각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테일러 데넷(Taylor Dennet)은 미 국회도서관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901∼09 집권)에 관한 사적(私的) 비망록과 외교서류 등을 조사하던 중, 1905년 7월27일 당시 미 육군성 장관이던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 사이의 비공식 회담에 관한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을 우연히 발견했다.

    데넷은 당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급의 중요 비밀사실을 알아냈다고 확신하고, 국무장관인 찰스 휴스에게 그 공문서를 공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휴스는 즉시 태프트에게 의견을 물었고, 태프트는 공개를 반대하지 않았다.

    데넷은 같은해 8월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에서 열린 미국 정치학회에서 이 문서 내용을 발표했고, 이는 미 ‘현대사(Current History)’지(誌)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일본 간 비밀협약(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실렸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 역사기록은 물론 한국의 관련 정치·외교·역사 서적과 교과서에서 통례적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근거이자 연원의 전부다.

    에스더스의 반론



    일본은 데넷이 발표한 당시에는 이 사실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한 병합소사’(日韓 倂合小史, 岩波書店, 216쪽)에 데넷의 논문을 그대로 수록했다. 그리고 1968년, 일본 외무성이 공식 간행한 ‘일본외교연표 병 주요문서’(日本外交年表 竝 主要文書, 1840∼1945) 편에서는 “본 각서 관계 서류는 소실되어 참고로 미 국무성 문서를 수록한다”는 주(註)를 달고 데넷의 논문에 실린 주요 3개 항을 실었을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국제정세, 그리고 루스벨트 개인의 사회적 다위니즘 (다윈이 제창한 진화의 학설)적인 제국주의 문명관에 근거를 둔, 조선에 대한 그의 선입관으로 미뤄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일본의 조선 병합의 주요 근거가 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추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진실일까.

    1959년 미국 역사학자 레이먼드 에스더스(Raymond A. Esthus)는 ‘현대사 저널(The journal of modern history)’에 ‘가쓰라-태프트 협약, 진실인가 신화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해 가쓰라와 태프트 간의 메모는 루스벨트가 펼친 극동정책의 핵심부분이 아니었고 태프트는 외교적 흥정(quid pro quo)을 관철할 목적으로 파견된 밀사도 아니었다”고 데넷 이래 정설로 받아들여져온 이 밀약에 최초의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에스더스는 데넷이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이라는 글귀에서 ‘agreed’라는 어휘를 ‘협정(agreement)’으로 확대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태프트의 일본 방문은 전임 필리핀 총독으로서, 그리고 육군성 장관으로서 마닐라를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른 것일 뿐, 일본과 구체적 외교협약을 맺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어떤 기록에도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일본을 방문해 극동문제를 토론하거나 타결하라고 한 훈령은 발견되지 않는다.

    태프트와 가쓰라 두 사람의 만남은 러일전쟁 이후의 극동정세와 관련해 벌어질 수 있는 일말의 사태에 대한 예방 차원이었고, 가쓰라는 조선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태프트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또한 태프트는 그의 관심사이던 필리핀 통치 및 방위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가쓰라와 견해를 교환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어떤 구체적 정책을 실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에스더스는 미일 쌍방의 그 누구도 서명하지 않았고 양 당사국의 의무적 구속조항도 없는 이 비망록이 단순한 ‘대화(conversation)’의 기록이었다고 주장한다. 태프트는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엘리후 루트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를 ‘대화의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om of conversation)’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이 사실이 ‘협정(agreement)’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비망록 본문에도 ‘다음과 같은 시각이 교환됐다(the following views were exchanged)’라고 씌어 있다.

    루스벨트는 이날의 만남과 대화에 대한 태프트의 전문 보고를 즉시 추인했는데, 이는 1년 전인 1904년 6월 뉴욕주 오이스터만의 자택에서 열린 다카히라 주미 일본공사와의 오찬에서 러일전쟁 종결시 일본의 편을 들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쓰라는 회동 말미에 이 비밀협약의 내용이 주일 미국대사인 그리스콤에게 전해지는 것을 삼가라고 태프트에게 부탁했다. 당시 조선에 호의적이던 그리스콤이 조선 당국에 이 사실을 알리면 일본이 이미 예정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특약 조인(1905년 11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루스벨트의 ‘우열 민족관’

    태프트가 방일한 지 3개월 후 일본의 친정부 언론기관인 ‘고쿠민(國民)’은 가쓰라와 태프트의 흥정 밀약을 보도했고, 주일대사 그리스콤은 10월4일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내 비밀협정의 루머가 일본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를 접한 루스벨트는 “나는 미국의 영토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에 대한 대가로 어떠한 이에게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들어주는 일이 없다고 확인한다. 우리는 그러한 간섭을 막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영토보전과 관련한 지원에 대해 어떠한 보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명하고, 이 문제를 일본공사 다카히라에게 추궁했다.

    며칠 후 가쓰라는 다카히라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공식 견해를 표명했다.

    “‘고쿠민’은 일본 정부 기관이 아니며 그 기사는 정부가 지시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것도 아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직면한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호의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이에 감사한다. 이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떠한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은 없다.”

    이는 일본 정부의 대(對)언론 발설에 대한 일반적 부정이 아니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대한 루스벨트의 해석(조선과 필리핀에 관한 흥정의 부인)에 동의하는 일본 수상의 절대적인 설명이었다.

    ‘고쿠민’은 일본 지도부와 가까운 친정부 기관이었다. 따라서 당시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실패했다는 국내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의 큰 외교적 성공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정보를 일본 지도부가 흘렸을 가능성이 있다.

    1905년 2월, “일본이 하와이나 필리핀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언론인의 질문에 루스벨트가 “무력에는 무력으로 싸워 이겨야 하며, 일본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국의 군비는 항시 강력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답변한 사실은 ‘고쿠민’에서 비롯된 미일간 입장 차이에 대한 루스벨트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볼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러일전쟁에 따른 일본의 조선 병합을 양해한 것은 그의 언급대로 일본과의 비밀협정이나 협약에 기초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가 개인적으로 빠져든 ‘우열 민족관’에 입각해 일본의 조선 병합 그 자체가 세계 평화는 물론 ‘열등’하고 자치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한국민의 장래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데 그 동기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보기’ 필요한 밀약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면서 부딪치는 어려움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 진행과정이 모두 지나가버렸고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란 기록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후대인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새로 편집, 정리, 해석한 것일 뿐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모두 과거에 관해 파악된 것, 이해된 것일 뿐이지 ‘역사 그 자체’는 아니다.

    따라서 역사 연구의 지향은 과거 인간의 사상과 행위를 인식하고, 그 역사를 일어난 대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근거가 되는 모든 자료, 즉 사료가 없으면 역사를 재구성해볼 수 없다. 물론 이 사료는 엄격히 비판되고 해석돼야 한다.



    에스더스는 루스벨트와 미일관계에 관한 몇 권의 저서를 간행했고, 1924년 데넷의 논문 발표 이후 자신이 반론을 제기한 1959년까지 수많은 사료와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을 검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흥정하지 않고 국력에 의한 외교정책을 집행한 루스벨트의 정통성과 러일전쟁 및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강력하고 확고했던 미국의 태도를 추정하는 데 주력했을 것이다(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의 중재에 대한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일본은 어쩌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가쓰라와 태프트의 대화를 이용하고 확대해석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에스더스 같은 학자가 의문을 제기했는 데도 아무런 저항 없이 교과서에 밀약 부분을 실은 우리의 역사 인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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